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의실종
늘 강북 쪽에서만 가져왔던 친구들의 정기 모임을 지난달에는 어쩌다 강남역 부근에서 갖게 되었다. 몇 명 안 되는 친구들의 모임이라 어디 특정지역을 정하지 못하고 학생시절부터 알고 있는 길거리 모퉁이에서 다 모여 갈 곳을 정하기로 한 때문에 잠시 길거리 감상을 할 시간을 가졌다. 나만의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구경거리 중에서 돈 안들이고 재미있는 것을 고르라면 그저 생각 없이 길거리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라고 꼽고 싶다. 그래서 파리의 노상 카페에서는 그저 커피 한 잔 시켜 놓고 시커먼 안경 쓰고 다리는 길게 빼고는 팔짱을 끼고 실없이 고개만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지만 아무튼 강남 사거리에서 나도 잠시 지나는 사람들에 취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길거리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뭐니 뭐니 해도 사람들의 옷차림이 그 첫째다. 물론 뭐 특별히 눈에 뜨이지 않는 평범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러나 요즘 길거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젊은 여성들 중 일부의 그것은 그리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강남역 사거리에서 바라본 그녀들의 옷차림은 평범함을 뛰어 넘어 대범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몸을 가린 것을 걷어 내었다. 인위적으로 만든 색으로 몸을 감싸기 보다는 지금은 초등학교 크레파스에서도 없어진 살색을 좋아하는 까닭일까. 날씨가 무더워지는 여름의 중턱에 접어들면서 거리의 살색은 더욱 많아지고 그것을 바라보는 구경꾼의 눈동자는 파리의 그들처럼 검은 안경은 없어도 빛光자를 그리며 돌아간다.
가끔씩 노출이 심한 여성들을 바라보는 남자들을 비난하는 글을 쓰거나 방송 인터뷰를 하는 여성들이 있었다. 비난인지 아니면 보아 주어서 고맙다는 의사 표시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에 뜨이면 바라보는 것이 자연스러움이거늘 바라보임이 싫다면서 바라보는 사람이 민망함을 느끼는 옷차림을 하고서는 보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늘 궁금했었다. TV에서 보여주는 지하철 수사대가 연일 화제에 오른다. 성추행이라고 하던가. 2호선이 가장 심하고 신도림역이 또한 심하다고 한다. 혼잡함을 틈타 자기 통제를 못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일종의 정신질환이겠지만 그렇다고 과도한 술기운에 혹은 순간적인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여 어쩌다 저지른 단 한 번의 실수라면 그것을 탓하기에 요즈음 노출은 좀 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일 남성들이 지금의 그런 여성들만큼 노출을 하고 지하철에 오른다면 여성들은 어찌 생각할까?
조선일보에 의하면 재작년에 영국의 한 대학교에서 여자연구원들에게 노출도가 다른 옷을 입혀 나이트클럽에 보내고는 남성들이 어떤 노출을 한 연구원에게 가장 많이 접근하는가를 동영상 70시간 분량을 찍어 연구한 결과 40%정도의 노출을 한 연구원에게 가장 많은 남성들이 접근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였다. 40%는 민소매 원피스가 무릎을 덮는 정도의 길이라고 하는데 나이트클럽임에도 불구하고 노출도 50%가 넘은 연구원에게는 남성의 접근율이 현저히 떨어졌다고 한다. 그 이유로는 “지나친 노출은 바람기 많은 여성이라는 인상을 줘 역효과가 났다”라고 하니 노출이 유행이라고 아무나 과도한 노출을 하여서는 오히려 바라보는 남성들에게 여성 본인의 의도와는 달리 그릇된 생각을 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연구라 할 수 있겠다.
인터넷 첫 페이지에 “하의실종” 이라는 육감적인 단어가 정중앙에 자리 잡고 이 푼수의 눈길을 끌기에 문을 열어 보았더니 올 여름 여성 패션은 아래옷은 짧고 윗옷은 길어 아래에 입어야 할 건 안 입고 위만 걸친 것처럼 보이게 하는 모양새가 대세를 이룰 것이라는 업계의 예상을 적어 놓은 기사였다. 하의를 안 입은 것처럼 보여 뭘 어쩌자는 건데 라는 생각으로 들춰본 같은 날 조간신문 문화면에는 아래가 헐렁하고 길이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비치웨어 스타일의 원피스 형태가 유행 할 것이라는 전문가의 견해가 실렸다. 다들 전문가라고 어느 분의 예상이 맞을지는 모르겠으되 후자가 맞는다면 아래는 가리고 위를 열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전철에 올랐다.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데 이 더운 날씨에도 문간에 기댄 청춘남녀는 서로를 밀착하고 있다. 그때 눈길을 사로잡는 여성의 옷차림, 바로 그것이 “하의실종”이었다.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아침 주방에 남편의 혹은 연인의 헐렁한 드레스 셔츠의 긴 뒷자락을 엉덩이 곡선 아래로 떨어뜨리고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계란부침을 만들고 있는 미끈한 여성의 뒷태, 드라마를 찍는 것도 아닌데 바로 그 유사한 모습이 전철 문간에서 연출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의 그 싱그러움이 모든 남성의 로망이라면 오늘 전철 속 하의실종은 그저 유리창 너머 분홍색 속의 모습처럼 보여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유행도 좋고 노출도 좋지만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격언을 좀 새겨 보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2011년 7월 열 하룻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