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우리 종 공부하기

한국범종의 특성과 변천

korman 2007. 3. 31. 14:58

 

▲ 함양 백운암 건륭삼십이년 동종 (咸陽 白雲庵 乾隆三十二年 銅鍾)

 

한국범종의 특성과 변천

 

최응천(국립춘천박물관장)

1. 범종이란

 

 
  범종이란 절에서 시간을 알릴 때나 대중大衆을 집합시키고 의식을 행할 때 쓰이는 종을 말한다. 지금도 우리는 사찰의 종각鐘閣이나 전각殿閣에 매달아 놓고 아침, 저녁으로 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세속적 번뇌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범종의 장엄하고도 청명한 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청정히 참회토록 하고 불교의 무한한 이상理想과 신앙심을 불러일으키게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성덕대왕 신종의 명문에는 범종의 소리가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인 부처의 진리의 말씀에 비유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 기록에는 '그 소리가 용의 읊조림과 같아서 위로는 지극히 높은 하늘과 밑으로는 지옥세계에 이르기까지 막힘이 없이 메아리쳐 보는 자는 기이함을 칭송하고 듣는 자는 복을 받는다. ('神器化成 狀如岳立 潛通於無底之方 見之者稱奇 聞之者受福') 고 하여 범종의 소리를 통해 궁극적으로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까지 구제할 수 있다는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심오한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범종은 사찰에서는 일찍부터 가장 중요하게 사용된 불교의식법구佛敎儀式法具의 하나였다.


범종의 기원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두 가지 설이 알려져 오고 있다. 즉 인도의 간타(Ghanta)라는 타악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중국에서 은대殷代 이후 널리 제작된 고동기古銅器의 일종인 종鍾이나 탁鐸을 혼합한 형식으로부터 발전된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중국 주대周代에 많이 만들어져 전국시대戰國時代까지 널리 쓰였던 '용종甬鍾'이라는 중국 고대 악기의 일종에서 변화, 발전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坪井良平, 『朝鮮鐘』 (角川書店,1975),pp.19-21참조)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설 가운데 우리나라 종이 지니는 외형적 특징은 중국의 고동기인 용종과 많은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고대의 용종이 불교의 전래와 함께 절에서 사용되는 불교 악기로 활용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이 결국 우리나라 범종에까지 그대로 이어지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현재까지 알려진 범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일본 나라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중국 진陳의 태건7년太建七年(575년)의 명문을 지닌 범종이다. 전체 높이가 29.1cm에 불과한 소종이지만 초기 범종의 형태나 당시 중국범종의 발전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도 1

).
이러한 중국 6세기 범종이 당시 우리나라와 일본에까지 전래되었을 것으로 볼 때 전래 초기의 범종은 서로 비슷한 양상을 띠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를 반영하듯 일본의 범종은 이러한 중국 초기의 범종에서 커다란 양식적 변화 없이 계승된 반면 우리나라의 범종은 전래 이후 오랜 기간이 경과되지 않아 중국이나 일본 종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독자적인 범종으로 새로운 정착과 발전을 이루어나간 것으로 믿어진다.
 

2. 한국 범종의 기원과 전래

 

  우리나라의 범종은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와 마찬가지로 삼국시대 불교전래 이후부터는 제작, 사용되었다고 여겨지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통일신라 8세기 이후의 작품뿐이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史』권 3 ‘원종흥법原宗興法 염촉멸신’조의 기록 중에는 “천수 6년天壽六年(565년)에 범종을 사찰에 걸었다[懸垂]” ('大淸之初 梁使沈湖將舍利 天壽六年 寺寺星張 塔塔雁行 堅法幢 懸梵鏡(鐘)')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백제시대의 6세기 후반경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여 군수리 절터와 금강사터金剛寺址의 발굴조사에서 강당터講堂址의 좌, 우편에 각각 종루鐘樓와 경루經樓로 보이는 방형의 건물지가 확인된 바 있다. 아울러 삼국시대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밑그림이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일본 나라의 주고지中宮寺에 소장된 ‘天壽國曼多羅繡帳’이라는 수의 우측 하단부에는 팔작지붕의 전각 내부에 범종이 걸려있고 이것을 한 스님이 당목撞木으로 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도 2

). 이상과 같은 기록이나 자료들을 참고해 볼 때 적어도 삼국시대 6세기 후반 경부터는 이미 사찰에서 범종이 사용되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한편 백제시대에 창건된 익산의 미륵사터彌勒寺址에서는 한 점의 금동풍탁金銅風鐸(높이 14cm)이 발견되어 주목되는데, 이 풍탁의 형태를 통해 삼국시대 범종의 형태를 추정하는데 참고가 되기도 한다(

도 3

). (姜友邦 선생은 이 금동풍탁을 新羅鐘의 原形으로 보고 있다. 姜友邦,「聖德大王 神鐘의 藝術과 思想」,『聖德大王神鐘 綜合論考集』(國立慶州博物館,1999.2).pp.139-140 참조) 전체적인 모습은 범종과 거의 흡사하지만 정상부에는 반원형의 고리를 부착하고 구연인 탁구鐸口 부분을 4릉의 굴곡으로 처리한 점이 독특하다. 몸체의 상,하대 등에는 별도의 문양이 첨가되지 않았으나 유곽 안에는 5개씩의 작은 종유鐘乳를 돌출 장식하였다. 특히 이 풍탁에서 주목되는 점은 몸체 앞, 뒷면에 장식된 원형의 당좌로서 바깥 테두리를 연주문聯珠文으로 두른 내구 주위로 8잎의 단판 연화문으로 간략히 장식한 모습이다. (崔應天, 「百濟 金屬工藝의 樣相과 特性」,『百濟의 彫刻과 美術』, (公州大博物館·忠淸南道, 1992),pp.272-273 참조) 이처럼 풍탁의 용도상 아무 필요 없는 당좌를 장식하고 있는 점은 당시 범종의 형태를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삼국시대 범종이 한점도 남아있지 않은 현 시점에 이 한 점의 풍탁은 당시 범종의 양식적 특징을 규명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삼국시대 범종이 과연 어떠한 모습이었으며 통일신라 725년에 만들어진 오대산 상원사 범종이 가장 연대가 앞선 작품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범종의 모습의 형식을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삼국시대 범종이 단 한 점도 남아있지 못한 현재로서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러한 상원사 범종은 우리나라 종의 시원적 작품이라기보다 전형 양식인 통일신라 종으로 완전히 정착을 이룬 이후 제작된 가장 전성기의 범종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3. 한국 범종의 구조와 특징

 

  이처럼 우리나라 범종의 기원이나 그 초기적 양상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범종은 통일신라종의 예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중국이나 일본종과 다른 매우 독특한 형태와 의장意匠을 지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세부의 장식이 정교하고 울림소리[共鳴]가 웅장하여 동양 삼국의 종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으로 꼽힌다.


우선 종신의 외형은 마치 독[甕]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 같이 위가 좁고 배 부분[鐘腹]이 불룩하다가 다시 종구鐘口 쪽으로 가면서 점차 오므라든 모습이다. 종의 정상부에는 한 마리 용이 목을 구부리고 입을 벌려 마치 종을 물어 올리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으며 양다리는 각각 앞, 뒤로 뻗어 발톱으로 종의 상부인 천판天板을 힘차게 누르고 있다. 이 부분을 '용뉴

'라 부르며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 부분을 강화하면서도 장식적인 효과를 주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용뉴란 기록에 의하면 고래를 무서워한다는 상상의 바다짐승인 포뢰蒲牢를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범종의 용뉴 부분을 가상의 동물인 포뢰로 불렀다는 것은 『삼국유사』 권 3 탑상편塔像篇 ‘사불산四佛山 굴불산掘佛山 만불산萬佛山’ 조條에서 확인된다. 이 기록에는 "--종鍾에 포뢰蒲牢가 달렸고 종을 치는 당목撞木을 고래형태[鯨魚]로 만들었다" ('下列紫金鍾三

皆有閣有蒲牢 鯨魚爲撞 有風而鍾鳴 則旋

僧皆

拜頭至地 隱隱有梵音 盖關

在乎鍾也')고 하여 통일신라 당시에도 포뢰라는 이름으로 불린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특히 포뢰가 고래를 무서워한다는 가상의 동물인 점에서 종을 치는 당목을 고래로 만들었다는 구절은 지금은 그 형태에 관해 특별히 밝혀진 바 없는 통일신라 당시의 당목 형태와 의미 등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자료이다.


용뉴의 목 뒷부분에는 우리나라 종에서만 볼 수 있는 둥근 대롱형태의 '음통音筒' - 음관音管, 용통甬筒이라고도 함 - 이 솟아 있다. 이 부분에는 대체로 몇 줄의 띠를 둘러 3~4개의 마디로 나눈 뒤 그 마디마다 위아래로 솟은 연판 무늬를 새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음통은 대부분 그 내부가 비어있고 하부 쪽이 종신 내부에 관통되도록 구멍이 뚫려 있는 점이 독특하다. 따라서 이 음통은 종의 울림소리와 관련된 음향조절장치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되고 있다. (陳庸玉은 성덕대왕 신종 종합보고서의 음향조사에 관한 내용 중 音管의 역할이 가격시의 격렬한 진동을 신속히 걸러내어 (댐퍼, 또는 감쇠기) 충격을 신속히 제거하고 소리의 일부를 공중으로 보내는 두 가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아울러 이러한 완충 작용을 하는 음관이 없다면 가격음의 천이 상태가 길어지고 그만큼 충격을 오래 끌게 되어 종에 무리가 가하게 되지만 깔때기 모양으로 출구가 벌어져 있어서 고주파는 제거하고 저주파를 보존함으로써 고른 음향은 오래 보존하고 불필요한 고주파는 신속히 제거하는 역할을 한 배려라고 설명하고 있다. 陣庸玉, 『에밀레 쇠북(성덕대왕신종)의 음향진동 특성』, 『聖德大王 神鍾 綜合論考集·綜合調査報告書』 (國立慶州博物館,1999.2), pp.250 ~328 참조)


그러나 근래 음통의 역할과 소리의 공명면共鳴面에서 성덕대왕 신종을 대상으로 삼아 음향학적으로 실험해 본 바 있으나 특별한 상관관계를 입증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당시 성덕대왕 신종의 음통을 막고 쳤을 때나 떼고 쳤을 때 공명의 효과 면에서 별 상관이 없었다는 실험 결과는 음통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앞으로 더욱 연구되어야 할 과제로 남았다. 이처럼 기존에 알려져 있는 음통의 음향학적인 역할 외에도 음통의 용도에 관해서는 2가지 설이 주장되어 오고 있다. 그 첫째는 음통이 종 고리를 다는 역할을 하는 용뉴의 목 뒷부분에 붙는 이유를 들어 종의 무게를 지탱하는 용뉴를 보강하고자 부착된 것이라는 견해이다. (廉永夏,『2장 -종의 구성요소 -』『韓國鐘硏究』(韓國精神文化硏究院,1988.12),pp.28- 29 참조) 물론 우리나라 종의 용뉴가 대체로 목 부분이 가늘고 성덕대왕 신종과 같은 대형 종을 용뉴 부분만으로 버틴다는 것이 어렵게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크기가 작은 중형 종까지도 반드시 음통이 부착되고 일본이나 중국종의 경우에는 중량과 크기가 큰 대종에도 쌍룡의 용뉴만으로 종을 거는 예로 미루어 볼 때 이 설은 그다지 신빙성 있게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로 음통은 용도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제작되었다는 견해로서 이 음통의 역할을 『삼국유사』에 보이는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 설화에 연관시켜 신라의 삼보(三寶 : 황룡사 9층목탑, 진평왕의 옥대玉帶, 만파식적萬波息笛) 의 하나인 만파식적을 통일신라 종에 부착하여 상징화 한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한다. (黃壽永,『신라종의

』『梵鐘』9호(韓國梵鐘硏究會,1986),pp.1-6) 그렇지만 상원사上院寺 종이나 성덕대왕聖德大王 신종神鐘, 일본에 있는 운수사雲樹寺 종의 음통에서 볼 수 있듯이 통일신라 종은 위, 아래로 맞붙인 연판문대를 띠 모양으로 중간 중간을 돌려 매듭짓고 그 사이에 당초문이나 보상화문으로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히려 죽절형竹節形과 같은 구체적인 피리의 형상을 만든 예로는 시대가 한참 내려온 조선시대 1722년에 만들어진 화엄사 대웅전 종이 한 점 있을 뿐이다. 따라서 아직까지 통일신라 종의 음통이 만파식적을 상징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아직까지 좀 더 많은 검증을 요하고 있다.


어쨌든 우리나라 범종에 보이는 음통은 종소리와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 것임에는 분명한 듯 하다. 그것은 통일신라 종 뿐 아니라 고려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음통의 내부가 비어 있고 하부에 뚫려진 작은 구멍[小孔]이 종 몸체의 내부와 관통되어 있기 때문이다. 범종에 주조에 있어 이렇게 소공을 만들어 종신 내부와 관통시키는 주물 과정은 상당히 까다로운 작업인 동시에 그야말로 의미 없이 이처럼 불필요한 과정을 의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음통도 시대가 내려가면서 구멍이 막혀지거나 공명과는 관계없는 규모가 작은 종에까지 사용되어 점차 형식적인 면이 강조된 장식물로 변화되는 점을 볼 수 있다. 앞으로 이 음통에 관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실험 결과와 연구가 따라야 하겠지만 음통 이야말로 가장 우리나라 범종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인 동시에 범종 주조의 과학적인 단면을 증명해 주는 자료임에 분명하다.


종의 몸체 상부와 종 아래쪽의 하부에는 동일한 크기의 문양띠[文樣帶]를 둘렀는데, 이 부분을 각각 상대上帶와 하대下帶라 부르며 여기에는 당초무늬 연꽃무늬나 보상화문寶相華文 등의 문양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상대 바로 아래에 붙여 네 방향에는 사다리꼴의 곽廓을 만들어 이 곽 안으로 9개씩 도합 36개의 돌출된 종 꼭지[鐘乳]를 장식하였다. 그 형상이 마치 연꽃이 피어나기 직전의 연꽃봉우리 모습인 연뢰형蓮
形으로 표현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더러운 연못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연꽃은 불교에서 사바세계에서의 불법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며 극락정토에 표현되는 연화생蓮化生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처럼 36개의 연꽃을 배치한 것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한 설이 밝혀져 있지 않지만 36은 모든 중생과 중생계를 나타내는 사생구계四生九界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범종에 장식된 종뉴鐘乳는 처음부터 일본 종의 꼭지형 장식과는 다른 연꽃봉우리를 형상화 한 것이라는 점에서 유두乳頭라는 지금까지의 이름보다 '연뢰蓮'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그리고 이것이 모여진 곽도 유곽乳廓이 아닌 '연곽蓮廓', 또는 '연실蓮室'로 불러야 될 것 같다. 이러한 연곽은 대체로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이것은 종의 굴곡에 비례하도록 만들어진 결과이며, 상대와 붙은 윗부분을 제외하고 그 외곽 부분에 띠를 둘러 대체로 상, 하대와 동일한 형태의 문양을 장식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도 4

). 한편 종신의 하대 위에는 종을 치는 자리로서 별도로 마련된 당좌撞座라는 원형 장식을 앞, 뒤면 두 곳에 도드라지게 배치하였는데, 그 위치는 대체로 종신의 1/3 부분쯤에 해당되는 가장 불룩하게 솟아오른 정점부頂点部에 해당된다. 이것도 당좌가 배치되는 종신 배 근처의 정점 부분은 종의 두께가 가장 두터운 부분이 되며 이 곳을 반복적으로 타종했을 때의 충격과 그에 따르는 종의 파손을 지연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배치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나라 범종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종의 소리나 역학 면을 고려한 듯 당좌부분에까지 세심한 배려를 두어 제작하였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이 당좌에는 중앙부에 연밥[蓮子]이 장식된 원형의 자방子房을 만들고 그 주위로는 연판문蓮瓣文과 그 바깥 테두리를 구슬을 연결시켜 나가는 연주문대聯珠文帶로 두른 원권圓圈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앞, 뒷면에 반대로 배치된 두 개의 당좌와 당좌 사이에 해당되는 종신의 여백에는 악기를 연주하며 하늘에서 날아 내리는 듯한 주악천녀상奏樂天人像이나 비천상飛天像, 또는 공양자상供養者像을 장식하는 것도 우리나라 범종의 대표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은 특히 통일신라 범종의 전형적인 양식을 설명한 것으로서 우리나라의 범종은 이러한 통일신라 범종형태를 기본으로 하여 각 시대마다 조금씩 변화되어 간 것임을 알 수 있다.
 

4. 한국 범종의 시대적 양상과 변천

 

  우리나라의 범종은 통일신라 725년의 상원사 종으로부터 19세기 중엽의 조선 말기 범종에 이르기까지의 약 1300년에 걸쳐 불교 공예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식법구의 역할을 수행해 오면서 각 시기마다 독특한 양상과 규범을 지니며 꾸준히 제작되어 왔다.
이러한 우리나라 범종을 각 시기마다 대표적인 특징을 중심으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이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통일신라는 전기 (8세기 초~9세기 초)과 후기 (9세기 전반~10세기 전반) - 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고려시대는 전기(10세기 중엽~11세기 전반) 와 중기(11세기 중엽~12세기 말), 그리고 후기 (13세기 초~14세기 초), 말기(14세기 전반 ~ 말) 로 세분하여 살펴보았다. 조선시대는 전기(14세기 말 ~ 15세기 후반) , 중기(16세기 전반 ~ 17세기 초) 로 나눈 뒤 기존의 조선후기도 다시 후기(17세기 전반 ~ 18세기 후반) 와 말기(18세기 후반 ~ 19세기 중엽)로 나누어 편년하였다.

 

1) 통일신라시대 종의 특징과 변천

 

  통일신라에 만들어진 종은 도합 9점을 확인할 수 있는데,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5점 가운데 2구는 파손된 작품이지만 대체적인 양식적 특징을 파악해 볼 수 있다. 나머지 4점은 일본에 건너가 있으며 이 가운데 조구진자常宮神社 종(833년)과 우사진구宇佐神宮 종(904년)은 국내에서 찾아볼 수 없는 9~10세기 통일신라 범종의 중요한 편년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崔應天, 「日本에 있는 韓國梵鐘」,『다까하라 히미코 기증 고려범종』(국립문화재연구 소,2000.7),pp.56~63 참조)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범종 가운데는 통일신라 725년에 제작된 오대산 상원사 소장의 범종이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통일신라의 범종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양식적 특징을 구비하고 있으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세부 문양이나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 등에 있어 약간의 변화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양식적 변화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가 종 몸체에 부조로 조각되는 주악상의 변화라 할 수 있어 이를 중심으로 통일신라종은 크게 전기 : 전형양식의 완성과 전성기 - 2구軀 1조條 주악상의 정착-(8세기 초~9세기 초)와 후기 : 단독 주악상의 등장과 도식화(9세기 전반~10세기 전반)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아울러 전기 종이란 통일신라 범종의 전형양식으로 완성을 이룬 시기를 말한다. 따라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통일신라 종의 가장 오랜 작품이 725년에 제작된 상원사종이라는 점은 이 종이 우리나라 종의 시작을 알리는 시원적 작품이라기 보다 통일신라의 가장 전성기를 구가하는 시기의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결국 이러한 전성시기의 완성은 바로 성덕대왕 신종을 통해서 완벽하게 구가될 수 있었다(

도 5

).


전기 종의 주악상은 2구 1조가 종신 앞, 뒷면에 도합 4구가 배치된다. 구름 위에 앉은 주악상의 자세는 양 무릎을 꿇고 다리를 뒤로 젖힌 궤좌형

座形에서 점차 몸을 옆으로 돌리는 모습으로 바뀌며 9세기 초 범종의 경우 구름 위에 별도의 연화좌가 첨가되는 점을 볼 수 있다. 악기는 마치 하아프처럼 생긴 공후空侯와 생황笙篁, 그리고 길게 옆으로 뻗힌 횡적橫笛과 가슴 앞에 놓는 요고腰鼓를 연주하며 그 가운데 횡적과 요고가 가장 많이 등장된다. 그러나 771년에 만들어진 성덕대왕 신종만이 유일하게 단독상이면서 악기가 아닌 손잡이가 달린 병향로柄香爐를 받쳐든 모습의 공양자상供養者像인 것은 이 범종이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국가적인 발원과 역사役事로 제작된 특수한 목적의 범종이란 점에 이례적인 양식을 취하였으리라 이해된다.


후기 종의 경우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2구 1조의 주악상이 이제 단독의 독립 주악상으로 바뀌어 요고와 횡적을 각기 나누어 연주한다는 점이다. 그 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803년에 만들어진 선림원터禪林院址 종과 실상사實相寺 종이 만들어졌던 9세기 전반에서 그다지 오래지 않은 833년 명문의 일본 후쿠이현福井縣의 조구진자常宮神社 소장의 연지사 蓮池寺 종의 짧은 기간 사이에 새로운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아울러 전체적으로 주악상의 모습이 조금 작아지면서도 활달한 모습에서 점차 어딘지 맥이 빠진 듯 느슨하게 표현된다. 동시에 비파琵琶와 같은 앞에서 볼 수 없었던 악기의 등장도 새로운 요소라 할 수 있다.


1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통일신라 종의 안정감 있는 당당한 외형과 힘에 넘친 용뉴의 박진감이 사라지면서 문양의 화려한 장식성도 점차 생동감을 잃어간다. 종의 규모가 더욱 줄어들면서 주악상의 모습은 이제 생기를 잃고 얼어붙은 것 같은 경직성과 도식화의 경향을 피할수 없게 되는 쇠퇴의 과정을 맞게 된다. 이것은 결국 종 몸체 앞, 뒷면의 주악상이 동일한 모습이면서 하나의 악기만을 연주하고 있는데, 통일신라 말 중국 불교미술의 자극과 영향에서 단절됨에 따라 불교조각이 쇠퇴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과 마찬가지로 조형 의지의 감퇴와 주조기술 역량의 부족에도 한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끝으로 통일신라 범종의 명문은 성덕대왕 신종을 제외하고 대부분 종의 외형에서 잘 안 보이는 부분에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자면 상원사종은 천판이라고 불리우는 종신의 상부면, 그리고 선림원지종의 경우에는 종신의 내부면에 기록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9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조구진구 종에서 처음으로 종신의 상대 아래로 네모꼴의 자리를 두어 명문을 양각시킨 점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방형의 명문곽銘文廓은 일본 우사시宇佐市 우사진구宇佐神宮 범종과 같은 10세기초 종에 와서는 종 몸체의 당좌와 주악천인 사이의 여백을 택해 기다랗게 네모꼴의 곽을 만들어 그 안에 명문을 새겼다(

도 6

). ('天復四年甲子二月 日松山村, 大寺鑄成內節本和上能與(興)本村主, 連筆一合入金五千八十 方(斤)盒掃成' 여기에서 '天復四年'은 통일신라 孝恭王 8년(904)에 해당되며 松山村의 위치는 불명하지만 그 곳에 있었던 大寺, 즉 큰 절에 시납된 종이라고 해석된다.) 이 종에 보이는 종신의 방형 명문곽은 이후 고려시대 범종의 새로운 양식적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후 고려 종에는 여기에다 국립중앙박박물관 소장의 천흥사天興寺 종(1010년)처럼 장방형의 명문곽이 위패형位牌形으로 바뀌어 별도의 문양처럼 장식되는 새로운 변화를 볼 수 있다.

 

2) 고려시대 범종의 특징과 변천

 

  한국 범종의 기본 형식인 통일신라의 범종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시대의 범종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새로운 고려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그 형태와 의장면에서 다양하게 변모를 이루어 나가게 된다.


우선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불교가 국가적 보호 아래 크게 융성을 이루게 됨에 따라 사찰의 창건이라던가 중창과 같은 불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모든 불교공예품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의 범종의 제작이 크게 늘어남을 볼 수 있다.


종의 몸체는 그 외형이 직선화되거나 아래 부분인 종구 쪽으로 가면서 점차 밖으로 벌어지는 경향을 보이며 천판의 외연인 상대 위로 입상화문대立狀花文帶라는 돌출 장식이 새로이 첨가되기 시작한다. 이 입상화문대는 고려 중기 종의 경우 낮게 흔적만 보이다가 후기 이후에 와서 점차 연화문이나 여의두문如意頭文을 장식한 꽃잎 형태로 돌출되어 상대와는 별도의 완전한 독립문양대로 자리잡게 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입상화문대는 고려 범종의 제작시기를 구분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양식적 특징이 되고 있다.


용뉴는 통일신라 종에 비해 목이 가늘면서도 길어지고 점차 S자형의 굴곡을 이루면서 매우 복잡하게 표현된다. 특히 용의 머리가 종의 천판에서 떨어져 앞을 바라보게 되는데 이에 따라 용의 입안에 표현되던 여의주가 발 위나 음통 위에 장식되기도 하는 등 상당히 장식화되는 점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고려 종에서부터 옆의 목 뒤에는 마치 불꽃이나 뿔과 같은 기다란 장식이 첨가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음통에 얕게 부조로 표현되거나 간략히 장식되던 것이 점차 음통과는 별도로 기다랗게 돌출되어 화려하게 표현되는 경향을 띠운다.


또한 종의 몸체에는 고려 초기까지 몸을 옆으로 뉘인 채 나르는 듯한 비행비천상飛行飛天像을 부조하지만 점차 연화좌 위에 앉은 불상 또는 보살상을 장식하거나 삼존상을 천개天蓋와 함께 표현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자리잡게 된다. 상대와 하대에도 당초문이나 보상화문 외에 국화문과 뇌문雷文과 같은 기하학적 문양 등의 다양한 문양이 장식된다. 당좌는 본래의 종을 치는 자리로서의 고유한 기능보다 장식적인 의미가 강조되어 그 수가 4개로 늘어나거나 종의 크기에 비해 매우 작게 표현되는 것은 고려적인 새로운 변화이다.


고려 후기 종의 경우 연곽을 원형으로 처리한다던가 종신에 공작명왕상孔雀明王像, 신장입상神將立像 등을 장식하기도 하며 안동 신세동에서 출토된 범종의 경우처럼 당좌와 연곽의 표현이 생락되고 영락瓔珞만을 종신 전체에 장식한 독특한 예도 확인된다. 한편 근래 새로이 확인된 바와 같이 1222년에 만들어진 경북 영일의 오어사吾魚寺 종에서는 처음으로 종신에 '육자광명진六字光明眞言'을 장식하게 되는데, 이는 종에 처음으로 등장되는 범자문의 예로서 주목된다. (崔應天, 「吾魚寺의 佛敎工藝品」, 『聖寶』2 (大韓佛敎曹溪宗 聖寶保存委員會, 2000.9), pp.52~60 참조) 이후 개인 소장의 계미명癸未銘 종, 국립부여박물관 소장의 무술명戊戌銘 종과 같은 고려 후기 종에도 이러한 범자무늬가 장식되어 조선시대 범종으로까지 계승을 이루게 된다. 특히 13세기에 들어와 높이 40cm 내외의 작은 종이 대량으로 만들어지는데, 이러한 종은 건물 내부에 걸려 소규모의 용도로 사용되거나 개인들의 기원의 용도로 활용된 것이라고 추정된다.


한편 13세기 전반 이후에는 명문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연호를 사용하는 데 있어 혼란을 가져온 듯 기년명 대신 간지만을 새긴 예가 많아지게 된다. 그와 더불어 이 시기 이후부터 역량 있는 범종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결국 쇠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몽고와의 전란에 따른 정치·사회적 혼란과 연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14세기에 들어와 중국 장인의 힘을 빌어 제작하게 된 개성의 연복사演福寺 종(1346년)을 통해 새로운 중국종 양식이 우리나라에 유입됨으로서 이후 만들어지는 조선 초기의 종은 통일신라 이래로 꾸준히 계승되었던 전통형보다는 중국종의 양식이 반영되는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된다.


고려시대 종은 그 양은 전대에 비해 크게 늘어났으나 전반적으로 통일신라 종에 비해 주조기술이 거칠어지고 문양이 도식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결국 대량생산에 따른 기술적 역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데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겠다.
고려시대 종은 크게 입상화문대의 있고 없음을 중심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고 이는 다시 초, 중, 후, 말기의 4기로 세분화하여 구분해 볼 수 있다. 즉 각 시기별로 특징적인 양식적 변화와 기간을 편년이 확실한 범종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우선 초기는 고려 범종이 성립되어 전개를 이루어 나간 통일신라 종과의 과도기적 시기로서 대체로 10세기 중엽부터 11세기 전반에 해당된다. 중기는 고려 범종으로의 완전한 정착을 이룬 1058년의 청녕4년명淸寧四年銘 종이 만들어진 11세기 중엽부터 12세기 말경이다. 입상화문대로 특징 지워지는 고려 후기 종은 13세기초부터 14세기초를 후기로 나누어 입상화문대의 정착과 소종이 유행된 시기, 그리고 14세기 전반부터 말까지의 고려 말기의 범종은 외래 양식의 유입과 절충기로 볼 수 있다.

가. 초기 : 고려 범종의 성립과 전개 - 비행비천상飛行飛天像의 등장 - (10세기 중엽~11세기 전반)

통일신라 범종에서 종 몸체 앞뒤에 장식되는 2구 1조씩의 주악천인상은 833년에 제작된 일본 조구진자常宮神社 소장 종에서부터 다시 1구의 단독 주악상으로 바뀐다. 이러한 양상은 통일신라말에 제작된 일본 우사시 (우사진구?天復四年銘)(904년) 종에까지 그대로 계승을 이루게 되는데, 종신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묘사된 경직된 주악상의 모습과 별도의 명문곽이 문양처럼 독립되어 배치되는 새로운 변화를 볼 수 있다.
통일신라종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시대의 범종은 기본적으로 통일신라의 요소를 따르고 있지만 고려초기종의 경우 종신에 표현되는 주악상 대신에 몸을 옆으로 뉘어 마치 나는 듯한 비행비천상으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예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범종이 현재 히로시마현廣島縣 조린지照蓮寺에 소장된 준풍4년峻豊四年銘(963년) 종으로서 몸을 뉘인 듯한 비천상의 모습과 함께 왜소해진 음통과 용뉴, 상대에 시문된 반원형의 능형문菱形文과 당좌의 표현, 역시 종신에 크게 부각된 명문곽 안에 명문을 부조하였다. 이러한 고려 초의 새로운 과도기적 경향은 명문은 없지만 일본 시모노세키시下關市 소장의 스미요시진자住吉神社 소장 범종에까지 그대로 계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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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국내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고려 범종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천흥사 종(1010년)에 와서는 비천상이 이제 더욱 고려적인 모습으로 정착되고 용뉴의 용두가 천판에서 떨어져 앞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새로운 고려적인 요소를 보이게 된다. 이후 1058년의 청녕4년명 종에 불·보살상이 등장되기까지 연꽃 등을 지물로 든 비천상으로 묘사되는 특징을 지닌다.

나. 중기 : 고려 범종으로의 정착 - 불·보살상의 등장과 장식화 - (11세기 중엽~12세기말)

고려 초기 종이 통일신라 종에서 고려시대로 바뀌어 나가는 과도기적 양상을 띄운 시기라 한다면 고려 중기 종은 본격적인 고려 범종의 완전한 정착을 이루는 시기이다. 즉 고려 초기를 거쳐 그다지 오래지 않은 짧은 기간 사이에 종신에 장식되는 비천상이 이제 불,보살상이라는 새로운 고려적인 요소로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양식적 변화를 볼 수 있다. 청녕4년명 종(1058년)은 이러한 고려 중기 범종의 두드러진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우선 용뉴는 그 입을 천판 위에서 띠어 앞을 바라보고 있으며 천판의 외연에는 마치 입상화문대처럼 보이는 구름모양의 띠를 두르고 있음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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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상대 위에 나지막하게 굴곡을 이루는 장식띠는 결국 고려후기 종에 등장되는 입상화문대의 초보적인 단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입상화문대 장식은 고려 초기의 천흥사종 등에서 볼 수 있는 주물접합선, 즉 용뉴와 종신을 별도로 붙여 주조할 때 천판 위에 남게되는 보기 흉한 접합의 흔적을 감추기 위한 배려로부터 시작되어 점차 하나의 독립적 문양대로 자리잡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청녕4년명 종 이후에는 전혀 보이지 않다가 1196년의 명창7년명明昌七年銘 종에까지 오히려 고려전기 종의 요소가 계속 계승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 시기 범종의 연곽 안에 배치된 연뢰는 매우 작고 납작하게 표현된 경우가 많으며 당좌가 4개로 늘어나 장식적인 의미가 강조되어진 점을 볼 수 있다. 또한 불,보살상 주위에는 악기를 천의로 묶어 날리는 듯한 독특한 장식문양이 유행되는 점도 독특하다. 그러나 이후에 만들어진 12세기 후반까지는 이러한 장식적 요소와 함께 용뉴 등에서 오히려 고려 전기 종에서 볼 수 있는 복고적 경향이 계속 유지되고 있음도 느낄 수 있다.

다. 후기 : 입상화문대의 정착과 소종의 유행 (13세기 초~14세기 초)

고려 중기까지 천판 외연을 돌아가며 장식되던 연판문은 사라지는 대신 상대 위에 둘러지는 입상화문대라는 별도의 문양대가 정착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입상화문대는 청녕4년명 종에서 이미 초보적 단계를 볼 수 있으나 본격적인 정착은 13세기를 들어와서 유행을 이루게 된다. 일부에서는 지금까지 그 발생시기를 11세기 중엽으로 추정하기도 하였으나 1196년의 명창 7년명종까지 전혀 입상화문대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본격적인 시작은 13세기 초 정확히 말해 일본 이마세츠가今淵家 소장의 승안6년명承安六年銘 (1201년)종을 첫머리에 둘 수 있다(

도 9

).
이러한 입상화문대와 함께 천판상에 얼굴을 띠어? 앞을 바라보는 용뉴는 그 목이 S자형의 굴곡을 이루며 발 위로 보주를 잡고 있거나 세장해진 음통 위에도 작은 보주가 여러 개 장식된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는 수요의 증가를 반영하듯 높이 40cm 내외의 소종이 많이 제작되는데, 이들은 건물 내부와 같은 실내에서 소규모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짐작된다.
한편 중국의 정우년간貞祐年間(1213~1216) 이후 연호의 사용에 혼란을 가져온 듯(貞祐年間은 1216년까지 4년 밖에 사용되지 않았지만 貞祐12年銘(1224년)을 지닌 利義寺 飯子나 日本 高麗美術館 소장의 貞祐13年銘(1225년) 범종을 통해 연호의 교체와 관계없이 오랜 기간 동안 사용되어온 점을 엿 볼 수 있다.) 명문을 새길 때 기년명 대신 간지만을 새긴 예가 많아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와 더불어 13세기 중엽 이후에 역량 있는 범종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결국 쇠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몽고와의 전란에 따른 정치·사회적 혼란과 연맥을 같이한다.

라. 말기 : 외래 양식의 유입과 절충(14세기 전반~말)

14세기에 들어오면 향완香
과 사리기舍利器 등의 금속공예품을 포함하여 불상, 불화와 같은 일련의 불교미술품의 제작은 새로운 활력을 맞게 된다. 아울러 이 시기에 들어와 '황제만만세皇帝萬萬歲'나 '대원大元'으로 기록되는 명문에서 보여지듯 원나라의 연호를 거부감 없이 사용하게 되며 외래 양식의 수용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즉 라마탑을 본 뜬 공주 마곡사탑의 건립이나 라마 탑 형식의 사리기가 채용되고 금강령金剛鈴, 금강저金剛杵와 같은 밀교密敎를 밑바탕으로 하는 의식법구의 제작 및 거울에 불, 보살상을 새기는 경상鏡像의 유행, 화려한 채색을 위주로 하는 불화의 제작 등 전대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외래 양식이 미술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崔應天,「羅末麗初의 金屬工藝」,『高麗末 朝鮮初의 美術』(國立全州博物館,1996.10), pp.103~104 참조)
이러한 영향을 반영하듯 황해도 평상군 월봉리月峰里에서 출토된 범종에는 밀교적 도상인 공작명왕상을 부조한 경우를 볼 수 있으나 범종의 경우 그 제작은 그다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것 같다. 양식적으로 전대의 쇠퇴 양상에서 다시금 활력을 찾고자 노력한 듯하지만 주조기술의 퇴보를 면치 못하게 된다.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일본 가마쿠라시[廉倉市] 鶴岡八幡宮에 소장된 지치4년至治四年銘(1324년) 범종이다. 비록 양식적으로는 후기 범종을 따르고 있으나 기다란 얼굴에 괴수처럼 묘사된 용뉴 옆으로는 왜소한 음통이 달려 있으며 단순한 입상화문대와 상대는 한데 붙은 것처럼 형식적이다. 그리고 작아진 연곽 안에는 도식적인 연뢰가 납짝하게 표현되었다. 하대와 연곽의 문양은 더욱 도안화되었으며 종신에 표현된 작은 보살좌상菩薩坐像은 세부 표현이 불명확하지만 구름 위에 앉아 머리 위로 천의를 날리는 13세기 중엽 범종의 보살좌상을 계승하였다. 연곽 아래마다 작게 배치된 4개의 당좌는 이미 장식문양으로 변모되어 그 의미를 상실하였다.
한편 고려말인 1346년에 제작된 개성의 연복사 종을 통해 중국 종 양식이 유입됨으로서 이후 제작되는 범종은 중국 종을 모방하거나 중국 종과의 혼합이나 절충을 이루게 되는 우리 나라 범종 양식에 있어 결정적인 전기를 맞게된다. (이 종은 元나라 황제의 명을 받들어 건너온 資政院使 姜公金剛과 在藏庫使辛候裔가 金剛山의 종을 만들고 돌아가는 길에 고려 忠穆王과 공주의 발원으로 演福寺의 옛 종을 다시 만든 것임을 기록된 명문을 통해 알 수 있다. '至正丁亥 令資正院使 姜公金剛, 奉天子之命, 來鑄大鍾,閣而懸之于岾之上(下略)', 李穀, 「東遊記」, 『東文選』卷 71 記 참조 및 崔應天,「東文選과 高麗時代의 工藝」,『講座美術史』1호 (韓國美術史硏究所, 1988.10), pp.157~159 참조) 따라서 이후 만들어지는 조선초기의 종은 중국 종 양식을 반영한 새로운 요소가 크게 유행을 하게 되는데, 봉은사 소장의 장흥사명長興寺銘 종(1392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미약하나마 전통형 종 양식도 근근이 계승되어 진 것으로 보인다.

 

3) 조선시대 범종의 특징과 변천

 

  고려 말의 범종양식을 이어받은 조선 초기의 종은 음통이 없어지고 한마리의 용뉴는 쌍룡雙龍으로 바뀐다. 입상화문대는 소멸되며 연곽은 점차 상대에서 떨어져 보다 밑으로 내려오며 당좌가 아예 없어지거나, 있다 해도 그 개수와 위치가 일정치 않아 종을 치는 자리로서가 아니라 무의미한 장식문양으로 전락해 버린다. 또한 종신의 중단쯤에는 중국 종에서 흔히 보이는 횡대橫帶라고 불리우는 두·세줄의 융기선 장식이 첨가되며 하대가 종구에서 위쪽으로 올라가 배치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아울러 종신의 여백면에는 불좌상이나 비천상 대신에 두 손을 모아 합장한 형태의 보살입상菩薩立像이 장식되며 이 밖에 용문, 범자문, 파도문 등을 필요이상으로 시문하여 매우 번잡한 느낌을 주게 된다. 더욱이 그 외의 여백면에도 대부분 종 제작에 관계된 긴 내용의 명문(주로 제작에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 돈을 낸 시주자施主者 명단, 발원문發願文 등)을 빽빽이 기록한 점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당시의 주종장鑄鐘匠 집단의 분업 상황, 소속사찰의 종교적, 경제적 위치와 현황 등 여러 가지 사회제반사항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시대 범종도 그 양식적 특징을 중심으로 4기로 구분해 살펴볼 수 있다.

가. 전기 : 외래 양식의 류행과 전통의 계승 (14세기 말~15세기 후반)

조선 초기에는 강력한 전제왕권의 확립을 반영하듯 왕실의 발원과 재력을 동원하여 국가적인 주조사업으로 이루어진 2m가 넘는 대형의 범종이 많이 제작되었다. 흥천사興天寺 종(1462년), 보신각普信閣 종(1468년) 등이 대표적이며 절에서 사용하고자 제작된 봉선사奉先寺 종(1469년)과 낙산사洛山寺 종(1469년)도 비교적 대형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들 범종은 쌍용의 용뉴와 불룩한 천판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연판문이 장식되었고 종신 중단에는 돌기된 두·세줄의 횡대와 종구 조금 위쪽에는 파도문 구획을 두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지만 일부의 범종은 고려 후기 종에서 조금씩 등장되기 시작한 범자문梵字文이나 육자광명진언을 크게 부각시켜 첨가하고 있다(도 10). 그러나 이러한 중국 종적인 양식과 함께 종신의 상부 쪽에 배치된 4개의 방형 연곽대와 9개씩의 연꽃형 종유鐘乳, 그 사이마다 1구씩 배치되어 있는 보살입상은 소위 통일신라부터 꾸준히 계승된 우리나라 전통형 범종의 여운을 시사한다. 반면에 1392년에 제작된 봉은사 소장의 장흥사長興寺 종,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정통14년명正統十四年銘(1449년) 종처럼 한마리 용[單龍]과 음통, 입상화문대 및 상·하대, 그리고 연곽과 당좌를 갖춘 전형적인 전통양식의 범종이 희소하나마 꾸준히 제작된 점을 주목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전통양식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 더욱 많은 수가 제작되면서 조선 후기 종의 커다란 두 가지 양식인 혼합형 종과 전통형 종이라는 두 가지 커다란 양식으로 확립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다.
조선시대 범종은 대체적으로 4개의 연곽과 그 사이마다 한 구씩 4구의 보살입상을 배치하고 있음은 거의 공통적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범종 가운데 제작 년대가 뚜렷하면서 종신에 보살입상이 장식된 작품은 15세기가 4점, 16세기가 2점, 그리고 17세기가 26점, 18세기가 53점에 이른다. 15세기 범종에 부조된 보살상의 양식적 특징은 모두 연화좌위에 몸을 왼쪽으로 돌린 자세로서, 손에 드는 지물持物 없이 두 손을 가슴 앞에 올려 합장合掌한 모습이다. 이들 보살상은 마치 당시 불화에 그려지는 도상을 따른 듯한 늘씬한 신체에 얼굴은 매우 사실적이면서, 양어깨에 걸친 대의大衣 안으로 상반신이 보이도록 안으로 받쳐입는 엄액의掩腋衣가 가슴 아래쪽으로 가로질러 표현된다. 팔꿈지 윗부분이 완전히 드러나며 다리 쪽에 입는 군의裙衣에는 화려한 영락이 장식된다. 이러한 부조 보살상은 15세기 후기의 해인사海印寺 대적광전종大寂光殿鐘(1491년)에 이르러서는 팔꿈치 윗부분이나 상반신이 거의 드러나지 않도록 몸 전체에 천의가 덮힌 모습으로 변모됨을 볼 수 있다.

나. 중기 : 전통 양식의 확산과 새로운 양식(혼합형混合形)으로의 이행 (16세기 전반~17세기 초)

15세기 후반의 해인사 종(1491년)을 마지막으로 16세기 중엽까지 범종의 제작은 갑자기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며 이를 반영하듯 아직까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기년명 범종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50~60년의 공백기를 지나면서 조선중기의 범종은 전대에 많이 만들어졌던 외래형인 중국 종을 따른 작품에서 점차 한국 종과의 혼합을 이루는 혼합 범종으로 바뀌어 가며 또한 지극히 미미하게 계승되었던 한국 전통형을 따른 범종이 점차 확산되는 두가지 양상을 띄우게 된다. 이러한 과도기적 양상을 띄우던 16세기를 지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난을 거치면서 17세기에 들어오면 이제 혼합형 종과 전통형 종이라는 두 가지 커다란 양식으로 정착을 이루게 되어 조선 후기 범종으로 자리 매김 하게 됨을 알 수 있다.
16세기에 만들어진 범종으로는 백련사白蓮寺 종(1569년), 광흥사廣興寺 종(1573년), 안정사 安靜寺 종 1580년)과 태안사泰安寺 종(1581년), 갑사동종甲寺銅鐘(1584년)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가운데 백련사 종과 광흥사 종, 태안사 종, 안정사 종은 전통형을 주로 따른 작품이지만 부분적으로 너무 과장된 듯한 장식화를 특징으로 하는데, 여의두형의 입상화문대와 지나치게 크게 묘사된 용뉴
및 왜소한 음통이 아직까지 본격적인 전통형 종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아직 전통형 종으로 정착을 이루지 못한 과도기적 경향을 보이는 갑사동종 중국 종을 따르면서도 한국 종 양식이 가미되어 적절히 혼합을 이루는 과정의 과도기적 범종이라 생각된다.

다. 후기 : 혼합형 및 전통형 범종의 정착과 발전 (17세기 전반 ~ 18세기 후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큰 전쟁을 치르고 난 후 조선사회는 정치적으로나 경제, 문화면에 있어서 많은 변혁이 이루어져 조선후기로 나가는 커다란 전환점을 맞게 된다.
17세기에 이루어졌던 사회적, 경제적 안정을 바탕으로 18세기에 들어오면 새로이 조선후기 문화의 황금기가 구현될 수 있었다. 특히 전란 이후 불타 없어진 궁궐, 사찰의 복구와 중창이 더욱 절실히 요구됨에 따라 사찰의 중창에 반드시 필요했던 불상, 불화를 포함한 범종의 제작은 그 수요에 부응하여 활발히 이루어 질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범종 가운데 현재까지 확인된 수량을 파악해 보면 17세기 종이 약 30여점, 18세기가 60여점, 19세기가 10여구로서 18세기 범종이 수량 면에서는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범종은 조선 전기에 비해 양식적으로나 크기 면에서 퇴보된 감이 없지 않으나 전대에 비해 매우 다양한 양상을 이루게 되는데, 임진왜란 전까지 장인사회를 주도했던 관장官匠은 붕괴되는 대신 승려 신분의 승장僧匠과 개인적 직업 장인인 사장私匠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된다(표 1). 이들은 지역별로 독특한 활동 영역과 나름대로의 작품 경향을 고수하면서 꾸준히 범종 제작에 참여하게 된다. 17세기 후반의 승장 사인비구思印比丘 (安貴淑,「朝鮮後期 鑄鐘匠 思印比丘에 관한 硏究」, 『佛敎美術』 9輯 (東國大學校博物館, 1988.11), pp.128-181 참조)와 사장 김애립金愛立 (崔應天,「鑄金匠 金愛立의 生涯와 作品」,『美術史學誌』第 1輯 - 麗川 興國寺의 佛敎美術 - (國立中央博物館, 1993.10), pp.208-216 참조)은 이 시기 장인사회를 주도했던 대표적인 장인들이었으며 18세기에 들어와서 승장은 점차 그 활동이 미약해지는 반면에 김성원金成元과 같은 사장이 꾸준히 활발한 범종 제작을 하였다. (崔應天,「18世紀 梵鐘의 樣相과 鑄鐘金 金成元의作品」,『美術史學誌』2輯 (國立中央博物館, 1998,3), pp.224~231 참조) 이처럼 조선 후기의 장인사회는 범종과 같은 주조 장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는 점에서 조선후기 범종은 우리나라 범종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활로가 개척된 시기라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울러 18세기의 장인사회를 이끌어 나갔던 사장들은 전 시기에 비해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 활동을 하면서 마치 개인사업화 되는 지역적인 편중이 더욱 강해진 점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전 시기에 보였던 혼합형이나 전통형, 또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문양표현 등 유파流派마다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던 범종의 양식은 더욱 복잡·다양해지면서 그때 그때마다 새로운 변모를 이루어 나가게 되며 이러한 전통이 조선 말기까지 이어지게 된다.
조선 후기 범종 가운데 중국종의 양식을 따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경기도 양주의 보광사普光寺 종(1634년), 1711년에 제작된 강화동종江華銅鐘을 들 수 있으나 17-18세기의 범종은 대부분 혼합형종混合形鐘이 주류를 이룬다. 분류의 기준은 종마다 부분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혼합형이란 우선 용뉴에 있어 두마리의 쌍용으로 장식되며 종신의 상부에는 상대 없이 범자문이 둘러진 예가 많다. 그리고 종신의 중단쯤으로 내려와 연곽을 배치하고 이 안에 꽃 모양의 연뢰를 장식한 경우를 들 수 있다. 당좌와 하대는 생략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시기적으로 17세기 범종의 경우 종구쪽에서 약간 위쪽으로 올라가 하대처럼 문양대를 장식한 예가 많고 18세기 범종은 옥천사玉泉寺 종루종(1776년), 신륵사神勒寺 종(1773년)을 제외하고 대부분 하대가 표현되지 않는다. 따라서 용뉴의 형태상 쌍룡을 지닌 선암사仙巖寺 종루종(1700년), 청계사淸溪寺 종(1701년), 명주사明珠寺 종(1704년), 도림사道林寺 종(1706년), 옥천사玉泉寺 대웅전大雄殿 종(1708년), 강화동종江華銅鐘(1713년), 옥천사泉隱寺 종(1715년), 영국사寧國寺 종(1761년), 갑사甲寺 종(1774년), 옥천사 종루 종(1776년), 용주사龍珠寺 종(1790년) 등이 이 부류에 속하는 작품이다.
전통형 범종이란 용뉴를 목을 구부린 한마리 용으로 처리하고 그 옆에는 장식적인 의미가 강한 짧고 가는 음통이 부착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천판의 가장자리에는 입상화문대의 형식을 따른 돌기대를 두르고 그 바로 아래 상대와 종구 쪽으로 하대를 장식하며 종신에는 4개의 연곽을 배치하여 고려 후기의 전통 범종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경우를 말한다. 이러한 전통형 범종은 봉은사 소장의 장흥사 종(1392년), 정통14년명 종(1449년)과 같은 조선 전기의 양식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조선 중기의 백련사 종(1569년), 광흥사 종(1573년), 안정사 종(1580년), 태안사 종(1581년)으로 전통양식이 이어지게 됨으로서 조선 후기에 이르면 크게 외래양식과의 혼합형, 그리고 한국 전통형을 따른 복고적 범종이라는 두가지 커다란 양식으로 대별되어 조선말 기까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 조선후기의 범종은 종신 상부에 1단 내지 2단의 범자문梵字文 띠를 두르거나 독립된 원권圓圈의 범자문으로 주회시켜 장식한 예가 많다. (이 梵字文은 원래 조선초기 奉先寺鐘(1469년)에 보였던 六字光明眞言, 즉 일체의 罪障을 소멸한다는 광명진언 가운데 6자를 발췌하여 사용하는 '옴마니반메훔'을 새기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종에 오면서 36자의 광명진언 가운데 순서 없이 6자만을 발췌하여 의미 없이 나열하거나 그 수효가 8자, 10자 이상으로 늘어나기도 하며 '옴'자 한자만을 반복한 예가 많아지는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또한 18세기의 범종에서는 당좌가 새겨진 예가 한 점도 없으며 17세기에 널리 등장되었던 위패형位牌形刑?장식이 점차 줄어드는 경향도 주목되는 현상이라 하겠다.
부조된 보살상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가 나타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연화좌 대신 구름 위에 서있는 자세로 표현되는 운상보살상雲上菩薩像의 등장이다. 이들 운상보살입상은 삼막사三幕寺 종(1625년), 청암사靑岩寺 종(1687년), 청계사淸溪寺 종(1701년)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양손을 가슴 앞에 모은 합장형이 아닌 연꽃을 받쳐든 모습이면서 자세에 있어서도 좌·우향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와 동시에 보광사 종(1634년), 용흥사龍興寺 종( 1644년), 선운사禪雲寺 참당원參堂院 종(1788년) 등과 같이 연화좌 위에 합장한 보살상도 꾸준히 계승 제작된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7세기 후반경부터는 선암사仙岩寺 대각암大覺庵 종(1657년), 능가사楞伽寺 종(1698년)과 같이 대의 주변에 지느러미 형태의 독특한 장식이 첨가된 제석帝釋, 범천梵天形 보살상이 새롭게 등장되었다. 특히 이러한 제석, 범천형 보살상은 선암사仙巖寺 종루 종(1700년), 옥천사 대웅전 종(1708년), 화엄사華嚴寺 종루 종(1711년), 완주完州 송광사松廣寺 종(1716년), 대흥사大興寺 종루 종(1772년), 용주사 종(1790년)처럼 18세기 작품에서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제석·범천형 보살상은 연화나 구름 위에 표현되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좌,우향의 자세도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은 듯 자유롭게 표현된다.
이처럼 18세기 범종의 부조상은 앞 시기에 비해 도상이 다양해지면서도 전반적으로 섬약해지는 경향을 피할 수 없게 되며 조선말기의 종은 이마저 사라지게 됨을 볼 수 있다.

라. 말기 : 양식의 혼용과 쇠퇴 (18세기 후반~19세기 중엽)

18세기 후반부터 조선 후기종의 커다란 양식적 특징으로 대별되었던 전통형종과 혼합형종은 그 양식이 서로 혼용이 되어 뚜렷한 분류나 구별이 없이 뒤섞인 듯한 새로운 혼합형 범종으로 바뀌어 감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새로운 혼용양상은 당시 주조기술의 전반적인 쇠퇴와 각 지역별로 활발한 범종 제작을 하였던 사장들의 활동이 미약해 지는 것과도 연맥을 같이한다.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범종 가운데 혼합형 종으로는 신륵사 종(1773년), 갑사 요사遼舍 종(1774년), 옥천사 종루 종(1776년) 등이 알려져 있지만 쌍룡의 용뉴와 종신에 하대가 함께 표현되는 조선 말기적인 혼용 양상을 보인다. 이에 반해 전통형종은 용주사 종(1790년)에 불과하고 음통 없이 용의 몸체만이 표현된 변형 양식의 통도사通度寺 대웅전 종(1772년)과 단룡에 음통이 없는 공림사公林寺 종(1776년)도 이 계통에 속하는 범종으로 분류되지만 전반적으로 특별한 형식의 구별이 없이 서로 혼용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한편 이 시기 범종의 장인으로서는 역시 사장 이외의 뚜렷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18세기 중엽부터 후반까지 충청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이만돌李万乭은 영랑사 종(1759년), 영국사寧國寺 종(1761년), 가야사伽倻寺 종(1770년)을 제작한 장인으로서 쌍용의 용뉴와 상대 없는 원권 범자문, 그리고 종신에는 두·세줄의 돌기대를 가미하여 전통 종보다는 외래형 양식에 가까운 혼합형 범종을 따르고 있다.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기인 18세기 후반에는 대흥사 종루 종(1772년), 신륵사 종(1773년)을 만든 이만숙李萬叔, 이영산李永山에서 다시 이영희李永希, 이영준李永俊이 만든 칠장사七長寺 종(1782년), 이영희李永喜의 망월사望月寺 종(1786년)으로 계승되며 옥천사 종루 종(1776년), 법주사法住寺 종(1785년)을 제작했던 이만중李萬重도 같은 유파에서 갈려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대인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대구를 비롯한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던 권동삼權東三은 보천사普天寺 종(1794년), 청곡사靑谷寺 종(無銘), 선운사禪雲寺 종(1818년)을 만들었으며 19세기 들어와서는 석천사石泉寺 종(1832년)과 보광17년명道光十七7年銘(1837년) 금고金鼓를 제작하였던 김종득金鍾得, 김종이金鍾伊 형제 외에 이렇다할 사장의 활동은 찾아 볼 수 없게 된다.
아울러 18세기 범종 부조상으로 가장 널리 제작되었던 제석·범천형 보살상은 19세기 초의 봉정사鳳停寺 종(1813년)까지 오랜 기간동안 범종 부조상으로 유행을 이루었으나 18세기의 중엽을 지나면서 용문사龍門寺 종(1738년), 향림사香林寺 종(1746년), 송광사松廣寺 감로암甘露庵 종(1755년), 통도사通度寺 대웅전 종(1772년)처럼 하반신이 생략되거나 약화된 도식적인 모습의 보살입상이 표현되기도 한다. 또한 개운사開運寺 종(1712년), 망월사望月寺 종(1786년), 법주사 대웅전 종(1804년)에는 보살상 대신 각각 사천왕四天王, 칼을 든 인왕상仁王像, 주악보살좌상奏樂菩薩坐像을 부조한 독특한 예도 확인된다. 이처럼 18세기 후반의 범종 부조상은 앞 시기에 비해 도상이 다양해지지만 전반적으로 도식화되고 섬약해지는 경향을 피할 수 없게 되며 19세기 중엽의 종은 이마저 사라지게 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양식의 혼란과 주조기술의 쇠퇴는 결국 동화사桐華寺 종, 고운사孤雲寺 종(1859년), 보림사寶林寺 종(1870년)과 같은 19세기 중엽의 종을 거치며 더욱 가속화되어 근대에 이르러서는 통일신라 이래로 한국 금속공예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해 오며 면면히 이어져 왔던 우리나라 범종의 전통은 완전히 단절되어 버리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5. 범종의 鑄造

 

  종을 만드는 재료는 청동으로서 구리와 주석의 합금을 사용한다. 물론 중국 종의 경우 청동과 함께 철제의 범종도 많이 만들어 진 것을 볼 수 있지만 청동이 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청동으로 만들어진 범종이 가장 널리 제작되었고 일부이지만 철제의 범종이 몇 점 전해진다. 우선 범종의 제조과정은 녹힌 금속을 형틀에 주입하여 만드는 주조법으로 이루어진다.
고대로부터 주종의 기술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우리나라 종의 아름다운 문양과 소리는 어떤 금속기 못지 않게 훌륭한 제작기술을 지니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종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으로는 중국의 것이지만 『천공개물天工開物』이라는 책에서 송나라 범종의 제작기술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도 11

). 이 책에는 당시 범종의 주조에 관한 그림과 설명이 구체적으로 도해되어 있는데 '종을 주조할 때 상등上等은 청동靑銅으로 만들고 하등下等은 주철鑄鐵을 사용한다'고 기록되어 청동 종을 상급으로 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비교적 늦은 기록 외에 범종의 주조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이나 내용은 전해지는 바가 없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범종을 주조하는 방법은 크게 사형주물법沙型鑄物法과 밀납주물법蜜蠟鑄造法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사형주조 공법은 천공개물의 기록에 보이는 것처럼 상급 종인 청동종은 주로 밀납주조이며 철종은 사형주조법으로 제작되었다고 짐작된다. 이것은 사형 주조공법이 밀납주조에 비해 지문판地文板을 사용하여 외형에 문양을 찍어 새기는 방법이기 때문에 제작된 범종의 표면이 곱지 못하고 문양이 투박할 수밖에 없는 단점이 있어 질이 떨어지는 종을 제작하는데 사용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사형 주조 공법의 순서는 우선 지문판을 제작한 뒤 외형틀 및 회전판을 제작하고 주물사鑄物砂를 다져넣은 다음 회전판을 돌려 범종의 내·외형을 완성하고 다시 외형틀에 문양을 찍은 뒤 주물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사형주물법은 현재까지도 일본 종에 경우 계속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다.


밀납주조법은 이미 삼국시대의 불상이나 백제시대에 제작된 금동용봉향로金銅龍鳳香爐를 통해서 일찍부터 고도의 밀납주조기술이 사용되어 왔음을 볼 수 있어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전통적인 주조기술이다. 우리나라 범종에 보이는 용두龍頭의 웅건한 모습이나 그 화려한 문양의 표현을 위해 필연적으로 밀납주조가 사용되었다고 추측된다. 이러한 정교한 표현은 밀납을 통하지 않고서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범종을 밀납 주조로 제작하게 될 경우 다음과 같은 공정을 거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밀납주조는 현재 크기 1m 내외의 중형종을 중심으로 실험적인 단계의 주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인간문화재 鑄鐵匠 元光植氏에 의해 6.25 전쟁으로 훼손되었던 禪林院址 동종이 밀납주조로 복원되어 國立春川博物館에 전시된 바 있다. 위의 내용은 당시 선림원지 범종의 밀납 주조로 복원하였던 과정을 중심으로 기술한 것이다. 崔應天,「禪林院址 梵鐘의 復原과 意義」,『講座美術史』18號(韓國美術史硏究所, 2002.6), pp.60~71 참조)


첫째, 흙 벽돌 쌓기 : 고령토와 점토, 물을 반죽해 일정한 크기의 벽돌을 제작한 후 내형內型의 크기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쌓는다. 둘째 : 덧붙이기 : 쌓아놓은 벽돌 주위에 다시 고령토와 점토, 물을 혼합한 것을 종 내형보다 약간 크게 덧붙인다. 셋째, 회전판 돌리기 : 덧붙이기가 끝나면 회전판을 돌려가며 표면을 잡는다. 넷째, 표면 손질 : 회전판을 돌린 후 거칠어진 내형의 표면을 흙손 등을 사용하여 매끄럽게 다듬은 후 물에 갠 흑연 가루로 마무리를 한다. 다섯째, 내형 완성 : 내형이 완전히 건조되면 회전판이 설치되었던 구멍을 봉합한다. 여기까지가 내형을 만드는 과정이고 다음으로 외형 제작공정을 보게되면 첫째, 밀납모형의 제작 : 밀랍과 소기름을 혼합한 밀초를 사용하여 종 모양과 동일한 밀납 모형을 만든다. 둘째, 주물사鑄物沙 제작 :고운 입자의 활석과 고령토, 점토, 흑연, 한지를 적당한 비율로 혼합하여 반죽한다. 셋째, 초벌바르기 : 고운 입자의 활석 가루, 고령토, 점토, 흑연가루, 한지를 혼합한 주물사를 붓으로 기포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밀납 모형의 표면에 바른다. 넷째 : 초벌 바르기 완성, 초벌 바르기를 한 후 응달에서 자연 건조 시키는 과정을 4 -5회 반복한다. 다섯째, 명주실 감기 : 초벌 바르기가 완료되면 표면에 물기가 약간 있는 상태에서 명주실을 드문드문 감아준다. 여섯째, 재벌 바르기 : 명주실을 감은 상태에서 초벌 바르기를 할 때보다 굵은 입자의 주물사를 반죽해 원하는 적당한 두께에 도달할 때까지 초벌 바르기와 같은 요령으로 발라준다. 여덟째, 건조 : 재벌 바르기가 완성되면 응달에서 완전히 건조될 때까지 자연 건조시킨다. 아홉째 : 밀초제거 및 외형 완성 : 외형의 외부에 열을 가하거나 약한 불로 직접 내부에 열을 가하는 방법으로 내부의 밀초를 녹여내어 외형을 완성한다. 다음에 이렇게 완성된 두 개의 내·외형 틀에 합쳐 주조하게 되는데, 첫째 내·외형의 組立 : 완전히 밀납이 제거되었으며 외형과 내형에 예열豫熱을 한 후 내형과 외형을 조립한다. 둘째, 거푸집 씌우기 : 내·외형의 조립이 끝나면 거푸집을 씌운다. 셋째, 다지기 : 외형과 거푸집 사이의 빈 공간에 주물사(고령토와 점토)를 채워 넣는다. 넷째, 주조 : 용해한 주석 17%의 청동을 쇳물받이에 받아 주입한다. 다섯째, 거푸집 해체 : 주조가 끝나면 충분히 식힌 뒤 거푸집을 제거한다. 여섯째 : 탈사脫砂 및 마무리 : 종 표면에 붙어있는 주물사를 털어내고 용액溶湯 주입구 등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면 완성을 이루게 된다.


물론 위와 같은 방법이 통일신라 범종의 전통적인 밀납 주조를 제대로 검증하여 재현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그러나 앞으로 밀납주조에 관한 깊이있는 실험과 분석이 이루어지고 지금까지 발견되지 못했던 범종의 주조와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이 출현된다면 당시 주조기술의 완벽한 재현도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를 통해 전통 범종의 재현에 머물러 그 형태와 문양을 고스란히 베끼기보다 새롭게 개발하는 것도 앞으로 수행하여야 할 과제 가운데 하나로 생각된다.
 

6.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나라의 범종은 그 기원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지만 삼국시대 후반 경에는 제작 사용되어 왔다고 믿어지며 통일신라시대 8세기 전반은 이미 한국적인 전형양식의 범종으로 성립을 이루게 된다. 주악천인상에서의 변화를 보이며 통일신라말까지 꾸준히 계승되어 온 전형양식은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비행비천상이나 불,보살상로 도상이 바뀌어 나가다 고려 후기부터 입상화문대와 같은 고려적인 새로운 특징이 첨가되는 등의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다가 고려 말 원나라를 통해 새로운 중국종 양식이 유입됨으로서 우리나라 종이 중국종을 모방하게 되는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초기까지 이어지지만 미약하나마 전승되었던 고려 후기의 전통양식이 밑거름이 되어 서로 혼합 절충되는 과도기적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17-18세기에는 혼합형과 전통형이라는 두가지 커다란 조선 후기 범종의 양식으로 정착될 수 있었다. 조선 후기 범종의 새로운 부활은 이 시기 주종장인鑄鐘匠人들의 활발한 제작에 힘입은 바 크다. 이들의 활동이 미약해지는 조선말기와 때를 같이하여 점차 주조기술이 퇴보하면서 한국범종의 전통은 완전히 사라지게 됨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양식적 흐름 외에도 우리나라 범종이 지니는 중요성은 다음과 같이 몇가지로 요약될 수 있겠다. 첫째 범종은 불교의식법구로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지대했던 만큼 당시 금속공예기술의 역량이나 발달상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자료가 되며 둘째, 기록된 다양한 내용의 명문은 불교사상의 변천이나 사원경제, 수공업 발달상을 비롯한 장인집단의 계보 등 당시의 종교, 사회, 경제 등 사회제반사를 이해해 볼 수 있는 어느 금석문 못지않은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셋째, 그 제작시기가 뚜렷한 작품이 많다는 점에서 이 곳에 보이는 문양과 도상은 불교공예품 뿐만 아니라 기타의 불교미술품을 연구하는데 있어 더없이 좋은 편년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우리나라 범종에 대한 연구가 더욱 충실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미술사, 금속공예사 뿐 아니라 주조와 음향을 포함한 공학적 측면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편에 치중되지 않는 보다 많은 이들의 관심과 종합적이고도 심도있는 연구가 절실히 요망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우리나라 범종의 면모와 실체가 새롭게 밝혀 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직지사박물관 2007년 3월 31일 현재

 

2014년 3월 2일 현재 http://www.jikjimuseum.org/Gallery_200407/thesis/01.a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