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종소리 33천(天)을 울리고, 종 만들기 43년 무형문화재 원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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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06년 12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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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서는 우리 전통 범종을 복원하고 서울 보신각 종 등 우리나라 사찰의 종 대부분을 만든 중요무형문화재 112호 주철장 원광식(64, 元光植)을 그의 작업장인 충북 진천 성종사(聖鐘寺)에서 만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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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무형문화재 112호 주철장 원광식(성종사 대표)은 43년간 범종 제작에 몰두한 이 시대의 진정한 장인 중 한 사람이다. 1942년 경기 화성에서 출생하여 종을 만들던 할아버지 원덕중(1950년 작고), 8촌 형 원국진(1972년 작고)에게 종 제작 기술을 전수받은 삼대에 걸친 장인 집안 출신이다. 일찍이 중학교를 마치고 자동차 정비 일을 배우기도 했지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17살에 종 만들기를 배우고 1963년 21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종 만드는 장인의 길에 들어섰다. 8촌 형 원국진씨가 운영하던 ‘성종사’라는 종 만드는 작업장에서 젊음을 불태우며 오직 종 만드는 일에만 매달렸다. 아버지만큼 나이가 많은 8촌 형님인 원국진씨 밑에서 종 제작기술을 배웠다. 아들이 없어 대를 이어 달라고 했다. 연장 하나라도 제자리에 없으면 주먹이 날아오는 등 혹독하게 일을 배워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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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그 당시 시대상으로 오직 먹고살기 위해 종 제작 기술을 배웠고, 종을 만들었으며 사명감 같은 것은 애초 없었다. 1961년 5.16이 터지고 사찰과 교회마다 종 수요가 늘어서 정신없이 일했다고 한다. 그러나 1969년 1월 결혼하고 석 달 뒤 종을 만들다가 쇳물이 폭발하면서 한 쪽 눈을 잃었다. 27세의 청년 원광식은 모든 것이 허무한 가운데 성종사를 떠나 농사를 짓는 등 1년을 방황하다가 시련을 극복하고 그의 본업인 종 만드는 작업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때가 1970년이었다. 1970년 28세 때 충남 예산 수덕사가 광복 후 국내 최대 규모의 범종을 제작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것이 원씨가 범종 제작에 평생을 걸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원씨는 머리를 깎고 수덕사 대웅전 옆에 작업장을 만들었다. 종을 만드는데 꼬박 3년이 걸렸다. ‘종소리가 삼십리 간다’는 수덕사의 종을 완성했다. 1973년 스승인 8촌형 원국진이 사망하면서 하산해 31세 때 성종사를 인수했다. 성종사의 주인이 되고부터 다시 심기일전하여 종 만들기에 매진했다. 원씨의 종 만드는 기술이 세상에 차츰 알려지면서 종 제작의뢰가 줄을 이었고 현재 국내 사찰에 있는 범종 대부분이 그가 만든 것이다. 우리 종의 비밀, 밀랍주조 기법을 밝혀내다 그동안 오대산 상원사 범종, 광주 민주의 종, 충북 천년대종, 경북 도민의 종, 조계사 종, 싱가포르 복해선원 종 등 40여 년 동안 7천여 개의 종을 만들었다. 국내 최고 범종 제작자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항상 1천여 년 前 신라 장인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한번은 일본의 사찰을 방문했을 때, 일제가 빼앗아 간 ‘신라 종’들을 보물처럼 받드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일본에서도 인정하는 1천여 년 전 신라 장인들을 잊고 지낸 자신이 초라하였다. 그때 일본에 있는 신라 종들을 실리콘으로 복제해 왔다. 그리고 1,300여 년 전 성종대왕 신종(일명 에밀레종)소리를 들어보니 자신의 재주가 너무 초라함을 느꼈다. 신라, 고려의 종을 복원하기로 목표를 세우고 80년대 후반부터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에 봉착했다. 신라시대 종을 제작할 때 사용되던 ‘밀랍주조 기법’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을 뿐 조선 중기 이후 맥이 끊겨 국내 어디에서도 문헌과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중국에 관련 기록이 있지 않을까 하여 중국으로 갔다. 당시 중국과 미수교 상태여서 홍콩에서 비자를 받아 상하이, 베이징, 항저우 등의 사찰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역시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결국, 스스로 만들어 보는 방법밖에 없었다. 원씨는 종을 만들다 깨기를 수 없이 반복했다. 밀랍과 기름을 배합해 만든 초로 종 모형과 문형을 제작하고 외부를 흙으로 둘러싸 열을 가해 초를 녹인 뒤 이 흙 거푸집에 쇳물을 붓는 1천 년 전 종 제작의 비밀을 하나씩 밝혀냈다. 도가니 속의 열을 고르게 유지하고 불순물의 유입을 막는 방법과 고른 합금을 만들어 내는 비법도 찾았다. 그러나 흙 거푸집이 1,000여 도의 쇳물을 견디지 못하고 깨져 버렸다. 거푸집이 쇳물 온도를 견디면서 내부의 공기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숨을 쉬는 흙을 찾아야 했는데 온갖 흙을 구해서 만들어 봤으나 실패하였다. 흙의 성분을 찾아내려고 노심초사 하던 중 숭실대 박물관에서 우연히 동경(銅鏡)을 만든 흙 틀을 보고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라 수도인 경주 일대를 샅샅이 뒤져 이 흙 틀과 같은 성분인 활석과 이암(泥岩)을 찾아내 드디어 성공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랄까 7~8년간 전통 종 제작기법인 ‘밀랍주조 기법’ 재현에 매달린 끝에 1992년 일본 광덕사에 있는 일제가 빼앗아간 신라 종을 복원하였다. 중요 무형문화재 주철장이 되다 우리의 전통적인 범종 제작 방식인 밀랍주조 기법 재현에 성공하고 신라 장인들처럼 종 만들기 작업에 몰두해 신라의 상원사 종, 선림원종, 청주 운천동 출토 범종과 고려의 내소사종 등 20여 개 종을 재현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3월 13일 원씨의 나이 59세 때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주철장으로 지정되었다. 주철장은 ‘일정한 틀에 쇳물을 부어 여러 기물을 만드는 장인’에 대한 통칭이다. 그리고 밀랍주조 기법은 막주물 기법보다 2배 이상의 시간과 노력이 든다고 한다. 봄ㆍ가을에만 작업이 가능하다. 이 기법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섬세한 문양을 새겨 넣을 수 있고 특히 소리의 신비함은 막주물 기법이 따라올 수 없다고 한다. 충북 진천군 덕산면 합목리에 성종사(聖鐘寺)가 있다. 6천여 평의 부지 위에 50여 톤이 넘는 종을 제작할 수 있는 최신 용해설비와 주조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2001년에 시작해서 2005년 9월 충북 진천군에 종 박물관이 태어났다. 충북도와 진천군 그리고 문화재청이 돈을 내고 원씨가 그동안 복원한 종 170개를 기증해 박물관을 만들었다. 또한, 지난 1976년에는 서울대 염영아, 이장무, 황수영 교수 등과 ‘한국범종연구회’를 만들어 해마다 학술지를 펴내는 등 범종 연구와 기록 보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복원이 평생소원 종 만들기 43년 중 애착이 가는 종 중의 하나가 99년 청주 예술의 전당 앞에 세워진 천년각(千年閣)에 걸린 ‘천년대종’이란다. 청아한 울림소리가 마치 에밀레종에 버금간다고 한다. 지난해 4월 대형 산불로 녹아내린 보물 479호 동종을 지난 10.16일 완성했을 때 수많은 사람이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원씨는 아직 만족할 때가 아닌 듯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일본으로 건너간 신라 종 등 우리나라 옛 종 60여 개와 모든 종의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을 제대로 복원하는 것이 평생소원이자 자신의 목표라고 한다. 이제 종 만들다가 죽는 일만 남았다면서 다시 각오를 다지고 있다. 그가 만든 종이 지금도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서는 물론 일본ㆍ대만ㆍ싱가포르 등 외국에서도 울리고 있다. 그 맑은 종소리가 시방세계에 고루 퍼져 지옥의 중생들까지 제도하고 나아가 인간들의 각종 번뇌도 깨끗이 씻어 버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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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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