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조선의 종

서울 덕수궁 소재 흥천사명 동종 (興天寺銘 銅鍾) (보물 제1460호)

korman 2008. 7. 12. 16:31

보완 : 2023년 1월 13일

 

흥천사명 범종 (興天寺銘 梵鐘)

문화재명 : 흥천사명 범종 (興天寺銘 梵鐘)

지정사항 : 보물

소재지 : 서울특별시(特別市) 중구(中區) 정동(貞洞) 덕수궁(德壽宮)

분류 :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의식법구

시대 : 조선 범종(朝鮮 梵鍾)

년대 : 1462年(세조(世祖) 7年, 천순(天順) 6年)

 

요약정보

현재 덕수궁(德壽宮) 안 보호각(保護閣)에 걸려 전시되고 있으나 원래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것을 금세기에 현재 위치로 옮겼으며, 범종의 주조(鑄造)는 제7대 세조(世祖) 7年(1462) 7 월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를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유폐(幽閉)되었던 신덕왕후의 왕실 무덤 가까이에 있던 흥천사에 있었던 종이다. 중종(中宗) 5년에 흥천사가 화재로 없어지자 제21대 영조(英祖) 23년(1747) 경복궁의 정문 인 광화문(光化門)에 옮기게 되었다. 일제 침략 후 광화문을 헐고 다른 곳으로 옮길 때 이 범종은 창경궁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의 덕수궁(德壽宮)으로 옮겨진 것이다. 형태(形態)는 조선(朝鮮) 전기(前期)에 유행한 거대한 종(鍾)이며 종신(鍾身)과 용뉴를 구 비하고 있는데, 용뉴는 일체쌍두(一體雙頭)을 구비한 용뉴이고 용두(龍頭)는 서로 반대방향 으로 향하면서 땅을 보고 있는 듯하다. 특히 용두(龍頭)와 몸체는 박진감있게 사실적으로 조 각되어 있으면서 서로 몸을 말아 올리는 듯한 정상(頂上)에 큼직한 여의주(如意珠)를 받들고 있다. 종신(鍾身)의 상부(上部)에는 용뉴뿐이고 용통(甬筒)은 없으며, 종견상(鍾肩上)에는 연화문 대(蓮華紋帶)를 돌려 장식하였고 상대(上帶)는 견대(肩帶)와 약간 떨어진 밑쪽에 융기된 태 조(太彫) 일선횡대(一線橫帶)를 돌려 표현하였다. 유곽(乳廓)은 상대(上帶)와 약간 떨어진 밑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4개소(個所)에 배치하였 는데 형태는 사다리꼴이다. 유곽(乳廓)의 주위는 내외구획(內外區劃)을 정하고 세선(細線)으 로 처리하였고 그 안에 평행쌍선(平行雙線)으로 된 당초문(唐草紋)을 양각(陽刻)하였다. 유 곽(乳廓)내에는 연화원좌(蓮華圓座)의 중심에 돌기된 9유(乳)를 구비하고 있다. 유곽(乳廓)과 유곽(乳廓) 사이에는 원형두광(圓形頭光)과 보관(寶冠)?천의(天衣) 등을 양 각(陽刻)으로 조식한 보살입상(菩薩立像) 4구(軀)가 배치되었는데 현재는 마손(磨損)이 심해 1구(軀)만이 뚜렷하다. 종신(鍾身) 중앙에는 융기된 태조(太彫) 일선(一線)을 가운데 두고 상 하로 일조(一條)의 세선대(細線帶)를 돌려 삼조선대(三條線帶)를 이룩하며 중대(中帶)를 이 루고 있다. 종신하부(鍾身下部)에는 별다른 조식이 없으며 하단에는 위쪽으로 38cm 떨어진 곳에 간격 12.5cm를 둔 태조(太彫) 이선대(二線帶)를 둘렀고 그 안에 평행(平行) 파상문(波 狀紋)과 굵어진 권운문(卷雲紋)이 일정하게 양각(陽刻)되어 있다. 하대(下帶)와 중앙(中央)의 삼조선대(三條線帶)와의 사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장문(長文)의 해서체(楷書體) 명문(銘 文)이 양각(陽刻)되어 있어 범종이 만들어진 연대와 경위 등을 알 수 있다. 천순육년명(天順六年銘) 임오(壬午)는 세조(世祖) 7年(1462)에 해당되며 명문 내용에서는 감주(監鑄)에 있어서도 도제조(都提調)에 효녕대군(孝寧大君), 임영대군(臨瀛大君), 영응대군 (永膺大君)을 비롯하여 제조(提調)?부제조(副提調)의 직형과 범종 제작에 직접 관련된 낭청 (郞廳), 감역(監役), 주성장(鑄成匠), 노치장(爐治匠), 주장(注匠), 조각장(彫刻匠), 목수(木手), 수철장(水鐵匠), 각자(刻字), 사령(使令) 등 여러 관계자를 기록하고 있는 조선 전기의 전형 적인 범종이다.

 

실측정보

총고(總高); 275cm, 용통고(甬筒高); cm, 상대폭(上帶幅); cm, 유곽장(乳廓長); 44 ×51cm, 구경(口徑); 170cm, 종신고(鍾身高); 222cm, 용통경(甬筒徑); 11.5cm, 하대 폭(下帶幅); cm, 종구후(鍾口厚); 31cm, 용뉴고(龍?高); 53cm, 천판경(天板徑); 96cm, 유곽폭(乳廓幅); cm, 당좌경(撞座徑); 츠

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2023년 1월 13일 현재

https://portal.nrich.go.kr/kor/buddhistView.do?menuIdx=805&idx=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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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30> 흥천사종

 

조선시대 왕실발원 범종 서막을 열다

 

신덕왕후 명복 빌기 위해 조성

흥천사 소실 후 광화문으로 이운

현재 덕수궁 광명각 안에 보관

각 분야 장인들이 직접 참여한

왕실발원 기준작이자 모본 평가

서울 덕수궁에 소장된 흥천사 종은 높이 282cm로 1462년에 조성

    됐다.

 

조선 건국 이후 15세기에는 왕실발원 범종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러한 이유는 당시 한양을 중심으로 왕실 발원의 중창이나 개창과 같은 불사(佛事)가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흥천사, 원각사와 같은 비보사찰(裨補寺刹) 내지 능묘의 원찰(願刹)이 많이 세워지는 시기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즉 처음부터 왕실 발원 범종은 왕실 일가의 명복과 안녕을 빌거나 축수의 개념에서 당시의 최고의 전문가 집단을 고용하여 제작하였다는 특성을 지닌다. 아울러 조선전기의 범종이 크기 면에서 이후에 만들어지는 종들과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대형화된 것은 바로 조선 왕조의 개국에 따라 규범이 정해지고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기념비적 작품이 필요케 된 것도 한 원인이 될 수 있겠다.

 

이번호에 소개할 흥천사종 역시 그러한 시기적 경향을 잘 보여주는 왕실 발원 범종 가운데 가장 이른 작품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종의 조성 목적은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진 종이다. 1510년 흥천사가 소실된 이후 1747년에 경복궁 광화문에 옮겨졌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광화문에서 창덕궁으로 이전됐다. 이후 다시 거처를 덕수궁으로 옮기게 되어 현재는 광명각 안에 자격루와 함께 보관 전시돼 있다. 총고는 282cm, 구경 171.2cm, 두께 296cm로 종신의 4면에는 보살입상 4구가 부조되었고 명문에는 천순(天順) 6년(1462) 제작된 것이라 기록되어 조선 왕실 발원 범종 가운데 가장 먼저 제작된 종이다.

 

종신은 종구 쪽으로 갈수록 점차 넓어지면서 전체적으로 부풀어진 듯 보이며 종구의 끝단은 수평을 이루었다. 쌍룡의 용뉴, 반구형의 천판, 종신보다 한 층 더 높게 융기된 넓은 구연부 등이 전체적으로는 중국에서도 북방 양식인 하엽종(荷葉鐘)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종구는 그와 달리 직선화된 우리 종의 양식을 고수하였다. 특히 둥그스름한 천판 위에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등을 맞대고 꿇어 앉아 있는 용뉴의 형상이나 천판의 아래쪽으로 연판문대가 돌려져 있고 연판대와 종신 부분에 굵은 횡대(橫帶)를 둘러 구획을 이룬 모습은 중국의 원(元)이나 명대(明代)종 양식과 유사한 점이 나타난다.

 쌍룡의 용뉴.

 

종의 몸체에는 중앙에 굵은 3조의 횡대를 중심으로 크게 상단과 하단으로 나뉘는데, 상단의 종신에는 한국 종의 전형 양식인 방형의 연곽(蓮廓)과 그 내부에 화문 받침을 지닌 얕게 돌기된 연뢰(蓮)를 9개씩을 배치하고 그 연곽과 연곽 사이의 사방으로 합장한 형태의 보살입상을 새겼다. 하단의 종신에는 다시 굵은 횡대로 구획하여 위쪽에는 양각의 명문을, 아래쪽에는 파도문을 새겨놓았다. 이처럼 굵은 횡대로 종신을 가로질러 분할하는 방식은 고려 후기의 연복사종(演福寺鐘, 1346)에서 볼 수 있는 중국 종 양식의 대표적인 특징이지만 흥천사 종의 모습은 1447년에 제작된 베이징(北京) 소재의 법해사종(法海寺鐘)과 같은 명나라 종과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종신의 연곽과 연곽 사이의 네 방향에 배치된 보살입상은 늘씬한 신체에 원형 두광을 갖추고 합장한 모습이다. 보살상의 양 어깨에 걸쳐진 천의가 팔을 거쳐 발아래까지 유려하게 흘러내렸고 머리에 쓴 보관에는 화려한 영락까지 세밀히 표현되었다. 이러한 보살입상의 모습은 이후 제작되는 조선 범종의 하나의 전형 양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방형의 연곽 안에는 연화좌 위로 돌기된 연뢰가 표현되어 고려 말에 유입된 중국 종 양식과 또 다른 한국 전통형 종의 잔영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종구에서 위쪽으로 올라온 부분에는 하대(下帶)처럼 묘사된 파도문대가 있는데, 이곳에는 오른쪽으로 일정하게 반원을 그리는 파도무늬를 유려하게 묘사하였다. 이 횡대와 문양대 사이의 넓은 공간을 택해 한계희(韓繼犧)가 짓고 글씨는 정란종(鄭蘭宗)이 쓴 긴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세조가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1462년에 흥천사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사리분신(舍利分身)이라는 상서로운 일(瑞祥)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종을 만들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즉 ‘세조 6년(1461년) 5월13일 회암사(檜巖寺)에서 석가여래의 금사리(金舍利)가 분신(分身)하였는데, 효녕대군(孝寧大君)이 25매를 얻어 세조에게 올리자 이 사리가 내전(內殿)과 함원전(含元殿)에서 계속 분신하여 모두 102개가 되었다. 이에 세조가 이 일을 크게 기뻐하여 죄수를 사면하고 능엄경을 번역하였으며 여래상 두 구와 관음· 지장보살상을 만들어 안치하였고 사리는 흥천사의 사리각에 모셨다. 세조는 이 사리분신을 기념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서 다음해인 세조 7년(1462년) 종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사리 분신의 의미를 강조하여 명문에 기록한 것은 서상(瑞祥)을 계기로 왕실이 길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으나 결국 세조의 왕위 찬탈을 합리화시기 위한 방편으로 불교의 신이와 영험을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흥천사는 원래 태조 이성계의 후비였던 신덕왕후의 정릉(貞陵) 부근에 세워졌던 원찰로서 1397년에 완성된 것으로 전해지며 이후 화재로 인해 원래의 흥천사가 소실되어 이후 1794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종신의 4면에는 보살입상 4구가 부조됐다.

 

또한 흥천사종의 명문에서는 범종을 제작한 주조 장인과 분업상황이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그에 의하면 종 제작을 감독하였던 인물은 정육품 김덕생(金德生)이며 정길산(鄭吉山), 이장수(李張守), 이산(李山), 안성노(安盛老), 방내은사(方內隱山), 백산보(白山寶) 등은 주성장(鑄成匠)으로 기록된 점에서 실질적인 종 제작을 담당하였던 인물로 보인다. 그리고 금속을 녹이고 붓는 노야장(爐冶匠) 김몽총(金蒙寵), 녹인 금속을 주종 틀에 붓는 작업을 당당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주장(注匠) 이만(李萬), 장오마지(張吾₩}知), 홍복흔(洪福熏), 박효(朴孝), 구지금(仇知金) 등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특히 조각(彫刻)의 양춘봉(梁春奉), 장금동(張今同), 덕중(德中), 장오마지(梁吾₩}知)와 목수(木手) 지상(智尙), 김우길(金尤吉), 진동(秦同) 등의 장인들은 복잡한 조형을 필요로 하는 용뉴와 문양판 제작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금속의 물품을 조달하거나 제작하였던 수철장(水鐵匠) 이득방(李得方), 박천길(朴千吉), 박 (朴), 양생(梁生), 차영수(車永守)와 각자(刻字) 김귀생(金貴生)은 명문을 쓰거나 새기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흥천사 종의 명문을 통해 당시 종 제작을 총괄한 이가 정6품 사약(正六品 司)의 관직을 지닌 관료였음이 파악되지만 조각을 담당했던 봉승대부(奉承大夫) 양춘봉(梁春奉)을 제외하고 나머지 주조 장인의 직급은 밝히고 있지 않아 아직 그 신분상의 대우가 높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명문 제작을 담당하였던 김귀생(金貴生)의 경우 관직이 정육품 전악(典樂)에 해당되는 점은 각자장(刻字匠)이 장악원(掌樂院) 소속이었거나 평시 업무가 장악원과 관련되었음을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범종의 종신에 장식되는 보살상이나 상·하대 문양의 도안을 담당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최경(崔涇)은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도화서(圖畵署) 최고 관직에 오른 인물로서 이를 통해 왕실 범종 제작에는 도화서에서 선발된 최고의 수준을 가진 화원(畵員)이 직접 참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조선 전기 왕실 발원 범종이 지닌 독특한 예술적 가치를 말해주며 이후 조선 후기종의 보살상의 도식화된 모습과 차별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처럼 흥천사 종은 제작에 관련된 세세한 분업 상황이 각 직급별, 내용별로 기록된 점에서 조선시대 범종의 제작과 관련된 주조 기술사 연구에 더없이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조선 전기 범종에서 가장 먼저 제작되어 이후 제작된 왕실 발원 범종의 기준작이자 모본이 된 작품이란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된다.

 

[불교신문3389호/2018년5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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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66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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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4일 현재

 

 

 

 

 

종 목 보물  제1460호
명 칭 흥천사명 동종 (興天寺銘 銅鍾)
분 류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의식법구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2006.01.17
소 재 지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덕수궁 (정동,덕수궁)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덕수궁

 

흥천사종은 고려말부터 수용된 중국종적인 요소 가운데 한국 전통 종에서 보였던 형식과 요소가 가미되어 새로운 조선전기의 종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범종이다. 이후 만들어지는 조선전기 범종의 하나의 기준이 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흥천사종은 다른 조선전기 범종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크기나 문양·주조기술의 탁월함 외에도 왕실에서 발원(發願)한 종이어서 각 분야의 관장(官匠)들이 대거 참여해 만들어졌으며 명문(銘文)은 주성시(鑄成時)의 조직체계를 알려 주고 있다는 점 등에서 당시의 사회제반사항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출처 : 문화재청 2014년 2월 5일 현재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146000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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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12일 현재

 

보물 1460호 흥천사 (興天寺) 범종높이 2.8m, 둘레 1.7m, 조선 초기에 제작된 몇 안되는 사찰종의 하나.고려시대의 범종이 조선초기로 변화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범종이다.덕수궁 서쪽, 지금의 정동에 있었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능에 1396녀(태조4년) 세원진 원찰 흥천사에 있던 종.  후일 태종은 개인적인 원한으로 정능과 흥천사를 지금의 정를동으로 추방한다.1462년(세조 7년) 세조는 선덕왕후의 명복을 빌고자 이 종을 주조하여 흥천사에 하사하였다.이 후 흥천사가 소실되자 1511년 (중종4년) 동대문 문루에 걸어 놓았다가 광화문 문루로 옮겨지고 1910년 이후 창덕궁에 보관하였다가 1939년 덕수궁 석조전의 전시품으로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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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27일 발췌

 

天順 6年 壬午(1462), 청동, 전체높이 282.0cm,. 종높이 191.6cm, 입지름 171.2cm, 주종장 정길산, 서울 중구 덕수궁
흥천사종은 조선 전기에 왕실 후원으로 제작된 거종巨鐘 중 가장 앞선 것으로, 1462년에 세조가 태조의 후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었다. 1510년에 흥천사가 소실된 후 이 종은 1747년에 경복궁 광화문에 옮겨졌으며, 일제시대에는 광화문에서 창덕궁으로, 다시 창덕궁에서 덕수궁으로 이전되었고 현재 덕수궁 광명각 안에 놓여 있다. 여러 차례 이동으로 표면은 거칠어졌지만 다행히 문양만은 비교적 선명한 편이다.
외형은 쌍룡의 용뉴에 천판이 둥글게 솟은 중국종 형태를 하고 있다. 용뉴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반대편에서 얼굴과 앞발을 천판에 대고 몸통을 들어 고리를 만들고 중앙에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모습이다. 천판에는 울림효과를 주기 위해서인지 음통 대신 관통공貫通孔을 뚫려있다. 종신에는 중국종에서 볼 수 있

는 융기된 횡대가 있고 이를 경계로 문양들이 상하대로 나누어 있다. 기교를 배제한 견대의 커다란 연판무늬는 강건해 보이고, 굵은 횡대 밑에 있는 4좌의 연곽은 유려한 당초무늬로 장식하였다. 연곽 안에는 활짝 핀 연꽃받침 위로 9개의 연꽃봉오리가 솟아 있다. 합장을 한 보살상은 양쪽 어깨와 팔을 걸쳐 발밑까지 유려하게 흘러내리는 천의를 입고 연화좌를 밟고 서 있다. 머리에 쓴 화려한 보관과 몸에 걸친 영락장식은 기품을 갖춘 보살상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 종복鍾腹을 가로지른 3줄의 굵은 횡대 밑으로 명문이 빼곡히 적혀 있고 종구鐘口에서 50-60cm 정도 올라간 부분에 파도무늬의 하대를 둘러 장식하였다. 오른쪽으로 일정하게 반원을 그리는 파도무늬는 두개의 소용돌이에 10개의 잔물결을 도드라지게 처리하였다.
종의 명문은 한계희韓繼禧가 짓고 글씨는 정난종鄭蘭宗이 썼는데, 내용 중에는 종 제작 연유와 함께 제작에 참여한 이들의 직책과 이름이 있어 조선 전기 관장官匠의 체제를 파악할 수 있다. 감역監役 김덕생金德生, 주성장鑄成長 정길산鄭吉山, 야장冶匠 김몽룡金蒙龍 등을 포함한 여러 장인들은 이후 제작된 보신각 종(1468년), 봉선사 종(1469년), 낙산사 종(1469년) 등의 명문에서도 발견된다.

 

 

# 흥천사 종(興天寺鍾)

높이:2.82 직경:1.70 두께:3
이 종은 1462년 7월 이태조(李太組)의 후비 신덕황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이 종은 덕수궁(德壽宮) 근처에 유폐된 신덕황후의 왕실무덤 근처 흥천사에 있었으나 흥천사가 중종 5년(1510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영조 23년(1747년)에 경복궁(景福宮) 정문인 광화문으로 옮겼다. 한일합방 후 일인들이 이 종을 창경궁으로 옮겼다가 후에 덕수궁 현 위치에 다시 옮겼다

 

# 흥천사

(興天寺)

신흥사라고도 불리는 흥천사는 정릉(貞陵), 신덕왕후 강씨의 명복을 비는 원찰(願刹)이다.

흥천사는 태조 6년(1397) 신덕왕후 강씨의 능침사찰로 오늘날 중구 정동에 창건되었던 170여 간의 대사찰로 조계종의 본산(本山)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1396년에 정릉을 조영하고 나서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흥천사를 건립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이듬해인 정월부터 정릉 동쪽에 절터를 닦고 김사행(金師幸)이 건축 책임을 맡아 그해 8월에 170여간이나 되는 대가람을 완공하였다. 태조는 흥천사 건립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몇 차례나 공사 현장에 들러 일꾼들을 격려하고, 재물과 식량을 지급하는 등의 관심을 기울였다. 이어서 태조7년에 태조는 절 북쪽에 사리전(舍利殿)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 전각은 안에 석가여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안치한 4-5층의 건물로 태조가 조성에 특별한 정성을 기울였다. 공사 기간 중에 왕자의 난이 일어났지만 드디어 정종 원년(1398) 10월에 완성 되었다. 개성에 머물고 있던 태조는 사리전 완공 소식을 듣고 바로 한성에 달려왔다. 그리하여 사리전의 낙성을 기념하는 수륙재(水陸齋)를 열어 선왕(先王)과 조상들의 명복을 빌었다.

태종 9년(1409)에 정릉을 현재 자리인 북한산 기슭으로 옮겼지만 흥천사는 계속해서 도성 안의 주요 사원으로 지위를 누렸다. 태종은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시행하여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제한하고, 전국의 242개 절만 남겼으며 사찰 재산을 몰수하였다. 그러나 흥천사를 잘 보호하라는 태조의 유언을 좇아 흥천사는 그대로 법등을 밝혀 나갔다.

그 후 세종도 이 절의 사리전을 중수하게 하고 관아 건물처럼 정기적으로 중수하도록 하였다. 세종 31년(1449)에 가뭄이 계속되자 이 절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며칠 후에 비가 내리자 세종은 승려 140명에게 상을 내렸으니 이 절의 규모가 얼마나 큰 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유학 장려로 왕실의 지원이 줄어들면서 흥천사는 쇠락하기 시작 하였다. 연산군 10년(1504)에 화재로 전각이 거의 타 버리고 사리전 만이 화재를 피하였지만 복구는 되지 않았다. 폐허로 방치되었던 흥천사는 중종 5년(1510) 3월에 중학(中學)의 유생들이 이단(異端)을 쓸어버린다고 부르짖으며 밤을 이용하여 불을 질렀으므로 보물, 불경과 통도사에서 전해오는 우리나라 유일의 석가여래의 사리를 안치한 사리전 마저 불에 타버려 완전히 폐사(廢寺)되었다.

세조 7년(1461)에 제작한 흥천사 대종(大鐘)은 동대문을 거쳐 종루(鐘樓)에 걸려 시각을 알려 주었다가 일제 때 덕수궁에 옮겨져 현재까지 걸려 있다. 흥천사가 역사에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선조9년(1576)에 정릉이 복원되면서 부터 였다.

태종 9년에 정릉을 북한산 아래로 옮겼을 때 능 가까이에 신흥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 그러나 신흥암은 정릉과 너무 가깝다 하여 현종 10년(1669)에 석문(石門)밖 합취정(合翠亭) 터로 이건하고 신흥사(新興寺)라고 개칭 하였다.

그 후 정조 18년 (1794)에 승려 성민(聖敏),경신(敬信) 등의 뜻에 따라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고, 고종 2년(1865)에는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각도에서시주를 받아 절을 중창하였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흥천사라는 이름으로 복원 하도록 하고, 흥천사(興天寺)라는 휘호를 내렸으므로 지금도 만세루에 그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절은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였던 영친왕이 다섯 살 때 쓴 글이 이 절에 남아 있고, 조선왕조의 최후의 왕비 윤비가 6.25전쟁 때 피난 갔다가 돌아와 이곳에서 매우 어렵게 살았다. 하루 양식 한홉으로 두 끼 밖에 먹지 못했는데, 그 한 홉에서 매일 한 줌씩을 아꼈다가 향과 초를 사들고 흥천사에 올랐다. 흥천사 내에는 이 절의 중심 건물인 아미타여래를 모신 극락보전이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되어 있고, 그 오른편에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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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종명

(興天寺鍾銘)

글씨

난종(1433~1489)선생의 자는 국형,호는 허백당, 본관은 동래이다.

일찌기 과거에 급제한 이후 세조 13년(1467) 황해도 관찰사로서 재직하던 중,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고, 성종 1년(1470년)에 동지중추부사로 사은사의 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듬해 순성좌리공신 4등에 올라 동래군(東萊君)에 봉해졌다. 관작은 평안도 병마절도사, 우잠찬,이조,공조,호조의 판서등을 역임했고 시호는 익혜(翼惠)이다. 성리학에 밝고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어 성임(成任)과 함께 세조,성종대 최고의 서예가로 일컬어 졌다. 초서,예서를 잘쓰고 특히 조맹부체에 뛰어났다.

서울 탑골공원의 [원각사비음(圓覺寺碑陰)], 경기도 양주의 [고령부원군신숙주묘표(高靈府院君申叔舟墓表)], [윤자운신도비(尹子雲神道碑)],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종명(洛山寺鐘銘)]과 고성의 [유점사종명(楡岾寺鐘銘)], 서울 덕수궁의 [흥천사종명(興天寺鍾銘)]등의 그의 글씨이다.

 

출처 : 궁궐길라잡이

 

2007년 3월 27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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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25일 발췌

 

흥천사동종(興天寺銅鍾) 
  한국미술전집 / 동화출판공사 / 1974.
설명

▶조선시대. 높이 2.82m, 입지름 1.7m, 서울 덕수궁소재.

조선 초기의 대표적 銅鐘의 하나이다. 드물게 보는 巨鐘이며 조선시대 銅鐘 형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鐘身 중앙에는 3條의 굵은 隆起構線을 쳐서 상하로 구분하고 下區 중앙에는 다시 隆起雙線을 돌리고 그 사이에 파도무늬가 양각되어 조선시대 종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上區에는 唐草文이 양각된 乳廓 안에 蓮座 가운데 돌기된 9乳가 있는 유곽 4區가 있어 古式을 따랐으나 肩帶에서 떨어져 변화를 보이고 있다. 유곽 사이에는 圓光을 갖추고 蓮花座 위에 옆을 보고 서 있는 보륭상 1軀씩이 陽鑄되었다.
어깨에는 역시 隆起雙線을 치고 그 위에 單瓣蓮花가 양각되었으며 정상의 용뉴는 제법 사실적이다.

표면 무늬가 섬약하여 박력을 잃었으나 매우 희귀한 大作이다. 鐘身에는 長文의 銘이 있는데 주성년대에 관하여는 「天順六年壬年十月日」로 되어 조선 세조 8년(1462)의 鑄成임을 알 수 있다.
 

출처 : http://www.sejon.or.kr/main/main_art.htm  2006년 10월 25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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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興天寺) 천순육년명(天順六年銘) 범종(梵鐘)(2-56, 3-43)

 

소재지(所在地) : 서울특별시(特別市) 중구(中區) 정동(貞洞) 덕수궁(德壽宮)

연 대(年 代) : 1462年(세조(世祖) 7年, 천순(天順) 6年)

지정번호(指定番號) : 

실측치(實測値) : 총고(總高); 275cm, 용통고(甬筒高); cm, 상대폭(上帶幅); cm, 유곽장(乳廓長); 44 

×51cm, 구경(口徑); 170cm, 종신고(鍾身高); 222cm, 용통경(甬筒徑); 11.5cm, 하대 

폭(下帶幅); cm, 종구후(鍾口厚); 31cm, 용뉴고(龍鈕高); 53cm, 천판경(天板徑); 

96cm, 유곽폭(乳廓幅); cm, 당좌경(撞座徑); cm 

 

현재 덕수궁(德壽宮) 안 보호각(保護閣)에 걸려 전시되고 있으나 원래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것을 금세기에 현재 위치로 옮겼으며, 범종의 주조(鑄造)는 제7대 세조(世祖) 7年(1462) 7월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를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유폐(幽閉)되었던 신덕왕후의 왕실 무덤 가까이에 있던 흥천사에 있었던 종이다.

 

중종(中宗) 5년에 흥천사가 화재로 없어지자 제21대 영조(英祖) 23년(1747)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에 옮기게 되었다. 일제 침략 후 광화문을 헐고 다른 곳으로 옮길 때 이 범종은 창경궁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의 덕수궁(德壽宮)으로 옮겨진 것이다.

 

형태(形態)는 조선(朝鮮) 전기(前期)에 유행한 거대한 종(鍾)이며 종신(鍾身)과 용뉴를 구비하고 있는데, 용뉴는 일체쌍두(一體雙頭)을 구비한 용뉴이고 용두(龍頭)는 서로 반대방향으로 향하면서 땅을 보고 있는 듯하다. 특히 용두(龍頭)와 몸체는 박진감있게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으면서 서로 몸을 말아 올리는 듯한 정상(頂上)에 큼직한 여의주(如意珠)를 받들고 있다.

 

종신(鍾身)의 상부(上部)에는 용뉴뿐이고 용통(甬筒)은 없으며, 종견상(鍾肩上)에는 연화문대(蓮華紋帶)를 돌려 장식하였고 상대(上帶)는 견대(肩帶)와 약간 떨어진 밑쪽에 융기된 태조(太彫) 일선횡대(一線橫帶)를 돌려 표현하였다. 유곽(乳廓)은 상대(上帶)와 약간 떨어진 밑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4개소(個所)에 배치하였는데 형태는 사다리꼴이다. 유곽(乳廓)의 주위는 내외구획(內外區劃)을 정하고 세선(細線)으로 처리하였고 그 안에 평행쌍선(平行雙線)으로 된 당초문(唐草紋)을 양각(陽刻)하였다. 유곽(乳廓)내에는 연화원좌(蓮華圓座)의 중심에 돌기된 9유(乳)를 구비하고 있다.

 

유곽(乳廓)과 유곽(乳廓) 사이에는 원형두광(圓形頭光)과 보관(寶冠)․천의(天衣) 등을 양각(陽刻)으로 조식한 보살입상(菩薩立像) 4구(軀)가 배치되었는데 현재는 마손(磨損)이 심해 1구(軀)만이 뚜렷하다. 종신(鍾身) 중앙에는 융기된 태조(太彫) 일선(一線)을 가운데 두고 상하로 일조(一條)의 세선대(細線帶)를 돌려 삼조선대(三條線帶)를 이룩하며 중대(中帶)를 이루고 있다. 종신하부(鍾身下部)에는 별다른 조식이 없으며 하단에는 위쪽으로 38cm 떨어진 곳에 간격 12.5cm를 둔 태조(太彫) 이선대(二線帶)를 둘렀고 그 안에 평행(平行) 파상문(波狀紋)과 굵어진 권운문(卷雲紋)이 일정하게 양각(陽刻)되어 있다. 하대(下帶)와 중앙(中央)의 삼조선대(三條線帶)와의 사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장문(長文)의 해서체(楷書體) 명문(銘文)이 양각(陽刻)되어 있어 범종이 만들어진 연대와 경위 등을 알 수 있다. 

 

천순육년명(天順六年銘) 임오(壬午)는 세조(世祖) 7年(1462)에 해당되며 명문 내용에서는 감주(監鑄)에 있어서도 도제조(都提調)에 효녕대군(孝寧大君), 임영대군(臨瀛大君), 영응대군(永膺大君)을 비롯하여 제조(提調)․부제조(副提調)의 직형과 범종 제작에 직접 관련된 낭청(郞廳), 감역(監役), 주성장(鑄成匠), 노치장(爐治匠), 주장(注匠), 조각장(彫刻匠), 목수(木手), 

수철장(水鐵匠), 각자(刻字), 사령(使令) 등 여러 관계자를 기록하고 있는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범종이다.


출처 :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간 한국의 범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