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조선의 종

가평 현등사 소장 봉선사동종 (加平 懸燈寺銅鍾 ) (보물 제 1793호))

korman 2009. 3. 13. 20:38

[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36> 현등사 소장 봉선사종, 고견사 소장 종, 보광사종

 

17세기 천보스님 ‘범종 장인’의 시작을 알리다

 

전란(戰亂)의 격동기를 거친 17세기 전반에 들어오면 사찰마다 전쟁에 소실된 종을 만드는 작업이 활발해지면서 승려 장인의 작품이 많이 만들어졌다. 16세기 후반까지 승려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범종은 주로 전통형을 따르고자 노력한 반면에 17세기에 들어와 뛰어나 기량을 보인 천보(天寶)스님은 쌍룡의 용뉴와 범자문, 화려한 운룡문과 같은 중국종 계열을 따르고 있음이 독특하다. 그는 17세기 전반부터 중엽에 걸쳐 활약한 승려 장인으로서 현등사 소장의 봉선사종(奉先寺鐘), 고견사 소장의 견암사종(見岩寺鐘), 보광사종(普光寺鐘) 등 현재까지 그에 의해 제작된 3점의 범종이 확인되며 근래에 들어 그 진가를 평가받아 두 점이 보물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 가평 현등사 소장 봉선사종

    17세기 각 사찰에서는 승려 장인들의 범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가평 현등사 소장 봉선사종.

 

조선 후기의 범종의 시작이자 17세기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승려 장인의 범종이 바로 가평 현등사(懸燈寺)에 소장된 만력(萬曆) 47년명 범종(1619)이다. 본래 봉선사종(奉先寺鐘)으로 제작된 것이었지만 한국전쟁 때 현등사로 이전되었다고 전해진다. ‘봉선사종명병서(奉先寺鍾銘幷序)’로 시작되는 종신의 명문에 의하면 ‘세조를 위해 정희왕후(貞熹王后)와 예종(睿宗)이 세운 봉선사가 임진왜란 때 훼손되자 1613년에 법당을 중수하고 1617년에는 삼세상(三世像)을 조성하였으나 종이 없어 1618년에는 권선문을 돌려 시주를 받아 1619년에 주성했다는 내용과 시주 내역, 시주자 이름’이 종신에 가득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천보(天寶) 스님은 종 제작을 총괄한 제작자이면서 명문을 쓴 화주(化主)로 기록되었는데(化主天寶謹作 書刻), 종 형태와 문양, 종에 쓴 명문 등의 유사성을 통해 이후에 만들어진 고견사종(1630)과 보광사종(1634)을 주성한 설봉 천보(雪峰天寶)와 동일인임을 알 수 있다.

 

이후 천보스님이 제작한 종의 명문을 분석해 보면 1630년에 만들어진 고견사종에는 ‘도대장미지산설봉사문천보(圖大匠彌智山雪峯沙門天)’라는 명칭으로 치죽, 득남, 득일(緇竹, 得男, 得一) 스님의 조역을 받아 제작하였고 다시 보광사종(1634)에는 ‘주성도대장설봉자(鑄成圖大匠雪峯子)’ 라는 설봉자란 호와 대장의 직함을 함께 사용하였다.

 

검은 색조를 띤 현등사종의 전체적인 외형은 한국 전통종 보다 중국종 계열을 따르고 있는 전형적인 작품이다. 불룩이 원구형으로 솟아오른 천판 위로는 음통 없이 두 마리의 쌍용으로 구성된 용뉴와 그 바깥의 주위에는 사각으로 된 복판의 연화문을 상대(上帶)처럼 둥그렇게 시문하였다. 종 몸체 중단에 둘러진 3줄의 융기선 횡대를 중심으로 위 아래로 나누어 윗 단에는 위로부터 연판문대와 사다리꼴로 이루어진 연곽대, 그리고 그 옆으로는 범자문과 대좌 위에 앉은 불좌상(佛坐像)을 번갈아 가며 시문한 모습이다. 특히 불좌상 옆으로 위패형의 범자문대를 두고 그 옆에 ‘육자광명진언(六字光明眞言)’과 ‘파지옥진언(破地獄眞言)’이란 문구를 도드라지게 새기 것은 이후 조선후기 범자 다라니의 선행 양식으로 자리 잡는다. 종신의 중단 아래로는 3줄의 융기선을 둘러 3구로 구획하였는데 바로 아래에는 연당초문대를 둘렀다. 그리고 그 아래로 종신 전면을 돌아가며 긴 내용의 양각명이 새겨져 있다. 이 명문구 아래로 다시 1줄의 융기선을 돌리고 종구에서 조금 떨어진 상부 쪽으로 파도문과 구름 속에서 꿈틀거리는 격동적인 모습의 용무늬를 번갈아가며 빽빽이 시문하였다. 이처럼 종신 전체를 빠짐없이 장식하는 것은 중국종의 특징이지만 연판문과 중대의 보상화당초문, 하대의 파도문 등은 조선 전기의 해인사종(1491)의 문양을 계승하거나 약간 변형시킨 모습이다. 1469년에 만들어진 봉선사 대종과 달리 법당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종은 천보스님이 만든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기준작으로 의미가 깊으며 이후 11년이 지난 고견사종에 이르면 천보스님의 작품성이 더욱 두르러져 승장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정립해 나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불교신문3415호/2018년8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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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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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 현등사 소장 봉선사동종 (加平 懸燈寺銅鍾 ) (보물 제 1793호))



















가평 현등사 소장 봉선사종
• 코드: cp0501b06501 


• 명칭 : 가평현등사소장봉선사종 


• 지정 : 시도유형문화재 168호(경기) 보물 제 1793호


• 조성연대 : 조선 광해군 11년(1619) 


• 제원 : 전체높이 77㎝, 종신 62.4㎝, 입지름 59㎝ 


• 소재지 : 가평 현등사 


• 관리자 : 가평 현등사 


• 설명 


한국종과 중국종 형식이 혼합된 이 종은 본래 봉선사 종으로 제작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현등사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현재 법당 안에서 예불을 올릴 때 사용되고 있다. 재질은 청동이며 주종장은 천보이다. 


쌍룡이 몸통을 틀어 고리를 만든 용뉴에 천판은 둥글게 솟고 종신은 하대로 갈수록 완만하게 벌어져 있다. 몸통에는 중국종에서 볼 수 있는 띠 장식이 둘러져 있으며, 몸통의 문양은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보살상과 당좌는 없고 굵은 횡대를 중심으로 상대, 연곽, 중대, 명문, 하대로 이어진다. 상대를 두른 연판무늬, 연곽대의 당초무늬, 중대의 보상화당초무늬, 하대의 파도무늬 등 조선 전기 해인사종의 문양을 연상시키면서 중대와 하대 위에 당초무늬와 앙련모양의 연판무늬를 덧붙여 변형하였다. 하대의 파도무늬는 넘실대는 물결 속에 잔잔히 부서지는 파도로 표현되었다. 


종신에는 '奉先寺鐘銘幷序'를 시작으로 세조를 위해 정희왕후와 예종이 세운 봉선사가 임진왜란 때 훼손되자 1613년에 법당을 중수하고 1617년에는 삼세상(三世像)을 조성하였으나 종이 없어 1618년에 권선문을 돌려 시주를 받아 1619년에 주성했다는 내용과 시주 내역, 그리고 시주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명문을 쓴 천보 스님은 종 제작에 힘쓴 화주이다. 연곽내 연뢰는 5~6개씩 소실되었지만 전체적으로 안정되고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다. 


<자료참조 : 문화재청, 직지성보박물관, 사찰 홈페이지>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7년 12월 6일 현재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7&cp_code=cp0501&index_id=cp05010075&content_id=cp050100750001&search_left_menu=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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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발춰 2014년 1월 18일 현재


가평 현등사 동종 (加平 懸燈寺 銅鍾)
(보물 제 1793호)











종 목 보물  제1793호
명 칭 가평 현등사 동종 (加平 懸燈寺 銅鍾)
분 류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의식법구
수량/면적 1구
지정(등록)일 2012.12.27
소 재 지 경기 가평군  하면 운악청계로 589번길 73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현등사
관리자(관리단체) 현등사

가평 현등사 동종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동종은 원래 현등사의 본사인 남양주 봉선사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인데, 일제강점기에 현재의 현등사로 옮겨온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종은 73.5cm의 아담한 크기로, 종신(鍾身)을 여러 개의 구획선으로 나누고 그 안에 연잎무늬, 당초무늬, 파도무늬 등을 화려하게 새겨 넣어 장식성을 강조한 범종이다. 두 마리 용이 서로 등을 맞대어 몸을 꼬아 만든 용뉴는 안정감을 주고, 두발을 힘차게 내딛어 천판을 들어 올리는 모습에서 역동감을 느낄 수 있다. 둥근 곡면을 이루는 천판에서부터 종의 입으로 내려오면서 조금씩 그 폭을 넓힌 종의 형태도 아름답다.

이 종은 고려 후기 연복사종에서 비롯된 중국종 양식을 따르고 있다. 특히 종의 중심부를 세 개의 융기선으로 구획하고 천판에서 종의 입 사이에 다양한 무늬를 시문하였는데, 작은 마름모꼴의 연곽에 구슬 모양의 연꽃봉우리라든가, 천판의 내림연꽃이 중앙을 향해 보상화문처럼 말려든 형태와 그 위로 표현된 구슬무늬, 종복(鍾腹)에 크게 자리잡은 역동적인 연화당초무늬, 그리고 하대에 표현된 물거품이 일렁이는 파도무늬 등의 장엄적인 요소는 1469년 작 남양주 봉선사 동종(보물 제397호)이나 흥천사명 동종(보물 제1460호), 그리고 1491년 작 합천 해인사 동종(보물 제1253호) 등 조선전기의 왕실발원 범종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원래 이 종을 소장했던 봉선사 또한 왕실의 원찰이었기 때문에, 이전에 만들어진 궁중양식 범종의 여러 가지 요소가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

종의 배 부분에는 반듯한 해서체로 주종기를 돋을새김하였다. 주종기는 1619년(광해군 11)에 천보(天寶)가 짓고 새기기까지 했으며, 종을 만들게 된 연유, 종 제작에 사용된 재료의 양과 무게, 발원하는 내용, 참여한 사람 등을 질서 있게 적었다. 주종장은 일반적으로 주종기를 작성한 천보로 보고 있는데, 그는 조선후기 승려 주종장(鑄鍾匠) 가운데 유일하게 임진왜란 이전부터 활동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어,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승장의 계보나 범종의 양식 흐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인물이다.

이 종은 1619년에 조선 전기 궁중양식 범종의 전통을 계승하여 제작된 범종이며, 주조상태도 양호하고 역동적이고 생동감이 있는 무늬들을 조화롭게 배열하여 범종에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이 종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조선후기 범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사이트 2014년 1월 18일 현재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179300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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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 첫 국가보물된 현등사 동종
조선 후기 중最古작품 사적가치·예술성 탁월
 
  2012년 12월 31일 (월) 엄건섭 기자  gsuim@kihoilbo.co.kr  
 
산소탱크 지역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첫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 탄생했다.

문화재청과 가평군은 현등사(懸燈寺) 동종(銅鐘)이 보물 제1793호로 지정됐다고 30일 밝혔다.

군에 따르면 보물 1793호에 이름을 올린 현등사 동종은 73.5㎝의 아담한 크기로 종신(鐘身)을 여러 가지 구획선으로 나누고 그 안에 연잎무늬, 당초(唐草)무늬, 파도무늬 등을 화려하게 새겨 넣어 장식을 강조한 범종이다.

이 종은 조선후기에 가장 처음으로 만들어진 종으로 전기의 종과 비교되는 좋은 자료로 학문적 가치는 물론 장식 기법과 예술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이 종은 설봉 천보스님이 제작한 거창 고견사종(1632년 보물 제1700호), 파주 보광사종(1634년)보다 이른 시기인 1619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담겨 있고 우리가 살아온 역사를 보여 주는 귀중한 유산을 소장한 현등사는 경기 금강산이라 불리는 운악산에 자리한 1천600년 된 고찰이다. 1210년(고려 희종)에 보조국사 지눌이 전국을 순회하다가 마일리(하면)에서 하룻밤을 머물 때 산 속에서 광채가 빛나 올라가 보니 폐허의 절터에 석등 빛이 환해 절을 중건하고 현등사라 지었다. 이후 1411년(조선 태종) 때 함허대사가 중건해 꾸준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현등사에는 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보조국사 지눌이 현등사를 재건할 때 운악산의 센 기운을 눌러 땅을 진정시켰다고 전해지는 3층 지진탑, 현등사를 중수한 기록이 새겨진 사리구가 발견된 삼층석탑과 조선후기 소조와 나무로 만든 불상과는 달리 청동으로 제작된 청동지장보살상 등 조선후기 불교문화를 고이 간직한 문화유산의 보고(寶庫)다.

군 관계자는 “현등사 동종의 국가문화재 지정은 가평문화와 역사, 사료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라며 “선조들의 정성과 지혜가 담긴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기호일보 2012년 12월 31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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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발췌 2009년 3월 13일 현재 

가평 현등사소장 봉선사종 加平 懸燈寺所藏 奉先寺鐘

시도유형문화재 제168호 (가평군) (보물 제 1793호로 승격)
萬曆 47年 己未, 광해군 11년(1619)
총 높이 77.0cm, 종신 높이 62.4cm,
용뉴 높이 146cm,
종입 지름 59.0cm, 종입 두께 6.6cm
주종장 ; 천보,
경기 가평군 하면 하판리 현등사

현등사에 전하는 이 종은 본래 봉선사 종으로 제작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현등사로 이전되었다고 하며, 지금도 법당 안에서 조석으로 예불 올릴 때 타종되고 있다.

종신에는 중대와 하대사이의 넓은 공간에 '奉先寺鐘銘幷序'를 시작으로 세조를 위해 정희왕후와 예종이 세운 봉선사가 임진왜란 때 훼손되자 1613년에 법당을 중수하고 1617년에는 삼세상(三世像)을 조성하였으나 종이 없어 1618년에 권선문을 돌려 시주를 받아 1619년에 주성했다는 내용과 시주 내역, 그리고 시주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명문을 쓴 천보(天寶) 스님은 종 제작에 힘쓴 화주인데, 종 형태와 문양, 종에 쓴 명문 등의 유사성을 고려하면 고견사종(1630년)과 보광사종(1634년)을 주성한 설봉 천보(雪峰 天寶)와 동일인일 것으로 추정된다.

현등사종은 두 마리의 용이 몸통을 틀어 고리를 만든 용뉴에 천판은 둥글게 솟고 종신은 하대로 갈수록 완만하게 벌어져 있으며, 종신에는 보살상과 당좌는 없고 굵은 횡대를 중심으로 견대, 유곽, 중대, 명문, 하대로 이어진다.

반구형의 천판과, 종신을 가로지르는 여러개의 굵은 선이 있어 한국종과 중국종 형식이 뒤섞인 혼합식 종이다. 
음통은 없고, 용뉴는 쌍용으로 구성되었으며, 용두는 양쪽이 서로 반대방향을 향하고 있다. 용은 몸체를 비틀어 고리삼아 종을 매달고 있다.

복판 연엽으로 된 견대가 있으나 상대는 없고, 그 아래 당초문으로 된 4좌의 유곽이 있다.

중대는 2.3cm의 넓이로 당초문을 장식한 상단, 폭 10.0cm에 보상화당초문의 중단, 3條太線의 하단 등 3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하대 역시 2.8cm의 꽃잎이 새겨진 상단과 폭 6.8cm에 물결무늬가 그려진 하단의 2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종 하단에서 5.6cm위치에 높게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견대를 두른 연판무늬, 유곽대의 당초무늬, 중대의 보상화당초무늬, 하대의 파도무늬 등 조선 전기 해인사종의 문양을 연상시키면서 중대와 하대 위에 당초무늬와 앙련모양의 연판무늬를 덧붙여 변형하였다.
하대의 파도무늬 역시 거칠게 부서지는 파도가 아닌 넘실대는 물결 속에 잔잔히 부서지는 파도로 변화되었다.
 
자료출처 ;
한국의 종 염영하 지음
직지성보박물관
문화재청
www.nohht.com.ne.kr (원본)
2009년 3월 13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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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발췌 2008년 10월 16일 현재




지정번호 : 경기유형문재 제168호  
(보물 제 1793호로 승격) 지정연도 : 1998년 4월 13일
 소장 : 현등사 주지
 소재지 : 경기 가평군 하면 

                하판리 257번지
 시대 : 조선시대
 분류 :

  

1998년 4월 13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68호로 지정되었다. 1619년(광해군 11년)에 봉선사에서 제작한 조선중기의 범종()으로, 현재 현등사 법당 안에서 의식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고 단아한 모습의 장식성이 돋보이는 중종()으로서, 종뉴()는 두 마리의 용이 어우러진 모양이며, 그 아래 포탄형의 종신()이 연결된 형태이다. 종신의 외형선은 종의 윗부분에서부터 아랫부분으로 내려오며 벌어지는 형태이다.
전형적인 한국종의 특징인 음동()이 없고, 종신에 띠장식이 둘러 있어서 다소 중국종 양식이 보인다. 그러나 조각수법이 사실적이고, 풍만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짜임새가 있고, 장식문양에 생동감이 넘치는 우수한 범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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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두산 엔사이버 백과사전 2008년 10월 16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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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군 현등사소장 봉선사종
                                                     
¤ 문화재명 : 가평현등사소장봉선사종
¤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168호

              (보물 제 1793호로 승격)
¤ 지정일 : '98.4.13


¤ 관리인 : 현등사주지
¤ 전화번호 :585-0707
¤ 소재지 : 하면 하판리 산163

 
이 종은 조선조 15대 임금인 광해군 11년(1619)에 제작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종으로서 전체높이가 77㎝, 지름 59㎝이며, 종의 세부이름을 보면 맨 윗부분을 종정 이라하여 용뉴(용모양으로 새기고 고리형으로 만들어 틀에 걸수 있게 한 부분)나 음통을 두고, 그 아랫쪽을 견대·중대·하대로
3분하여 구성하고 있다.
이 종의 종정에는 음통은 없고 용뉴만 있으며, 용뉴는 활기찬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쌍용으로 되어 있어 조선시대 범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현재 가평군 하면 하판리 현등사내에 위치하고 있음.



출처 : 가평군 문화원 2008년 10월 16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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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발췌 2007년 3월 31일 현재 



萬曆 47年 己未(1619), 청동, 전체높이 77.0cm, 종높이 62.4cm, 입지름 59.0cm, 주종장 천보, 경기도 가평 현등사
현등사에 전하는 이 종은 본래 봉선사 종으로 제작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현등사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종신에는 '奉先寺鐘銘幷序'를 시작으로 세조를 위해 정희왕후와 예종이 세운 봉선사가 임진왜란 때 훼손되자 1613년에 법당을 중수하고 1617년에는 삼세상三世像을 조성하였으나 종이 없어 1618년에 권선문을 돌려 시주를 받아 1619년에 주성했다는 내용과 시주 내역, 그리고 시주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명문을 쓴 천보
 스님은 종 제작에 힘쓴 화주인데, 종 형태와 문양, 종에 쓴 명문 등의 유사성을 고려하면 고견사 종(1630년)과 보광사 종(1634년)을 주성한 설봉 천보雪峰天寶와 동일인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종과 중국종 형식이 혼합된 현등사종은 두 마리의 용이 몸통을 틀어 고리를 만든 용뉴에 천판은 둥글게 솟고 종신은 하대로 갈수록 완만하게 벌어져 있으며, 종신에는 보살상과 당좌는 없고 굵은 횡대를 중심으로 상대, 연곽, 중대, 명문, 하대로 이어진다. 상대를 두른 연판무늬, 연곽대의 당초무늬, 중대의 보상화당초무늬, 하대의 파도무늬 등 조선 전기 해인사종의 문양을 연상시키면서 중대와 하대 위에 당초무늬와 앙련모양의 연판무늬를 덧붙여 변형하였다. 하대의 파도무늬 역시 거칠게 부서지는 파도가 아닌 넘실대는 물결 속에 잔잔히 부서지는 파도로 변화되었다.

 2007년 3월 31일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