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비 오는 날, 검은 톱밥에 대한 추억

korman 2013. 7. 8. 11:55

 

 

 

 

 

 

 비 오는 날, 검은 톱밥에 대한 추억

 

장마로 사방에 꽉 찬 끈끈한 습기가 불쾌지수를 높이는 아침, 늘 습관적으로 마시는 커피 한잔을 들고 밖을 바라보다 마누라의 쓰레기 버리러 간다는 소리에 문득 어렸을 때 보았던 미군들의 쓰레기 생각이 났다. 지금 우리가 생활 쓰레기라고 버리는 것이 그 때 미군들이 먹고 마시고 버리던 것과 별 차이가 없지만 그 때는 빈깡통 하나라도 귀한 때였기 때문에 그 쓰레기 버리는 일을 불하받는 것도 큰 이권이었다. 그들의 쓰레기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쓰레기 중에서 내가 가장 궁금하였던 것은 물에 젖은 까만 톱밥 같은 것이었다. 그 당시 초등학교 입학 나이도 안 되었던 나는 톱으로 나무를 자르면 생기는 것은 나무 속살색 톱밥인데 미제나무는 속이 까만 모양이구나 생각하였다. 나의 주위에 누구도 그것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까만 톱밥을 물에 끓여 탕약 같은 것으로 만들어 마신다는 것을 안 것은 동네에서 미군부대에 들어가 일하는 사람이 생긴 몇 해 후였다.

 

내 나이 치고 우리나라에서 어렸을 때 영어 몇 마디 안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전쟁이 끝나고 몇 년 안 된 때였기 때문에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미군들이 여기 저기 많이 주둔하였고 길거리를 오가는 미군도 많은 때였다. 그래서 그들을 대할 기회가 많은 지역에 사는 아이들은 초콜릿이나 껌 등을 얻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츄잉껌 기브미”, “초콜릿 기브미”만은 꼭 알고 있어야 했다. 그리 말을 거는 어린 내가 귀여웠던지 어느 날 미군이 조그마한 박스 하나를 들려주었다. 집에 가져와 박스를 펼쳐놓으니 그 속에 든 것은 몇 개의 크고 작은 깡통과 담배, 봉지에 담긴 하얀 가루, 그리고 까만 가루였다. 하얀 가루 두 개는 맛이 있었지만 까만 가루는 입에 닿는 순간 참 썼다. 그러나 그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역시 없었다. 까만 가루가 커피라는 것으로 그 세 개를 섞어 뜨거운 물에 타서 어른들이 마시는 거라고 안 것 역시 몇 년 후 미군부대에 들어가 일하는 사람이 가르쳐 주어 알았다. 지금의 인스턴트 커피와 프림과 설탕이었다.

 

현존하는 기록으로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맨 처음 마신 사람은 당시 러시아 대사관에 피신하였던 고종황제라 하는데 그 때 고종이 마신 커피는 각설탕 속에 커피를 넣은 것을 물만 부어 마셨다고 하니 그게 지금 대형마트에서 파는 상품 중 가장 많이 팔린다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커피믹스를 탄생케 하는 모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들어가 다방이라는 곳엘 드나들면서 부터였다. 커피의 대중화에 기여한 곳이 이 다방이라고 하는데 인스턴트커피가 도입되기 전 다방에서 끓여주던 커피의 찌꺼기가 어렸을 때 미군의 쓰레기에서 보았던 그 검은 톱밥의 실체라는 것을 확인하기 까지는 15년가량의 세월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우리 다방의 검은 톱밥에는 담배꽁초가 더하여 있었음이 다른 점이라고 할까. 지금은 원두를 갈아서 커피를 뽑으니 그 때 그것이었다면 검은 톱밥이 아니라 물에 젖은 검은 밀가루라고 하였을까. 아무튼 나는 이제 비록 커피전문점에서 주는 아메리카나보다는 좀 연하게 만들지만 머그잔으로 하루에 네 잔 정도를 마시는 커피 애호가가 되어있다.

 

어제 저녁 뉴스에 하루에 커피를 네 잔정도 마시면 혈압 상승을 막아준다는 연구 결과가 프랑스에서 발표되었다는 자막이 흘렀다. 커피와 건강에 관한 정보는 심심하면 발표되는 것이지만 거의 대부분이 우리나라의 연구사례가 아니고 유럽이나 미국에서 발표되는 것을 방송이나 신문에서 생활정보로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난 이런 정보를 대할 때 마다 정보 내용이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세계 각국 사람들은 커피를 즐기는 방법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만났거나 방송에서 보아온 각국 사람들의 대중적 커피 스타일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커피믹스를 종이컵 절반정도의 물에 타 마시는 것을 좋아하고 미국인들은 커피만 머그컵으로 연하게 마시고 영국인들은 보통 잔으로 우유를 많이 탄 커피를 즐기며 이태리 사람들은 진한 에스프레소에 유유와 설탕을 타 마시고 중동 사람과 커피 원산지 사람들 또한 그들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있다. 따라서 각국에서 발표되는 연구결과도 그 나라의 대중적 스타일을 기준으로 한 연구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뉴스에서는 결과만을 전달 할 것이 아니라 어떤 스타일의 커피를 마셨을 때의 연구 결과인지 같이 알려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커피와 크림과 설탕을 섞어 종이컵 절반에 즐기는 우리 스타일의 네 잔과 원두커피를 머그컵으로 연하게 마시는 미국 스타일의 네 잔과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나이가 좀 든 사람들이라면 커피는 몸에 나쁘다는 인식이 있다. 그래서 프림과 설탕을 섞으면 나쁜 게 좀 희석될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도 팔순에 가까운 내 누님은 내 커피 스타일을 걱정하신다. 그럴 때 마다 내가 되묻는다. 커피도 나쁘고 설탕도 나쁘고 프림도 나쁘다는데 난 한 가지 나쁜 것만 마시지만 누님은 나쁜 거 세 가지를 모두 섞어 마시지 않느냐고. 지금은 젊은 층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블랙커피를 즐기지만 커피만 마신다고 누가 건방지다는 소리 하는 사람들은 없다. 그러나 내가 처음 커피를 그리 마시기 시작한 70년대 초에는 알게 모르게 쳐다보며 귓속말로 그리 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가 무슨 양놈이라고 건방지게”. 커피에 대한 격세지감을 느낀다.

 

밖에 장맛비가 세차게 내린다. 또 다른 커피 한 잔이 생각난다.

 

2013년 7월 5일

하늘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