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조선의 종

안동 광흥사 동종(安東 廣興寺 銅鍾) (보물 제 1645호)

korman 2010. 5. 11. 13:52

[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34> 광흥사종·안정사종

 

왕실 아닌 사찰 중심으로 개인이 범종 조성 발원

 

15세기 후반의 해인사종(海印寺鐘, 1491년)을 마지막으로 16세기 중엽까지 범종의 제작은 갑자기 줄어들어 아직까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기년명(紀年銘) 범종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50~60년의 공백기를 지나는 동안 조선중기의 범종은 두 가지 양상을 띠게 된다. 전대에 많이 만들어졌던 외래형인 중국종을 따른 작품에서 점차 한국종과의 혼합을 이루는 혼합 범종으로 바뀌는가 하면 극히 미미하게 계승되었던 한국 전통형을 따른 범종이 점차 확산된다. 이후 16세기를 지나 전란을 거쳐 17세기에 들어오면 혼합형종과 전통형종이라는 두 가지 커다란 양식으로 정착을 이루게 되어 조선후기 범종으로 자리매김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도기적 경향을 잘 보여주는 16세기의 범종이 바로 광흥사종(廣興寺鐘, 1573년)과 안정사종(安靜寺鐘, 1580년), 그리고 태안사종(泰安寺鐘, 1581년), 갑사동종(甲寺銅鐘, 1584년)이다.

 

임진왜란 직전 만든 16세기 종

전통 범종 전형 고수하고 있어

사회지식층 사대부 주축으로

사장과 승장, 승장 집단 제작

당시 장인사회 파악 중요자료

 

안동 광흥사종

 

안동 광흥사종은 1573년 제작됐다. 총고 60.5cm, 구경 45cm 크기다. 해학적으로 표현된 용두와 음통<아래 사진>을 휘감고 있는 몸체 등은 생동감을 보여준다.

 

이 가운데 광흥사종은 앞 시기 범종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전통형을 따른 작품이란 점에서 17세기 전형적인 전통형종으로 정착을 이루어 나가는 과도기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16세기의 범종은 전대의 왕실 발원 범종과 달리 사찰을 중심으로 개인 구복적인 발원으로 바뀌어가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 변화이다. 따라서 광흥사 범종은 이러한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범종이란 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된다.

 

크기는 비록 60cm정도에 불과한 중형의 종이지만 안정감 있는 외형과 세부 문양은 단순한듯하면서 절제된 모습이다. 주조된 면도 매끄럽고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우선 용뉴는 지금까지의 크고 역동감 넘친 용뉴와 달리 작으면서도 약간은 해학적으로 표현된 용두와 음통을 휘감고 있는 몸체의 세부 디테일이 살아있어 오히려 생동감이 돋보인다. 뒤에 붙은 음통은 가늘고 길며 중앙에 독특한 햇살문을 시문하였다. 음통 상단에는 고려후기에 자주 보였던 작은 보주를 첨가하여 전통형 범종을 따른 점이 뚜렷하다. 이러한 모습은 상대 위에 가지런히 둘러진 입상연판문대(立狀蓮瓣文帶) 장식에서도 느껴지며 그 아래로 뇌문 형태로 장식된 상대가 표현됐다.

해학적으로 표현된 용두와 음통을 휘감고 있는 몸체 등은 생동감      을 보여준다.

 

특히 범종 종신에는 크기가 축소됐지만 안정된 자세와 우아한 의습, 섬세한 보관과 얼굴을 지닌 보살입상이 4면에 새겨져 있다. 이 보살입상은 비록 조선 전기 왕실 발원 범종의 보살입상에 비해서는 회화적 요소가 다소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보살입상의 특징을 잘 소화해낸 것으로 보인다. 상대에서 약간 밑으로 내려와 보살 입상 사이에 배치된 방형의 연곽도 새로운 변화이며 연곽에는 도식화된 당초문과 내부에 돌기된 작은 연뢰를 표현했다. 이 연곽과 보살입상의 공간을 이용하여 연점각(連點刻)으로 기록한 명문에는 ‘만력원년(萬曆元年, 1573) 계유사월 초일(癸酉 四月初日)에 하가산 수암사(下柯山 菴寺)에서 140근(一百四十斤)의 중량을 들여 만든 대종(大鍾)’이라는 내용을 기록하였다.

 

여기서 절의 원 소재지인 수암사(菴寺)의 위치는 아직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이 밖에 일반 사대부로 보이는 여러 인물이 시주자로 기록되었다. 아울러 종의 제작자로 보이는 주장 김자산(鑄匠 金慈山), 화원 원오비구(畵圓 元悟比丘)라는 명문을 통해 이 종이 직업 장인인 사장(私匠)과 승장(僧匠)이 함께 만든 것으로 파악된다. 하부가 약간 벌어진 종구에서 조금 위쪽으로 올라온 곳에 굴곡진 연당초문을 배치한 것도 새로운 모습으로서 이후 태안사 종에서도 다시 계승된다.

 

이 종은 조선 시대 중기 범종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특징과 양식을 잘 구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조선중기 장인사회 연구에 흥미로운 자료가 된다. 이러한 중요성이 인정되어 2010년 보물 1645호로 지정되었다.

 

[불교신문3407호/2018년7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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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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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광흥사 동종(安東 廣興寺 銅鍾) 

(보물 제 1645호)

 

 

 

 

 

 

 

 

 

 

안동 광흥사 동종(安東 廣興寺 銅鍾)은 경상북도 안동시 광흥사에 있던, 16세기 조선의 구리 종이다. 2010년 2월 24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645호로 지정되었다.

16세기 조선 중기 동종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비록 크기가 60cm정도에 불과한 중종(中鍾)이지만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보살입상이 4면에 새겨져 있다.[1]

 

15세기 후반의 해인사종(海印寺鐘, 1491년)을 마지막으로 16세기 중엽까지 범종의 제작은 갑자기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며 이를 반영하듯 아직까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기년명(紀年銘) 범종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50~60년의 공백기를 지나면서 조선중기의 범종은 전대에 많이 만들어 졌던 외래형인 중국종 양식을 따른 작품에서 점차 한국종과의 혼합을 이루는 혼합 범종으로 바뀌어 가며 또한 지극히 미미하게 계승되었던 한국 전통형을 따른 범종이 점차 확산되는 두 가지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과도기적 양상을 보이던 16세기를 지나 임란(壬亂)과 호란(胡亂)을 거치면서 17세기에 들어오면 이제 혼합형 종과 전통형 종이라는 두 가지의 커다란 양식으로 정착을 이루게 되어 조선후기 범종으로 자리매김하게 됨을 알 수 있다.[1]

 

16세기에 만들어진 범종으로는 백련사종(白蓮寺鐘, 1569년), 안정사종(安靜寺鐘, 1580년)과 태안사종(泰安寺鐘, 1581년), 광흥사종(廣興寺鐘, 1583년), 갑사동종(甲寺銅鐘, 1584년)등이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광흥사종은 전통형을 주로 따른 작품으로 17세기 전형적인 전통형종으로 정착을 이루어 나가는 과도기적 경향을 보이는 점이 주목된다. 이러한 경향은 갑사동종이 중국종 양식을 따르면서도 한국종 양식을 가미하여 적절히 혼합을 이루는 데서도 잘 살펴볼 수 있다.[1]

 

따라서 광흥사 동종은 현존 수량이 얼마 되지 않는 16세기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된다. 비록 크기가 60cm정도에 불과한 중종(中鍾)이지만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세부의 문양은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매우 절제된 안정감을 보여준다. 특히 안정된 자세와 우아한 의습, 섬세한 보관과 얼굴을 지닌 보살입상은 4면에 새겨져 이 범종에서 가장 돋보이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 보살입상은 조선 전기 보살상에서 새롭게 변화되어 조선 중기의 불화에서 나타나는 보살입상의 양식적 특징을 공예적으로 잘 소화해 내고 있다.[1]

 

기록된 명문에는 下柯山 賾菴寺에서 一百四十斤의 중량을 들여 제작되었다는 내용을 파악할 수 있으나 절의 원 소재지인 賾菴寺에 위치는 아직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아울러 종의 제작자로 기록된 주장(鑄匠) 김자산(金慈山) 그리고 화원(畵圓) 원오비구(元悟比丘)에서 볼 수 있듯이 사장(私匠)과 승장(僧匠)이 함께 힘을 모아 만들었다는 점도 파악할 수 있어 당시 장인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해 준다.[1]

 

 

따라서 이 범종은 조선 중기 동종의 대표적인 특징과 양식을 잘 구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록 된 명문의 내용을 통해 조선중기 장인사회 연구에 기여하는 바가 큰 점에서 국가 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하여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었다.[1]

 

출처 : 위키피디아 2017년 3월 16일 현재

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B%8F%99_%EA%B4%91%ED%9D%A5%EC%82%AC_%EB%8F%99%EC%A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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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자료 : 2010년 5웛 11일 현재

 

안동 광흥사 동종(安東 廣興寺 銅鍾)

 

 

 

 

 

 

종 목 보물  제1645호
명 칭 안동 광흥사 동종(安東 廣興寺 銅鍾)
분 류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의식법구
수량/면적 1구
지정(등록)일 2010.02.24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서후면 대두서리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광흥사
관리자(관리단체) 광흥사
 
15세기 후반의 해인사종(海印寺鐘, 1491년)을 마지막으로 16세기 중엽까지 범종의 제작은 갑자기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며 이를 반영하듯 아직까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기년명(紀年銘) 범종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50~60년의 공백기를 지나면서 조선중기의 범종은 전대에 많이 만들어졌던 외래형인 중국종 양식을 따른 작품에서 점차 한국종과의 혼합을 이루는 혼합 범종으로 바뀌어 가며 또한 지극히 미미하게 계승되었던 한국 전통형을 따른 범종이 점차 확산되는 두 가지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과도기적 양상을 보이던 16세기를 지나 임란(壬亂)과 호란(胡亂)을 거치면서 17세기에 들어오면 이제 혼합형 종과 전통형 종이라는 두 가지의 커다란 양식으로 정착을 이루게 되어 조선후기 범종으로 자리매김하게 됨을 알 수 있다.

16세기에 만들어진 범종으로는 백련사종(白蓮寺鐘, 1569년), 안정사종(安靜寺鐘, 1580년)과 태안사종(泰安寺鐘,1581년), 광흥사종(廣興寺鐘, 1583년), 갑사동종(甲寺銅鐘, 1584년)등이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광흥사종은 전통형을 주로 따른 작품으로 17세기 전형적인 전통형종으로 정착을 이루어 나가는 과도기적 경향을 보이는 점이 주목된다. 이러한 경향은 갑사동종이 중국종 양식을 따르면서도 한국종 양식을 가미하여 적절히 혼합을 이루는 데서도 잘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광흥사 동종은 현존 수량이 얼마 되지 않는 16세기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된다. 비록 크기가 60cm정도에 불과한 중종(中鍾)이지만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세부의 문양은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매우 절제된 안정감을 보여준다. 특히 안정된 자세와 우아한 의습, 섬세한 보관과 얼굴을 지닌 보살입상은 4면에 새겨져 이 범종에서 가장 돋보이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 보살입상은 조선 전기 보살상에서 새롭게 변화되어 조선 중기의 불화에서 나타나는 보살입상의 양식적 특징을 공예적으로 잘 소화해 내고 있다. 기록된 명문에는 下柯山 菴寺에서 一百四十斤의 중량을 들여 제작되었다는 내용을 파악할 수 있으나 절의 원 소재지인 菴寺에 위치는 아직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아울러 종의 제작자로 기록된 주장(鑄匠) 김자산(金慈山) 그리고 화원(畵圓) 원오비구(元悟比丘)에서 볼 수 있듯이 사장(私匠)과 승장(僧匠)이 함께 힘을 모아 만들었다는 점도 파악할 수 있어 당시 장인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해 준다.

따라서 이 범종은 조선 중기 동종의 대표적인 특징과 양식을 잘 구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록된 명문의 내용을 통해 조선중기 장인사회 연구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KS_01_02_01&VdkVgwKey=12,16450000,37    2010.05.11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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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자료 : 2007.03.27 현재

 

萬曆 元年 癸酉(1573), 청동, 전체높이 60.5cm, 종높이 43.0cm, 입지름 41.0cm, 주종장 김자산 등, 경북 안동 광흥사
광흥사종 역시 단룡單龍과 음통으로 된 용뉴와 평평한 천판에 여의두형 입상대를 갖춘 고려 후기 종을 계승하고 있다. 종의 형태는 종신에 비해 음통이 길고 Ω모양으로 구부린 용의 모습도 옹색해 보이며, 또한 종신에 비해 종폭이 넓다. 연곽은 상대에서 약간 떨어져 있고, 4좌의 연곽 사이로 합장을 한 4구의 보살상이 자리하고 있다. 종구에서 3.7cm 올라간 부분에 연화당초문으로 장식한 하대를 둘렀으며 당좌는 없다. 전체적인 형태와 문양은 단촐하면서 조선시대 특유의 꾸밈없는 소박한 맛이 흐른다. 광흥사 종을 만든이는 金慈山이다.

 

2007.03.27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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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흥사(廣興寺) 만력명십일년명(萬曆十一年銘) 범종(梵鍾)(2-64, 3-49)

 

소재지(所在地) :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군(安東郡) 서후면(西後面) 자품동(者品洞)

연 대(年 代) : 1583年(선조(宣祖) 16年, 만력(萬曆) 11年)

지정번호(指定番號) : 

실측치(實測値) : 총고(總高); 60cm, 용통고(甬筒高); 15.5cm, 상대폭(上帶幅); 1.7cm, 유곽장(乳廓長); 12.7×11.7cm, 구경(口徑); 41cm, 종신고(鍾身高); 45cm,

용통경(甬筒徑); 3cm, 대폭 (下帶幅); 4.7cm 종구후(鍾口厚); 2.7cm, 용뉴고(龍鈕高); 9.5cm, 천판경(天板徑); 30.5cm 유곽폭(乳廓幅); 1.6cm,

당좌경(撞座徑); cm

 

종정(鍾頂)의 용뉴(龍鈕)는 단룡(單龍)에 용통(甬筒)을 갖춘 전형적(典型的)인 형식(形式)이다. 용통(甬筒) 정상(頂上)에는 연주(連珠) 3개가 부착되어 있고 또 용통 몸체는 용(龍)의 몸체로 감고 있다.

문양(紋樣)은 삼단(三段)으로 나누어진 각 단(段)에 연주문(連珠紋)과 방사선 문양으로 장식하여 있는데 모두 약식화(略式化)되었다.

종정(鍾頂)에 접하는 계선상(界線上)에는 폭 2.4cm, 높이 1.8cm의 연판입상대(蓮瓣立狀帶)를 갖추었고, 그 밑으로 약식화(略式化)된 1.7m 폭(幅)의 연판문(蓮瓣紋) 4∼5개(個)를 배열하여 돌려진 상대(上帶)가 있다. 종신(鍾身) 상단쪽으로 원형 두광과 보관을 갖춘 보살입상 4구(軀)와 사다리꼴의 유곽 4개(個)를 교대로 배치하였다. 유곽 문양은 약식화된 당초문으로 장식되어 있고 유두는 연봉 형식의 돌기유 9유를 구비하였다. 하대(下帶)인 구연대(口緣帶)는 종구(鍾口)에서 4cm 떨어진 위쪽에 4.7cm 폭에 연당초문(蓮唐草紋)으로 장식 조식되어있다.

 명문(銘文)에 의하면 만력십일년계미사월초일(萬曆十一年癸未四月初日)로 만력(萬曆) 11年 계미(癸未)는 선조(宣祖) 16年(1583)에 해당하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제작된 범종으로 한국 범종의 규범이라 할 수 있는 용뉴 형식을 그대로 계승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양식이나 형태면에서 특별히 정제된 것은 아니나 고려말 전통 양식을 따르고자 하는 흔적이 보이고 있다.

 

출처 :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간 한국의 범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