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잡다한 이야기

나는 글 대신 말을 쓴다 - 원진주

korman 2024. 2. 18. 11:38

230129-230214  
나는 글 대신 말을 쓴다 - 원진주 - HC Books
 

90이 가까워오는 누님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출연하여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며 고부간의 갈등이나 문제점 등을 털어놓는 TV프로그램을 보시다 나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 저러다 집에 가서 대판 싸우는 거 아니냐? 다른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자기네들 집안일을 국민들이 모두 알게끔 저렇게 까발리냐? 듣자하니 집안 망신이고 누가 옳은 것도 없구만.” 방송을 보는 사람들은 웃고 즐기는 시간이 되겠지만 만약 그들이 방송에서 말 하는 대로 행동이 정말 그렇다면 아마 고부간의 사이가 단절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대본을 써서 각자 주어진 대로 연기를 한다고 하여도 연속극이 아닌 한 시청자들 중에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어느 정도는 본인들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겠지만 다 시청자들 재미있으라고 기본적인 대본이 주어지고 말 하는 순서도 주어지는 것이니까 누님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맞거나 말거나 누님의 걱정을 덜어주는 내 대답은 그것이었다.

이 책은 방송작가로서 지금까지 본인의 이름이 알려지기까지의 시작, 실패, 노력, 경험, 성공 등 자신이 걸어온 길과 대표작품의 소개 및 방송작가를 지망하는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조언과 충고, 그리고 일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 등을 기술한 책이다. 물론 책의 후반부에는 자신이 기획하고 구성한 프로그램에  대한 소개 및 기획안을 작가로써 어찌 기술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실 원고의 스캔본을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글을 통해서 작가는 방송작가를 희망하거나 지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기초적으로 알아야 하는 많은 것들을 가르치고 있다. 평소에 방송 대본에 관해서 많이 궁금하였던 나로서도 이 책을 통하여 그 궁금증이 많이 풀어지기는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스크린에 주어지는 자막에 대한 기대감은 풀어지지 않고 있다. 특히 예능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자막이 그렇고 무분별한 외국어 (외래어가 아님) 섞어 쓰기가 그렇고 의도적인 맞춤법 망가트림이 그렇고 반복적으로 계속 사용하는 표현문구나 삽화가 그렇다. 맞춤법을 의도적으로 틀리게 한 자막을 띄웠으면 다음 자막은 맞게 고쳐 띄워 시청자들에게 ‘맞는 맞춤법에 의한 단어는 이것이다.’라는 것을 알려야 하는데 요새 유행하는 들리는 소리대로 적어 놓거나 아이들 발음으로 적어 놓고는 그런 걸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예능 프로그램은 청소년들이나 젊은 층에서 많이 보는 프로그램이 아니던가. 작가라면 그런 것들이 시청자에게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생각해야 한다. 교양이나 교육 프로그램에 맞춤법이 틀린 단어가 자막으로 뜰 때는 작가의 자질을 생각해 보곤 한다. 난 자막까지도 작가의 몫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언어의 마술사’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외국작품을 번역하여 우리에게 맞는 작품을 만드는 것도 작가의 몫이다. 이런 임무가 그들이 일반적 호칭인 번역사로 불리지 않고 번역작가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그 방송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나 단어를 찾아내는 것도 작가의 몫이다. 평범한 단어를 벗어나 어떤 행위나 사실을 강조하여야 할 때는 그에 합당한 단어 찾기가 무척 어렵다. 그래서 TV를 보다 그런 자막이 나오면 작가에 대한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고 강조가 필요 없는 단어들을 외래어도 아닌 외국어로 바꾸는 행위는 작가의 몫이 아니다. 영문 ‘F’의 한글 외래어 표기법상 자음은 ‘ㅍ’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Four'를 포, ‘For'도 ’포‘, Pact도 아닌 ’Fact'를 팩트 등등으로 표기하는 것은 참 어색하다. 그렇게 어색하게 안 해도 그냥 국민들이 잘 사용하는 우리말로 써도 되지 않는가? 어떤 면에서는 ‘적절한 우리말 표현이나 단어를 찾기 어려우니 시간 허비하지 말고 그에 해당되는 영어단어를 찾아 강조용으로 쓰자.’라고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들기 전이나 만든 후나 PD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결부되어 있는, 자신이 작가역을 한 프로그램에서, 기초적으로 누구나 알고 있는 ‘되’와 ‘돼’를 구분하지 못하는 자막이 넣어졌을 때 작가는 어떤 생각이 들까 궁급하다.

비록 한 시간 반짜리 회의의 사회용이지만 나도 한 달에 한 번은 대본을 쓴다. 회의용 대본이다. 주로 내가 하는 말이 많이 들어간 내용이지만 중간 중간 얽혀있는 사람들이 여러 명 있다 보니 그들이 어느 순서에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넣어주어야 하고 그게 완성되면 회의 전 관계자들에게 프린트하여 나누어준다. 내 말이 어디서 끝나고 그 다음은 누가 어디부터 어떤 내용을 이야기 하여야 하는지 공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번 그 간단한 회의 대본도 무슨 말을 어찌 써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고 쉽게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방송작가로서의 역할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름난 소설가라고 모두 드라마 대본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드라마는 드라마 작가가 따로 있다. 유명한 소설이 드라마가 되려면 그 드라마 작가의 손을 거쳐야 한다. 연예프로그램의 마구잡이 자막 때문에 비평 아닌 비평을 하긴 하였지만 성공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시청자의 눈길을 잡으려는 방송작가들의 사생활도 마다한 필사적인 노력엔 경의를 표한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작가 지망생들에게 꼭 필요한 경험적 교과서라 하겠다.

2024년 2월 24일
하늘빛

 

음악 :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xaeQewlgoGE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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