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현재 소재가 확인되는 한국종은 통일신라시대 종이 6기, 고려시대 종이 52기, 조선시대 종이 5기로, 총 63기가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통일신라시대 종 2기와 고려시대 종 18기, 조선시대 종 1기는 화재로 소실되어 파편만 남거나 더러는 행방이 묘연해진 것도 있다. 소재는 확인할 수 없으나 문헌기록상으로 존재했었던 것이 확인되는 종은 1870년대 메이지 유신의 폐불훼석 때에 사라지거나, 제2차 세계대전 때 화재를 만나거나, 더러는 도난되거나, 개인이 깊숙이 감추어두어 드러나지 않는 것들도 24구나 된다. 일본에 있는 한국종들의 분포를 대략 살펴보면 다음 지도와 같다.(
)
일본에 있는 한국종들의 주조 시기와 분포지역은 이 종들의 역사를 어느 정도 알려 준다. 이 남아 있는 종 가운데 특징적인 것은 고려시대 종이 아주 많다는 점이다. 상대적으로 조선시대 종은 망실된 것을 포함해도 5기밖에 확인되지 않는 데에 견주어 고려시대 종 52기는 국내에 있는 종보다 그 수효가 훨씬 더 많다. 조선시대 종은 드문데다가 조선 후기 종은 오직 1기만 있을 뿐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이 종들이 조선 후기에는 거의 건너가지 않고, 적어도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이 종들이 현재 분포하고 있는 상황을 지역으로 살펴볼 때 우리나라와 뱃길이 가까운 큐슈九州에 12기나 있어서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일본 북서쪽 해안이어서 우리나라 해류가 가 닿는 시마네현島根縣은 운주지雲樹寺, 고묘지光明寺, 덴린지天倫寺 등에 우리나라의 8-11세기 종이 소장되어 있다. 다른 종들도 뱃길이 이어지는 해안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많다. 주고쿠中國 지방 에히메현愛媛縣에 있는 슛세키지出石寺는 긴산金山 800m 정상 가까이에 있는 절이지만, 이 곳은 큐슈의 관문 후쿠오카福岡에서 뱃길로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곳이다.
종들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으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종에 새겨진 명문들이다. 명문은 원래 종을 주조했을 때에 새긴 명문과, 일본에 건너간 뒤에 새겨진 추명이 있다. 원명은 주조 연대가 소개된 것과 종을 주조한 절이나 지역을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원명이 있는 종들의 연대와 원래 주성되었던 지역이나 사찰명을 살펴보면 아래의 표와 같다. 그리고 그 원명에 따라 옛 지명을 현재 지역으로 바꾸어 살펴보면 마지막 칸에 적힌 것과 같다. 현재 지명이 확인되는 7기의 종이 있던 지역을 살펴보면 경상남도의 울산과 진주, 전라남도의 영암과 전라북도의 고창 등이 모두 해안에 가까운 지역이다.(
) 회진사가 있었던 경주 또한 감포 해안에서 1시간 거리면 닿을 수 있는 곳이다, 경북에서 비교적 내륙에 속한 청송말고는 대개 해안 가까이의 절에 있던 종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왜구의 침탈에 쉽게 노출되었을 것이다. 그밖에 우사진구 종은 송산촌 큰 절의 종으로 주성했다고 했는데, 송산촌이 어디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쇼텐지 종은 계지사 종으로 주성했다고 했으나 구체적인 지역은 새겨지지 않았다.
원명이 있는 종들의 주성 지역과 현재 지명
범종 | 주성 연대 | 종이 주성된 지역과 사찰 | 현재 지명 |
조구진자 常宮神社 종 | 833년 | 청주 연지사 菁州 蓮池寺 | 경남 진주 |
우사진구 宇佐神宮 종 | 904년 | 송산촌 대사 松山村 大寺 | |
나미노우에노미야 波上宮 종 | 956년 | 퇴화군 대사 退火郡 大寺 | 경북 영일 |
쇼렌지 照蓮寺 종 | 963년 | 고미현서원 古彌縣 西院 | 전남 영암 |
덴린지 天倫寺 종 | 1011년 | 동경 회진사 東京 廻眞寺 | 경북 경주 |
쇼우지 正祐寺 | 1019년 | 흥려부 임강사 興麗府 臨江寺 | 경남 울산 |
온조지 園城寺 | 1032년 | 청부현 대사 靑鳧縣 大寺 | 경북 청송 |
쇼텐지 承天寺 | 1065년 | 계지사 戒持寺 | |
고려미술관 高麗美術館 관음사 觀音寺 종 | 1225년 | 대량평 관음사 大良坪 觀音寺 | 전북 고창 |
이 종들이 일본에 건너가게 된 경위는 자세히 밝혀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몇몇 기록으로 대개 다음과 같은 시기와 경로로 옮겨갔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첫째는 외교관계에 따라 건너간 경우가 있을 것이다. 고려 말기에 왜구의 침탈이 극심해지자 고려 조정에서는 토야마東山 막부에 왜구의 준동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는데 이때 막부는 불경과 동종을 구해달라고 요청했었다고 한다. 이때 실제로 종이 기증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이러한 경로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간 범종도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가장 많은 경우는, 고려 말기에 해안에 횡행한 왜구의 침탈에 의한 것이었음이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그것을 확인시켜 주는 가장 확실한 기록으로 종 몸에 새겨져 있는 추각명追刻銘이 있다. 한국에 있는 종들에는 대개 주조할 때 처음부터 새겨진 원명原銘이 많은 데에 견주어 일본에 있는 종 가운데에는 뒤에 음각陰刻으로 글씨를 새겨넣은 것이 많다.
현재 일본에 건너간 뒤의 추명을 지닌 종은 17개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 15개가 1369-1565년 사이에 새겨진 추명을 지니고 있다. 이 추명에는 대개 이 종이 절이나 신사에 기증된 시기와 내력, 기증자들의 내용이 들어 있다. 다시 말하면 1592년의 임진왜란 이전에 이 종들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실려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1370년대는 고려 말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고려 국내에서는 몽고의 침입 이후로 정치적으로 불안정한데다가, 왜구의 침탈로 해안가 50리까지는 사람이 살지 못할 정도였다. 고려 청자 가마가 해안에서 내륙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상황 때문이었다. 일본에 있는 고려 시대 종에 새겨진 추명이 대부분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은 그 종들이 대부분 왜구의 약탈품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추명은 직접적으로 그것이 약탈에 의한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지는 않다. 사이다이지 간노인 西大寺 觀音院 종의 경우 명문은 없지만 절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그 절의 개조인 ‘安隆上人’이 바다에서 용신龍神에게서 받았다거나, 운주지 종의 경우 절에 전해 내려오는 『古鐘記』에 꿈을 따라가서 종을 바다에서 건졌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고 한다. 일본에 있는 종 가운데 용궁에서 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종으로 유명한 것은 온조지 종, 스미요시진자住吉神社 종, 오사카大阪 가쿠만지鶴滿寺 종 등이다. 그러나 이 종들의 보존 상태로 보아 바닷물에 빠졌던 종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왜구들이 약탈해온 종이 어떤 경로를 통해 사찰에 봉납되었지만, 그것을 미화하기 위한 전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한편 임진왜란 때 옮겨진 종들은 그러한 경로가 밝혀져 있는 것이 많은 편이다. 다이겐지 大願寺에 있는 ‘元土+曉庵’이 새겨진 작은 종은 그 옆에 ‘風臣秀吉 寄進 朝鮮鍾’이라는 팻말이 버젓이 놓여 있다.(도 3) 조구진자常宮神社에 소장된 종은 임진왜란의 주요 장수였던 오타니大谷가 노획품으로 가져와서 이 신사에 봉납한 것으로 전해 온다.
한편 일본에 건너간 뒤에 옮겨진 내력이 여러 번 새겨져 잇는 종도 많다. 고묘지 종에는 일본에 건너간 뒤 3차에 걸쳐 추명이 새겨졌다. 그에 따르면 이 종은 처음에는 1379년 5월 5일에 ‘佛日山 增禪寺’라는 절에 납입되었다가 29년 뒤인 1408년 11월 29일 근처의 ‘福德山 報德寺’로 옮겨졌고, 다시 84년 뒤인 1492년 11월 현재의 고묘지로 옮겨졌다. 후쿠오카의 쇼후쿠지聖福寺 종은 1502년에는 ‘平等寺’에 있다가 1534년에는 같은 지역의 ‘本國寺’로 옮겨졌고, 1537년 다시 ‘平等寺’로 옮겨졌다가 1589년에 현재의 쇼후쿠지로 옮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록들은 그나마 이 종들의 연혁을 알려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옮겨질 때마다 종 표면이 파여진 상처이기도 하다.
일본의 중요 문화재로 아낌받는 종들
일본에 있는 한국 종은, 망실되거나 파편이 된 종, 아주 작은 종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수가 일본의 국보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탁본한 총 21기 가운데 일본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종도 12기나 된다. 그것은 종의 연혁이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종 형태가 아름답고 종에 새겨진 무늬들도 일본 종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 있는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것은 시마네현에 있는 운주지 종이다. 높이 70cm 크기의 이 종은 생김새나 문양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상원사 종과 무늬나 형식이 유사한 점이 많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종에는 유래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전혀 없어 오직 무늬를 가지고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운주지의 주지는 이 종이 적어도 8세기 후반대의 것이 아니겠느냐며 확인해 주기를 조심스럽게 요청하기도 했다. 기년이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종은 조구진자上宮神社 종으로 신라 하대인 흥덕왕 8년, 곧 833년으로 확인되는 태화太和 7년 명문을 지니고 있다. 또한 명문에는 이 종이 청주菁州 연지사蓮池寺에서 주성한 종이라는 내용도 들어 있어서, 이 종은 ‘연지사 종’으로도 부른다. 이 종은 일본에 있는 한국종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것인데, 평소에는 거의 공개하지 않음은 물론 사진 촬영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처럼 중요한 종들이기에 일본의 사찰이나 신사에서는 팜플렛이나 안내문의 첫머리에 이 종들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보물고에 모셔놓고 일반에는 공개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큐슈九州 시모노세키시下關市의 스미요시진자住吉神社 종은 일본에 있는 고려시대 종 가운데 가장 커서 높이가 142cm나 된다. 또한 두 뺨을 붉히는 듯하며 나르는 아름다운 비천이 조각되어 있다. 그러나 탁본을 허락하지 않았고, 여러 차례 간청하여 겨우 사진만을 촬영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같은 큐슈의 오이타현大分縣 우사시宇佐市에 있는 우사진구宇佐神宮 종은 우사진구 보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전시장 입구의 정면 중앙 단독 유리장 안에 모셔져 있다.(도 4) 시마네현의 고묘지 종은 9세기경에 주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종이다. 이 종은 몇해 전까지만 해도 종각에 걸어놓고 쳤었으나 종신에 균열이 생긴 것이 발견되어서, 지금은 떼어서 보물고를 따로 지어 모셔놓고 있다. 대신 종각에는 한국의 성종사聖鐘社에서 똑같이 제작한 복제종이 걸려 타종되고 있다. 보물고와 종루는 서로 마주 보고 있으니 원형종과 복제종도 서로 마주보고 있는 셈이다.(도 5, 도 6)
일본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종 가운데에서는 그래서 탁본을 거절한 경우도 있었다. 탁본은 그 과정에서 습기를 더하고 종을 두드려 쳐야 하는 일이 반드시 따르게 되어 있는데, 그러한 공정이 혹여 종을 손상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일정 가운데 나라 국립문화재연구소 방문은 그 때문에 탁본하지 못하게 된 종들의 고탁古拓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라 국립문화재연구소에는, 본래 일본 범종 연구자로서 1930년대부터 우리나라 범종을 조사, 연구한 쯔보이 료헤이坪井良平 선생의 탁본이 기증되어 있다. 그 아들인 쯔보이 기요타리坪井淸足 씨가 나라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그 인연으로 돌아가신 부친의 탁본을 기증한 것이었다. 이번 전시에는 그 가운데 중요한 7점을 빌려와 부족한 점을 보완하였다.
탁본을 허락한 사찰이나 박물관 가운데에서도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종이니만큼 탁본에는 매우 신경을 썼다. 본래 온조지園城寺 종으로 현재 아름다운 호숫가에 있는 박물관인 비와코문화관琵琶湖文化館에 기탁보관되어 있는 종은 처음에는 탁본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겨우 허가를 받은 것으로, 탁본을 하는 하루 종일 학예원이 꼼짝 않고 옆에 지켜서 있어서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탁본을 해서 그 문양이 선명히 드러나는 것을 보고는 다들 감탄을 금하지 않았다.
이처럼 아껴지는 만큼 보존상태는 대부분 매우 훌륭했다. 만다라지 종은 틀에서 갓 떼어낸 듯이 조각이 선명해서 자칫하면 손이 베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날이 서 있었다. 후쿠오카 박물관에서 보존하고 있는 시카우미진자知賀海神社 종은 표면에 붙었던 금박이 아직도 잘 남아 있는 부분이 있었다.
일본 사찰의 종루에 걸린 종들
현재 일본에 있는 우리나라 범종은 도쿄 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한 3점과 몇몇 개인소장가들의 소장품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일본의 사찰과 신사에서 지니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아직도 종루에서 타종되고 있는 종들도 있어서 우리나라 범종이 일본에서도 그 법음을 널리 전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이다이지 간노인 종은, 간노인의 입구인 문루 2층에 걸려 있다. 종을 걸어놓은 문루라고 해서 이 문과 누각을 통틀어 ‘鐘門樓’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누각에는 올라갈 수 있는 시설이 전혀 없었는데, 그것은 이 종이 멀리에서 연결된 끈을 잡아당기면 당목을 움직여 칠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종은 아직도 아침저녁으로 쓰이고 있었는데, 간노인의 스님들은 시간이 되면 창문을 통해 멀리에 있는 종을 바라보며 실내에 있는 줄을 당겨서 종을 치고 있었다.(도 10)
종각에 걸려 타종되고 있는 또다른 예는 1011년에 조성된 시마네현의 덴린지天倫寺 종과 12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효고현兵庫縣의 가쿠린지鶴林寺 종이다. 그 가운데 한 곳인 덴린지는 마츠에시松江市 외곽의 조용한 마을에 있는 절이다. 종은 이 절의 산문 입구,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종각에 걸려 날마다 새벽 5시에 청아한 소리로 울려퍼지고 있었다.
가쿠린지 종은 바깥에서는 전혀 종이 보이지 않는, 지붕 처마선이 과장되게 올라간 전형적인 일본식 종루에 걸려 있었다. 가쿠린지 본당 바로 옆에 있는 이 종루는 무로마치室町(1392-1573) 시대의 건축으로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도 11) 이 종은 종소리가 황동조黃銅調 곧 아주 맑은 음색이 나는 것으로 일본에서도 유명하여 가쿠린지는 그래서 이 종을 더욱 자랑스럽게 여기며 한 해의 마지막인 12월 31일과 절의 중요한 행사 때에만 타종하며 아끼고 있었다. 연륜과 음색 때문에 가쿠린지 종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 종루는 아래에서 매우 좁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밖에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거의 올라가지 않는다.
우리나라 종들이 사람 키 가까이 달려 옆에서 바로 치게 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일본의 종들은 사이다이지 간노인 종이나 가쿠린지 종처럼 크기에 관계없이 높이 매달려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개 아래에서 줄을 잡아당겨서 당목을 움직여 치게 되어 있다. 종루는 아니지만 건물 천정 높이에 매달려 있는 슛세키지 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護摩堂’이라는 건물 정면에 종이 달려 있어 이 전각을 참배하러 오는 사람들은 문 앞에 서서 먼저 줄을 잡아당겨 종을 한 번 친 다음 머리를 조아려 기도를 하는 것으로 간단한 예식을 하는데, 이 종은 그렇게 쓰이고 있었다.(도 12) 그래서 일본의 종들은 당좌가 없거나 또는 있더라도 아래쪽 하단 가까이에 있는 것이 많았는데 우리나라의 종조차 처음에 만들어진 의도나 예불방식과는 달리 일본식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 있는 한국종들이 몇 백 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타종되고 있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일본 종루에 걸려 있는 모습은 어쩐지 외국 땅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동포 2세들을 보는 듯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국 종들을 기억하기
그동안 이 종들은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져 있다는 이유로 거의 기억되지 못했다. 물론 종 연구자들 가운데에는 쯔보이 료헤이 씨처럼 종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실측조사하고 사진과 탁본으로 남겨서 지금은 망실된 종이라도 우리에게 기록을 전한 이도 있다. 우리나라에도 황수용, 염영하 선생처럼 일찍이 우리나라 종을 조사하고 기록을 집대성한 분들도 있으며 최근에도 관심의 끈을 늦추지 않고 연구를 지속하는 분들도 있다. 또 일본에는 재일동포로 본업은 의사이면서도 일본에 있는 한국종들을 찾아다니며 기록하여 책을 펴낸 강건영 씨같은 분도 있다. 이번 조사와 탁본은 이 분들의 연구에 힘입은 바 크다.*
하지만 우리나라 종이 일본에 그토록 많이 있다는 점, 그리고 일본의 국보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아직도 타종되고 있는지는 일반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이 종을 답사하거나 찾아가는 예는 거의 드물다. 비록 지난 역사의 과정에서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종들이지만 이 종들은 엄연히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종들이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이 종들을 기억하는 것은 다만 몇몇 연구자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있음으로 해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번 전시가 우리나라 범종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음미하는 기회가 되며, 일본에 있는 한국 종들도 그 가운데 정당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쯔보이 료헤이의 저서 가운데 한국종에 관한 책으로는 『朝鮮鐘』(角川書店, 1974)이 있다. 영염하 선생은 공학박사로서 범종의 주조과 소리에 관한 연구를 많이 하였으며 우리나라 종을 집대성한 『韓國의 梵鐘』(서울대학교 출판부)을 냈다. 황수영 선생은 미술사 분야에서 종을 연구한 분이다. 이 분들의 글은 대부분 함께 편집한 학술지 『梵鐘』에 주로 실려 있다. 강건영姜健榮 선생은 일본에서 현지답사를 통해 일본의 한국종 답사기인 『梵鐘 をずねて』(アジアユ スサンタ, 1999)를 펴냈고, 이어 조선시대 범종과 함께불화에 관한 『李朝の美 梵鐘と佛畵』(明石書店, 2001)를 펴냈다. 최근에는 일본 미즈기인水城院 종이 우리나라의 국립 문화재연구소에 기증된 것을 계기로 그 종을 실측, 조사하고 보존처리하는 과정과 일본에 있는 우리나라 범종에 관한 글이 실린 『다카하라 히미코 기증 고려범종』(국립문화재연구소, 2000)이 발간되었다
원본 : http://www.jikjimuseum.org 직지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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