새해가 되었지만 작년이라고 부르기엔 2019년의 그림자가 아직 짙게 남아있다. 지난해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마일리지가 좀 남아있는 항공사에서 안내 문자나 카톡이 자주 도래하였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마일리지 중 4천마일이 신년이 되면 소멸되니 그 이전에 사용하여 소멸이 아닌 스스로 소진을 시키라는 문자였다. 그간 동남아나 뉴질랜드까지 마일리지를 이용하여 집사람과 다닌 터라 여태까지 뭐가 남아 있으려나 하였는데 살펴보니 아직 둘이 국내선 한 번 왕복할 수 있는 여력은 있었다.
소멸보다는 소진이 낫겠다 싶어 날짜를 짚어보았다. 마일리지를 사용하는 표라 그런지는 몰라도 주말에는 내가 오가고 싶은 시간대에는 비행기 좌석이 없었다. 딱히 중요하게 하는 일도 없으면서 짚어야 하는 날짜가 있을까만 그래도 연말이라 이리 걸리고 저리 걸리고 거기다 예정에 없던 일이 생겨 처음 예약을 연기하기 두 차례, 그리고 고른 게 크리스마스날이었다. 다행이 이른 아침과 다음날 늦게 돌아오는 시간에 궁합이 맞았다. 뜻하지 않게 일치된 날짜였지만 여명이 가시지 않은 공항 대기실에서 유리너머로 바라보이는 비행기가 어릴 적 산타크로스로 되살아나 다가왔다.
일기예보에서는 화이트크리스마스는 없을 거라고 하였다. 중부지방에도 안 내린다는데 남쪽 도시 부산에 무슨 눈이 내릴까. 그러나 난 눈부신 설원을 보았다. 하늘로 오르는 비행기가 좀 흔들리나 싶더니 곧 제자리를 찾자 창밖으로 설원이 펼쳐졌다. 하늘아래 세상이 있는가를 잊게 해 주는 완전 하얀 벌판에 비행기는 썰매가 되어 미끄러졌다. 두툼하고 하얀 운해(雲海)였다. 조그마한 틈새도 없이 펼쳐진 운해는 흡사 솜틀집 기계에서 갓 빠져나온 이불솜 같았다. 그러나 그 운해는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며 김해공항근처 산야로 내려서자 곧 한 폭의 수묵화로 변하였다. 여명이 서서히 사라지며 그 실루엣처럼 산봉우리 사이사이에 놓고 간 구름과 안개가 만들어낸 흑백의 어울림은 감히 김홍도라도 그 앞에서 붓을 드는 것이 자연에 대한 송구스러움으로 생각게 할 것 같다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사실 여행의 즐거움은 그것을 계획할 때가 더 크게 다가온다. 그 즐거움에 소소한 재미를 더하는 것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다. 다른 분들도 다들 경험하고 있는 것이지만 내 경우도 많은 국내여행에서 주로 자가용차나 렌터카를 이용하였다. 이유야 여러 가지지만 짧은 시간에 목적지에 대한 접근성이나 편의성을 키우기 위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가끔은 그 가지고 간 자동차 때문에 더한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었고 주차장을 찾아 헤매느라 일행과 별도의 행동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걷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러나 이번엔 시간을 배려해야 하는 일행도 없고 그저 조그마한 배낭 하나 메고 마누라와 동네에서는 잘 하지 않는 손잡고 팔짱 끼고 유유히 주위를 음미하며 힘들면 쉬어가고 계획대로 못가면 가지 않으면 그만이지 하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부산의 대중교통은 생소하니 인터넷을 통한 사전 탐사가 필요하였다. 우선 1박 2일에 가고 싶은 곳을 선정하고 대중교통으로의 접근 방법을 찾아보고 하룻밤 유할 곳도 예약하고 등등. 여행을 계획할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참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책상 앞에서 가고자 하는 곳에 대한 가장 편리한 대중교통 수단을 포함하여 버스 번호 및 버스정거장 번호까지 체크가 되니 컴퓨터에서 이런 정보와 지도 컷 등을 캡쳐하여 미리 핸드폰에 입력시키면 길거리에서 인터넷 찾을 필요가 없음은 물론 누구에게 물을 필요도 없으니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부산의 대중교통도 지금 사용하는 후불교통카드에 의하여 지하철과 버스의 환승은 물론 주민등록증으로 지하철 경로승차권 (수도권경로카드는 되지 않음)도 받을 수 있으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단지 내가 한 가지 사전에 몰랐던 것은 공항에서 부산 지하철 환승역까지 운행하는 김해경전철은 경로우대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도 교통카드에 의한 부산지하철과의 환승할인은 되었다.
크리스마스의 부산은 쾌청하였다. 부산의 서쪽에 도착하였으나 여행은 동쪽에서 시작하기로 하였다. 경전철, 지하철, 버스를 갈아타고 해동용궁사에 도착하였다. 크리스마스날에 교회나 성당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내외국인들이 용궁사에 몰려와 있었다. 내가 그곳에 도착한 시간은 비교적 이른 아침시간이었는데도 사진 찍을 공간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미 바닷가 사찰의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두 군데 다 몇 번 간 곳이기는 하지만 이번 여행을 제주도가 아닌 부산을 택한 것은 불교신자도 아닌 내가 용궁사를 보고자 함이 마누라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그 전의 부산 여행에서는 왜 그곳에 안 갔을까 하는 생각이 겹쳤다.
1박2일 동안 동쪽에서 서쪽으로 여행을 하니 동서의 중간쯤 되는 부산역 부근 비즈니스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곳에는 같은 이름의 호텔이 1,2로 나누어져 두 군데가 있다. 번호로 봐서 누구나 2자가 붙은 곳이 나중에 지어진 곳이라 생각할 것이다. 위치가 비슷한 곳이라 나도 당연히 그리 생각하고 예약할 때 묻지도 않고 2번을 택하였다. 많이 걸어야 하니 무료로 제공되는 아침밥을 풍성하게 챙겨먹고 체크아웃을 하며 좀 낡아 보이는 가구 때문에 담당에게 어느 쪽이 나중에 지었냐고 물었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2번이 나중에 지었을 거라는 생각을 깨는 대답, 2번이 먼저 지어졌고 1번이 나중에 진 거라 하였다. 그런데 왜 먼저 지은 것에 2번을 붙였냐고 묻자 그건 모른다고 하였다. 이건 먼저 지은 것에 손님이 줄어들까 생각한 상술이었을까?
용두산공원 타워를 내려오자 비가 내렸다. 일기예보에는 오후 늦게부터 내린다 하였는데 밤새 하늘의 생각이 바뀐 모양이었다. 태종대 정상까지 운행하는 다누비열차를 이용해야 하는데 비 때문에 운행이 중단되었다.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우산을 받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도 힘든 일이라 비가림막을 찾아 나무 사이사이로 바라보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보온병을 열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만들어 집사람에게 건네고는 그래도 섭섭함을 달래려 혼자 전망대까지는 걸어 올랐다. 전망대에서 바라보이는 비 내리는 태종대의 하늘과 바다는 모두 같은 잿빛이었다. 결국 남은 일정을 포기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다행이 일찍 올라올 수 있는 비행편을 탈 수 있어서 집 근처에 와 우동 한 그릇으로 저녁을 해결하고는 크리스마스 여행을 마감하였다.
저녁을 먹으며 이번 여행은 광한대교를 비롯하여 영도대교는 물론 다른 다리도 여러 번 건넌 것으로 바다에 놓인 가장 많은 다리를 건넜던 여행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결과는 대중교통을 이용한 때문이며 특히 지하철을 배제하고 주로 버스를 이용한 덕분에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2020년 1월 6일
지난해 크리스마스여행을 회상하며
하늘빛
음악 : 유튜브 이문세?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첼로 + 피아노) | 첼로댁
여정
2019년 12월 25일 오전 6시 집 출발-김포공항-김해공항(경전철,지하철,버스)-해동용궁사-점심(모듬생선구이)-동백섬(버스)-광한대교통과(버스환승)-자갈치시장(버스환승)-저녁(국수)-호텔(지하철). 12월 26일 오전 9시 호텔출발(택시)-용두산공원 부산타워-국제시장(도보)-점심(시래기정식과 가자미튀김)-태종대(버스)-김해공항(버스, 지하철, 경전철)-김포공항(지하철)-저녁(우동)-집(오후 10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