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31> 보신각종
우리나라 최대 중량 자랑하는 범종
이 종은 흥천사종보다 6년 뒤늦은 조선시대 1468년에 제작된 범종으로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성덕대왕신종 다음으로 큰 크기이다. 우리에게는 제야의 종 행사 때 새해를 알리는 33번의 타종 행사로 널리 알려진 종이기도 하다. 당시 보신각(普信閣)에는 새해를 기원하는 인파가 구름같이 몰려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성덕대왕신종과 함께 공동 중계를 하며 이 종을 타종하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던 중 결국 보신각종은 깨지게 되어 더 이상 치지 못하게 됨으로써 새로이 만든 종을 보신각에 달아 사용하게 되었고 자연이 성덕대왕신종 역시 종의 보존상 타종을 금지하게 되었다.
천판 정상부에 쌍용 용뉴 표현
뿔 수염 발톱까지 생동감 넘쳐
도성출입 해제시각 알리던 종
사찰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
보살상 일부문양 인위적 삭제
원 상태 훼손시킨 점은 아쉬워
◀ 보물 2호 보신각종은 1468년 조성된 조선시대 종이다.
높이 318cm, 구경 228cm, 무게 19.66톤에 달하며 현재 국립중앙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금세기 들어 국보 상원사종(上院寺鐘)이 균열로 인해 더 이상 치지 못하게 되었고 보신각종 역시 마찬가지의 운명을 맞게 되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장으로 이전되기에 이른다. 아울러 제야의 종 행사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우리에게 없던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들어온 또 다른 일본 문화의 부산물이며 33번을 치는 것은 오히려 불교적 내용과 의식이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제야의 종을 치는 12월31일 자정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의 기온은 영하 10도까지 내려가는 것이 다반사이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1년 동안 치지 않던 성덕대왕 신종을 33번이나 타종하는 것은 종에 엄청난 무리를 줄 수밖에 없음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 최고의 걸작인 성덕대왕 신종이 수많은 이전과 유구한 시간을 견디며 손상 없이 보존된 것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깝다. 마땅히 성덕대왕신종을 타종하면 안 되는 합당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에 소개될 보신각종 역시 원래는 한양(漢陽)의 도성(都城) 출입과 해제 시각을 알릴 때 쓰는 종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원래부터 그러한 용도로 제작된 종이라기보다 사찰의 범종을 가져다 활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흥천사종(興天寺鐘)보다 훨씬 큰 318cm의 높이에 19.6톤이란 무게에서 볼 수 있듯이 성덕대왕 신종의 18.9톤보다 무거운 우리나라 최대의 중량을 지닌 종이다. 둥글게 솟아오른 천판의 정상부에는 쌍용(雙龍)으로 구성된 용뉴가 중앙부에 몸체가 엉켜 있는 모습으로 솟아있으며 머리를 반대로 한 용두가 표현되었다. 이 용두는 높이 솟은 뿔과 뒤로 쫑긋이 뻗은 양 귀, 수염까지 매우 생동감 넘치게 표현되었고 천판을 누르고 있는 두 발의 예리한 발톱은 기존의 4개와 달리 5개로 늘어난 모습이다.
◀ 생동감 넘치게 표현된 용뉴의 모습.
종신(鐘身)의 상중하부의 3곳에 융기선(隆起線) 띠가 둘러져 있는데, 상부는 한 줄, 중간부분에는 3줄을 둘렀고 종구(鐘口) 위쪽에 2줄의 띠가 장식되었다. 이 종구 위쪽 띠와 중간띠 사이로는 ‘성화4년 2월(成化四年 二月)’로 시작하는 긴 내용의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특히 이 종은 조선시대 전기 범종에 거의 빠짐없이 장식되는 연판문대(蓮瓣文帶)와 파도문(波濤文), 연곽(蓮廓)과 연꽃봉우리와 같은 문양이 전혀 표현되지 않아 한눈에 보아도 왕실 발원 종과 다른 이질적인 감이 든다. 그러나 종신 상부 4곳에 희미하게나마 보살입상(菩薩立像)이 양각(陽刻)되었던 흔적과 연곽과 그 내부에 연뢰가 있었던 점을 확인할 수 있어 조성 당시에는 분명히 사찰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종임을 알 수 있다. 남아있는 보살상의 모습을 살펴보면 높이는 약 83cm정도이며 몸을 약간 옆으로 돌린 측면관에 두광(頭光)이 보이며 늘씬한 신체에는 의습과 발 아래로 연화좌를 확인할 수 있다. 보신각에서 박물관에 옮겨진 후 과학적 분석을 시도한 결과 이 보살상은 분명히 인위적으로 삭제시킨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그 시기는 분명치 않다. 아마도 사찰에서 사용하던 범종을 관청에서 재사용하기 위해 사찰 범종의 가장 상징적인 보살상 부분을 일부러 깎아냈던 것으로 짐작된다.
새겨진 명문의 글은 세조 14년(1468) 권근(權近)이 지은 것으로서 주조에 관계된 인명이 계급과 직급별로 나열되어 있는데, 인명 중에는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한 서거정(徐巨正)의 이름도 보인다. 또한 보신각종은 흥천사 종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왕실(王室) 중심의 발원이 아니고 관(官)에 소속된 인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점이 다르다. 감독관에 해당하는 23명의 관료들을 제조, 낭청, 아전 순으로 구분하여 수록하고 제작자인 공장을 85명이나 열거하였는데, 보신각종의 명문에 기록된 장인들은 앞서 만들어진 흥천사종과 달리 구체적인 직급이 없이 공장(工匠)이라는 총칭(總稱)으로 사용한 점이 주목된다. 그러나 흥천사 종에 등장하는 정길산, 양춘봉, 장금음동, 이만, 김몽총(鄭吉山, 梁春奉, 張今音同, 李萬, 金蒙寵)과 같은 장인이 다시 보신각종에도 등장하고 있는 점은 거의 같은 장인 집단에서 이 종을 만들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에 흥천사종 제작을 총괄한 김덕생(金德生)이 정육품 사약(司)에서 종사품(從四品)의 정략장군(定略將軍)으로 승진하고 있음도 확인된다.
한편 보신각종은 조선시대 왕실 발원 종들이 그러하듯이 이전에도 거처를 여러 번 옮겨 다닌 것으로 파악된다. 종이 걸려있던 보신각은 원래 종루(鐘樓)라 하여 태조(太祖) 4년(1395)에 종을 만들어 아침, 저녁으로 시각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다가 선조(宣祖) 25년(1597) 임진왜란 당시에 종각과 종이 모두 불탐에 따라 원각사(圓覺寺)에 있던 종을 새로이 옮겨 걸었고, 그 후 고종(高宗) 32년(1895)에 보신각(普信閣)이라는 이름을 내려 이 종 역시 보신각종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보신각종이 원래 어느 절에서 옮겨온 것인가에 대해서는 종신의 명문 중에 사찰 이름이 기록되지 않아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다만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나 심수경(沈守慶)이 지은 <유한잡록(遺閑雜錄)>에는 이 종이 원래 신덕왕후(神德王后) 정릉(貞陵)곁에 있던 원찰에 걸려 있던 것이라는 내용이 보인다. 그 이후 어느 시기에 원각사(圓覺寺)로 옮겨졌지만 원각사가 폐사됨에 따라 다시 김안로(金安老)의 건의에 의해 흥천사종과 함께 각각 동대문(東大門)과 남대문(南大門)에 걸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선조가 전쟁이 끝나고 한양 환도 후에 다시 이 종을 종각에 걸도록 한 것이라 전해진다. 그러나 <동국문헌비고>에서는 이 종을 흥천사종(興天寺鐘)이라 기록하고 있다. 지난 호에도 소개한 바 있듯이 흥천사종은 현재 서울 덕수궁(德修宮)에 걸려있으며 이 보신각종보다 4년 앞서 1462년에 만들어진 별개의 종이며 크기도 보신각종보다 훨씬 작다. 아마도 동국문헌비고의 편찬자가 종 자체에 종명(鐘銘)이 없고, 흥천사가 신덕왕후의 원찰이었기 때문에 정릉 곁에 있는 사찰이란 점에서 당연히 흥천사 종으로 판단하여 잘못 기록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김안로의 건의에 따라 흥천사종과 함께 동대문과 남대문에 각각 걸려고 했다는 내용은 처음부터 흥천사종과 다른 종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보신각종은 흥천사종보다 불과 6년 뒤에 만들어진 종이지만 그와 다른 문양의 구성을 보이고 있음이 독특하며 흥천사종과 달리 파도문대가 생략된 점 역시 새로운 변화 양상이라 할 수 있다. 흥천사종과 달리 종의 조성과 관련된 연유가 기록되지 않았지만 흥천사종의 주조 장인들과 중복되는 여러 인명으로 보아 세조의 발원과 왕명에 의해 주조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 당초 보살상이 조각돼 있었으나 어느 때인가 인위적으로 훼손됐다.
조선전기의 왕실 발원 범종이 당시 왕실의 왕권 강화와 위엄을 반영하듯 당대 최고의 장인과 주조기술을 동원하여 수준 높은 범종을 제작하였음을 볼 수 있다. 아울러 대부분 그 원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음과 달리 언제인지 몰라도 이 종만이 보살상과 일부의 문양을 인위적으로 삭제시켜 원 상태를 훼손시킨 점이 못내 아쉽게 느껴진다.
보신각종은 현재 종으로서 그 고유의 기능인 소리를 다신 들려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크고 잘 만들어진 종도 끊임없이 사용하다간 언제가 깨질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진리를 교훈으로 남긴 채 오랜 고난과 풍상에서 벗어나 비로소 긴 안식을 취하고 있다.
[불교신문3393호/2018년5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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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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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소장 옛 보신각 동종(舊普信閣 銅鍾)
옛 보신각 동종
이명칭구보신각동종
한자명칭舊普信閣銅鍾
국적/시대한국(韓國)-조선(朝鮮) <1468년>
재질금속(金屬)-동합금제(銅合金製)
용도종교신앙(宗敎信仰)-불교(佛敎)
크기높이 318 입지름 228
지정구분보물(寶物) 2 호
소장품번호신수(新收)-018240-000
옛 보신각 동종은 1468년(세조 14)에 현재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원각사 종으로 처음 만들어졌다. 그 후 절이 없어지게 되자 이 종은 남대문에 옮겨지고 다시 1597년(선조 30)에 현 명동성당 부근인 명례동현에 옮겨졌다. 그 후 1619년(광해군 11)에 서울의 한복판인 관철동의 보신각에 옮겨져 파루(오전 4시)에 33번, 인정(오후 10시)에 28번을 울려 도성의 문을 여닫는 일과 하루의 시각을 알리는 데 쓰였다. 그러나 종의 안전을 위하여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게 되었으며 2005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 개관하면서 야외에 전시중이다. 이 종의 특징은 몸통 한가운데 세 겹의 굵은 띠를 장식한 점인데, 밑면에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두 가닥의 띠를 두르고 있다. 몸체에 주조 연대가 있어 제작 시기가 확실한 임진왜란 이전의 몇 안 되는 범종의 하나로 손꼽힌다.
출처 : 중앙박물관 홈페이지 유물검색페이지 2017년 2월 10일 현재
http://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4325#
* 최초 설치 장소에 대한 중앙박물관의 설명과 문화재관리청의 설명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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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자료 : 2010년 5월 11일 현재
중앙박물관 소장 옛 보신각 동종(舊普信閣 銅鍾)
종 목 | 보물 제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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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옛 보신각 동종(舊普信閣 銅鍾) |
분 류 |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의식법구 |
수량/면적 | 1구 |
지정(등록)일 | 1963.01.21 |
소 재 지 |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
시 대 | 조선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국유 |
관리자(관리단체) | 국립중앙박물관 |
조선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1985년까지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除夜)의 종을 칠 때 사용되었다.
조선 세조 14년(1468) 만들어 신덕왕후정릉 안에 있는 정릉사에 있었으나, 그 절이 없어지면서 원각사로 옮겨졌고 임진왜란 이후 종루에 보관했다. 고종 32년(1895)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면서 보신각종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서 보관 중이다. 총 높이 3.18m, 입 지름 2.28m, 무게 19.66톤의 큰 종이며,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종 형태를 하고 있다. 음통이 없고 2마리 용이 종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부분에서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중간 지점부터 입구 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 있다. 몸통에는 3줄의 굵은 띠를, 종 입구 위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2줄의 띠를 두르고 있고, 종의 연대를 알 수 있는 긴 문장의 글이 있다. 이 종은 2번의 화재를 겪으면서 원형에 손상을 입고, 음향도 다소 변했으나 명문(銘文)이 남아있어 주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
출처 : 문화재청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KS_01_02_01&VdkVgwKey=12,00020000,11 2010년 05월 11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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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보신각종
서울 보신각종
• 코드: cp0501b00901
• 명칭 : 서울보신각종
• 지정 : 보물 제 2호
• 조성연대 : 조선 세조 14년(1468)
• 제원 : 전체높이 318㎝, 종신 133㎝, 입지름 228㎝, 무게 : 19660kg
• 소재지 : 국립중앙박물관
• 관리자 : 국립중앙박물관
• 설명
조선 세조 14년(1468)에 만들어진 종으로, 총 높이 318㎝, 입 지름 228㎝, 무게 19.66톤의 큰 종이며,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종 형태를 하고 있다. 재질은 청동이다. 음통이 없고 쌍룡이 용뉴 역할을 하고 있다. 상대에서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중간 지점부터 하대까지 직선으로 되어 있다. 몸통에는 3줄의 굵은 띠를, 종 입구 위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2줄의 띠를 두르고 있어 하대(下帶)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종은 2번의 화재를 겪으면서 원형에 손상을 입고, 음향도 다소 변했으나 “성화 4년 월 일…”이라는 장문의 명문(銘文)이 새겨 있어 주조년대가 확실한 임진왜란 이전의 범종임을 알 수 있다.
신덕왕후정릉 안에 있던 정릉사에 있었으나, 그 절이 없어지면서 원각사(圓覺寺)로 옮겨졌다가 그 절마저 폐사된 후 숭례문(崇禮門)에 옮겨지고 다시 선조(宣祖) 30년(1597)에 명례동현(明禮洞峴)(현 명동성당 부근)에 옮겨진 뒤, 광해군(光海君) 11년(1619)에 현재의 자리에 옮겨져 파루(罷漏:오전 4시에 33번)와 인정(人定:오후 10시에 28번)에 울려 도성(都城)의 문을 여닫고 하루의 시간을 알리는 데 쓰였다. 고종 32년(1895)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면서 보신각종이라고 불렀다. 1985년까지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除夜)의 종을 칠 때 사용되었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전시 중이다. 몸체에 주조 연대가 있어 제작 시기가 확실한 임진왜란 이전의 몇 안 되는 범종의 하나로 손꼽힌다.
<자료참조 : 문화재청, 직지성보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7년 12월 4일현재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7&cp_code=cp0501&index_id=cp05010022&content_id=cp050100220001&search_left_menu=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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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자료 : 2010년 3월 5일 현재
서울보신각종 서울普信閣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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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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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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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연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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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월 2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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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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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조 13년(1468) | |
▒ | 규모·양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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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높이 3.18m, 입지름 2.28m, 무게 19.66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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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 | ||
▒ | 소 유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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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 | ||
▒ | 소 재 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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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국립중앙박물관 | ||
보신각종은 서울 도성의 문을 여닫고 하루의 시작의 알리는데 사용된 대종(大鐘)이며, 1985년까지 제야의 종으로 울리어 새해를 맞이하게 하였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원래 5개의 대종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현재 세조 8년에 만들어진 흥천사종(興天寺鐘)과 본 유물만이 남아있다. 이런 까닭에 보신각종은 일단 조선시대 전기를 대표하는 대종이라는 학술적 가치를 지니며, 그 무게가 무려 20여 t에 달하여,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에 비견될 수 있는 큰 종이라는 사실 또한 다른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다. 이 유물은 이름은 보신각종이나 현재 종로의 보신각(普信閣)에 걸러 있지 않고 국립중앙박물관 후정에 새로 지은 종각(鐘閣)에 안치되어 있다. 이 종은 원래 조선 세조 14년(1468)에 주조되어 원각사(圓覺寺)에 있다가 연산군 10년(1504) 절이 폐사되자 방치되었다. 중종 31년(1536)에 김안로(金安老)의 주장에 따라 남대문에 옮겨 달려 하였으나 김안로의 죽음으로 걸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되었다. 그후 선조 30년(1597) 명(明)나라 제독(提督) 양호(楊鎬)가 현 명동성당 부근 명례동현(明禮洞峴)으로 옮겼다가, 광해군 11년(1619)년에 지금 종로의 종각에 옮겨져 인정과 파루를 알렸다. 그 후 이 종은 두 차례의 화재를 당하여 원래의 모양이나 음향에 손상을 입게 되자, 근래에는 3ㆍ1절과 광복절, 그리고 제야의 타종용으로만 사용되었고, 급기야 1979년부터는 종에 금이 가자 제야행사에만 타종되다가 결국 1985년에 보존책이 마련되어 제야행사용으로도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보신각종은 음통(音筒)이 없고, 2마리의 용이 종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 부분에서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중간 지점부터 입술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 있다. 몸통에는 3줄의 굵은 띠를, 종 입술 위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2줄의 띠를 두르고 있고, 종의 제작 연대와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명문(銘文)이 있다. 몸통에 보살상 1구(軀)가 확인되는데 원래는 4보살이 교대로 배치되었으나 후대의 화재로 인하여 나머지 3구는 마멸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기본적인 특징들에서 우리 나라 범종의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외래적인 요소가 많이 보인다. 특히 쌍용으로 고리를 만들고 띠장식을 가한 것들은 중국종의 전형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한편, 종의 전체적인 두께에서 입술부분이 두툼한 데에 비하여 몸통부분으로 가면서 점차로 얇아지는 사실에서는 조선종의 고유한 특성이 간직되어 있다. 보신각종에서 보이는 이런 한 ㆍ중양식의 결합은 고려 말 원(元)나라 장인(匠人)들에 의해 만들어진 연복사(演福寺) 종의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우리 나라 조선 전기 대종을 대표하는 형태라 할 수 있다. 양각(陽刻)의 해서(楷書)로 적은 명문의 첫머리에 '成化四年'이란 연호가 있어, 그 제작연대가 세조 14년(1468)임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제조(提調)ㆍ낭청(郎廳)ㆍ아전(衙前)ㆍ공장(工匠)ㆍ사령(使令) 등의 여러 분담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 종이 당시에 국가적인 사업으로 만들어졌던 사실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 전기에 종각에 걸었던 대종이 태조 때에 만들어졌을 때, 백금 50냥을 섞어 만들었고, 제작지인 경기도 광주로부터 서울까지 운반하는 데에 군사 1,300여명이 동원되어 10여일이나 걸린 사실로도 충분히 짐작된다. 종각은 태조 4년(1395)에 창건된 이래 네 차례의 소실과 여덟 차례의 중건이 있었다. 고종 32년(1895)에 '普信閣' 이라는 현판을 처음 걸게 되어, 이때부터 이름이 불리었다. 현재 종로에 있는 종각은 1979년 8월에 동서 5칸, 남북 4칸의 2층 누각으로 세운 것이다. |
2010년 3월 5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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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각종 아니라 ‘원각사 범종’이다 |
최근 경복궁서 용산 새 박물관으로 이관된 보신각종은, 서울 보신각에 걸려있던 때인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는 바람에 그 명칭이 ‘서울보신각종’이다. 그러나 이 종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원래 보신각종을 대신해서 1594년경 보신각터로 옮겨온 ‘원각사 범종’이다. 1468년(세조10년) 정릉사에서 주조된 범종은 현재 종로2가 파고다공원 자리에 있었던 원각사 창건 시절부터 폐사 직전까지 30년간 원각사 범종으로 봉안돼 있었다. 그러다 현재 종로 1가에 있는 보신각종이 화재로 손실되면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원각사 범종을 굴대로 옮겨온 것이다. 보신각으로 옮겨온 범종은 제야의 종 타종 외에도 여러모로 활용됐다. 파루(罷漏 오전4시에 33번)와 인정(人定 오후10시에 28번)에 울려 도성의 문을 여닫고 하루의 시간을 알렸는가 하면 화재시 비상벨 역할도 했다. 또 해방 후에는 3.1절, 광복절 등을 기념하여 종을 울리기도 했다. 원각사 범종이 보신각종으로 바뀐지 385년만인 1979년, 종에 금이 가고 종소리가 탁해져 1년에 한번 제야의 종만 타종이 허용됐다. 그나마 1986년부터는 타종불가 판단이 내려져 아예 경복궁으로 자리를 옮겨 ‘소리 없는 종’ 신세가 돼버렸다. 이 종이 지난 20일 또다시 한지와 소창으로 감싸인채 용산으로 이관되는 날, 이건무 국립박물관장을 비롯한 박물관 실무자들은 범종 앞에 촛불을 켜고 불교식 삼배의식을 올렸다. 이 종의 태생을 잘 알고 있는 한 박물관 연구원이 제안한 것이다. 이름은 보신각종이나, 본래는 ‘원각사 범종’이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정은 기자 jung75@ibulgyo.com [불교신문 2091호/ 12월24일자]
2004-12-22 오전 9:22:42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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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각(普信閣) 성화사년명(成化四年銘) 범종(梵鍾)(2-57)
보신각(普信閣) 성화사년명(成化四年銘) 범종(梵鍾)(2-57)
소재지(所在地) : 서울특별시(特別市) 종로구(鍾路區) 세종로(世宗路) 1
연 대(年 代) : 1468年(세조(世祖) 13年, 성화(成化) 4年)
지정번호(指定番號) : 보물(寶物) 제(第)2호(號)
실측치(實測値) : 총고(總高); 364.7cm, 구경(口徑); 222.8cm, 종신고(鍾身高); 288cm,
종구후(鍾口厚); 32cm, 용뉴고(龍鈕高); 76.2cm,
신라(新羅)의 성덕대왕(聖德大王) 신종(神鍾) 다음으로 큰 대종(大鍾)인데 두 번이나 화재(火災)의 영향을 받아 표면에 많은 손상을 입고 있다. 동종의 전체 형태는 조선(朝鮮) 전기(前期) 동종의 특징을 잘 구비하고 있다. 동종(銅鍾)의 정상(頂上)은 반구형(半球形)으로 둥글게 처리하였으며, 그 중앙에 용린(龍鱗)이 뚜렷한 일체쌍두(一體雙頭)으로 된 용뉴를 구비
하고 있다. 종견(鍾肩) 밑으로는 이조(二條)로 융기(隆起)된 태선대(太線帶)를 돌리고 있고 종구(鍾口)에서 훨씬 위쪽으로 삼조(三條)의 융기된 횡대(橫帶)가 있을 뿐이다. 표면 장식은 물론 당좌(撞座)도 없고 다만 원형 두광(頭光)을 갖춘 보살입상의 윤곽이 보일 뿐이다.
종신(鍾身)에는 성화(成化)四年으로 시작되는 장문(長文)의 명문(銘文)이 있어 이 명문에 따라 세조(世祖) 13年(1468)에 주조(鑄造)되어 돈의문(敦義門)(사대문(四大門))안 정릉사(貞陵寺)에 두었다가 원각사(圓覺寺)를 거쳐 남대문(南大門)에 걸려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중지되었고 임진왜란 후에 종로 네거리의 종각(鍾閣)에 옮겼던 것을 근년에 현 위치로 옮겨 보호․보존하고 있다. 종로 네거리의 종각(鍾閣)인 보신각(普信閣)은 고종(高宗) 32년
(1895)에 현판을 단데서부터 일명 「보신각(普信閣) 종(鍾)」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출처 :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간 한국의 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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