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korman 2022. 12. 17. 14:48

저물어가는 안면도 해변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김장을 한다 하니 가족이 모두 모였다. 예전과는 달리 포기수도 얼마 되지 않고 그나마 절인배추를 택배로 받아 속만 넣으니 내가 집사람을 좀 도와주면 더하여 다른 식구들의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식들과 손주들이 다 모였다. 손주들은 속 넣은 게 재미있다고 (실은 금방 실증이 나 다른 놀이를 찾지만) 할머니 옆에 붙어 앉았고 며느리와 딸은 주도적으로 일을 하였으니 내가 뭐 딱히 도와야 할 일은 없었다. 아들과 사위는 으레 김장날이면 주어지는 돼지고기 수육과 냉장고에 넣어둔 소주병에 더 관심이 있었다. 모두 모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던 중 며늘아이가 “좀 있다가 교복 맞추러가요.”라고 말을 꺼냈다. 난 생각지도 않고 무심하게 누가 무슨 교복을 맞추냐고 물었다. “아버님 큰 손녀요. 중학교 가니까 학교 배정 받으면 교복을 맞추어야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벌써?” 엉뚱한 내 반응에 모두들 웃기는 하였지만 손녀가 아장아장 걸어 어린이집에 다니던 모습의 기억만 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내 나이가 몇인지 세기도 싫은 나이가 되었으니 할아비집에 오면 할머니와 키 재기를 하던 아이의 모습을 보아 왔으면서도 순간적으로 그런 대답이 나왔다.

2022년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세월이야 눈에 보이는 게 아니지만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달력에는 그리 보인다. 이렇게 연말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어느 날 저녁 멋진 저녁노을을 마주하게 되면 마음이 차분해 지며 온갖 추억들이 떠오를 때가 있는 것처럼 1년의 황혼을 대할 때면 지나온 세월 전체에 대한 기억과 추억이 밀려오기도 한다. 그런 순간엔 무언가 문학적인 표현이 마구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냥 생각뿐,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다 지우고 또 그러기를 몇 차례 반복하면서 어린 시절 영화에서 보았던 소설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한겨울 돈이 없어 온돌을 데우지 못해 입김이 하얗게 서리는 방에서 조그마한 앉은뱅이책상을 마주하고 잘려진 실장갑에서 삐져나온 시린 손가락을 그 하얀 입김으로 녹이며 펜촉에 잉크를 찍어 원고지 몇 칸을 채우다가는 아직 멀쩡한 종이를 구겨 방바닥으로 팽개치던 그 모습. 종이도 귀하던 시절 뒷장을 재활용하여도 좋을 멀쩡한 원고지를 마구 버리던 그 영화 속 소설가의 모습을 보면서 방에 불도 못 때는 주제에 배가 덜 고팠구나 생각하였다. 지금은 프로작가들은 물론 나 같은 아마추어도 그렇게 종이를 버릴 일은 없으니 다행이지만 생각이 날 것만 같은데 나지 않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모양이다. 컴퓨터 화면과 자판이 그 모습을 대신해 주고 있을 뿐.

누구나 1년이 시작될 때는 올해는 무얼 좀 해야겠다고 몇 가지 다짐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 다짐을 모두 이루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나에게도 몇 가지 다짐이 있긴 하였지만 모두 대충 넘어갔고 한 가지만은 계획의 200%를 달성하였다. 한 달에 한 권의 책을 읽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리고 읽는 책마다 모두 독후감을 쓰겠다고 생각하였었는데 그 또한 건너뛴 것은 없었다. 어쩌다보니 지금 읽고 있는 책이 25번째가 되었다. 지금은 달라이라마의 ‘용서’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것도 황혼 속 문학적인 생각의 일부인지는 모르겠지만 책 제목이 어쩐지 연말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올해의 마지막 읽기로 선택하였다. 아직 올해의 일부가 남았기로 이 책은 지금 천천히 읽고 있다. 빨리 읽을 수도 없는 책이기도 하다. 달라이라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책 속에서 인터뷰를 하는 전문가들도 이해의 어려움을 겪는데 하물며 종교도 없는 나 같은 일반 독자가 어찌 페이지를 빨리 넘길 수가 있을까. 이 책의 독후감을 올해에 써야하니 올해의 글쓰기도 거기서 끝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생활운동을 열심히 하겠다던 또 다른 결심은 결국 결심으로 끝났다. 친구들과 당구를 친 시간을 거기에 끼워 넣자면 좀 보충이 될는지.

지금은 그간 읽고 버리지 않았던 그러나 버려야 할 것들을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책꽂이의 넓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영한대사전’이라는 커다란 사전이 눈에 가시처럼 들어온다. 스마트폰 사전이나 컴퓨터 사전에 밀려 들추어보지도 않는 골동품 종이사전. 이 커다란 건 어찌하여야 하나 고심 중이다. 작년에도 생각만 하다 못 버렸는데. 누구나 아는 ‘버킷리스트’라는 게 있다. 해가 바뀌면 사람들은 이 버킷리스트를 한 번쯤은 생각하게 된다. 모두들 희망적인 것, 특히 여행에 대한 것들을 많이 구상한다.  내 남은 인생의 버킷리스트에는 뭘 담아야 할까 생각중이다. 거기 맨 첫 줄에는 지금까지 매해 버리려고 꺼내 놓았다 그리하지 못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은 것들을 적어야하지 않을까. 일명 ‘버킷리스트, 죽기 전에 버려야 할 것들‘......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2022년 12월 17일 
하늘빛

 

음악 :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T2chyfmcRYU 링크

My memory (Piano 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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