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울림 속으로/아시아의 종

(일본) 류큐왕국(현 일본 오키나와)의 ‘만국진량의 종(万国津梁の鐘), Bridge of Nations Bell

korman 2015. 5. 6. 15:46

류큐왕국(현 일본 오키나와)의 ‘만국진량의 종(万国津梁の鐘)

"Bridge of Nations" Bell (万国津梁の鐘 Bankoku shinryō no kane?)

 

이 종은 현 일본의 오키나와가 류큐왕국으로 존재하던 1458년 당시 쇼다이큐왕 시절에 주조되어 슈리성(Shuri Castel) 정전(Mail Hall)에 달라놓았던 종으로 높이 154.9cm, 구경 93.1cm, 무게 721kg이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 폭탄에 의하여 검게 그을리고 몸통에 탄혼이 생겼다. 1978년 주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현재는 오키나와 현립 박물관에 보관중이고 같은 사이즈의 복제품이 슈리성에 전시되어 있다. 이 종이 슈리성 정전 어디에 매달려 있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현재는 두번째 성곽의 안마당에 고증에 의한 토모야(Tomoya)를 다시 짖고 거기에 매달아 놓았다.  

 



복제종

토모야

 

출처 : 위키피디아 2015년 8월 29일 현재

https://en.wikipedia.org/wiki/Bridge_of_Nations_B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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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의 류큐왕국 특별전에 전시된 ‘만국진량(萬國津梁)’의 종

 

 

 

기사등록 일시 [2014-12-16 15:36:

【서울=뉴시스】 하도겸 박사의 ‘문화예술 산책’ <28>

“류큐국은 남해의 이름난 지역으로 삼한(우리나라)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고 대명(중국)과 일역(일본)과는 ‘광대뼈와 턱’ 또는 ‘입술과 치아’처럼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다. 류큐는 이들 사이에서 솟아난 봉래도와 같은 낙원이다. 선박을 항해해 만국의 가교가 되고 외국의 산물과 보배가 온 나라에 가득하리라.”

오래전 15세기 이후 먼 남해를 항해했던 우리 선조는 이 노래와 같은 시를 종소리와 함께 들었을 것이다. 이 글은 1458년 지금은 일본의 한 지방에 불과했지만, 당시에는 어엿한 독립왕국이었던 오키나와 즉 류큐국의 수도 슈리성 중심 건물인 정전(正殿 : 세이덴)에 걸었던 종에 적혀 있다. ‘세계 여러 나라를 잇는 가교’의 뜻을 가진 ‘만국진량(萬國津梁)’의 종으로 불리는 이 종은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던 류큐 왕국을 부처님의 가피로 축복하고 있다.

류큐 왕국은 1372년 중국과 공식 외교 관계를 맺은 이후 중계무역을 통해 해상왕국으로 번영을 누렸다. 류큐는 조선을 중요한 교역국의 하나로 여겨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해 유교경전과 대장경 등을 구하는 데 힘쓰는 한편 희귀 동·식물과 병선 제조술을 전해주기도 했다. 1609년 사쓰마번의 류큐 침공 이후에는 일본 에도 막부에 사절단을 파견하는 등 일본과 중국에 모두 조공을 바치는 양속(兩屬)체제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외교 관계는 류큐 왕국이 종말을 고할 때까지 270년간 지속했다.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점은 만국진량의 종에 적힌 문귀처럼 류큐왕국이 중국과 일본에 앞서 우리나라를 가장 먼저 호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최남단에 있는 오키나와(沖繩)제도에는 15세기에서 19세기까지 일본과는 별개로 독자적인 역사를 형성한 ‘류큐왕국(琉球王國)’이 존재했다. 1982년 오키나와 우라소에성(浦添城)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대량의 고려기와들이 출토됐다. 특히 계유년 고려의 기와 장인들이 만든 명문이 있는 기와라는 뜻의 ‘계유년 고려와장조(癸酉年高麗瓦匠造) 명문와(銘文瓦)’는 1273년 혹은 1393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273년은 삼산(三山) 왕조가 형성되기 이전으로 호족의 난립시기에 해당한다. 1270년(원종 11년) 6월 1일 해산명령에 저항한 삼별초는 장군 배중손(裵仲孫)을 주축으로 항쟁을 일으켰다. 결국, 1271년 여·몽 연합군에 의해 진도가 함락되고 1273년 6월 장군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아래 탐라(제주도)로 후퇴해 투쟁하다 패했다. 이 무렵 고려에서는 삼별초의 난을 계기로 다수의 유·이민이 발생했다. 삼별초의 거점이던 진도와 제주도가 여·몽연합군에 함락당하는 비운을 맞게 되자 삼별초를 포함한 다수의 고려판 보트피플이 구로시오 난류를 따라 류큐에 유입됐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가능성에 근거해 삼별초 세력이 오키나와 열도로 이동해 류큐왕국의 건국 기초가 됐다는 가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민속적으로도 관련 있는 사례가 몇 개 더 있다. 삼별초가 항쟁했던 진도에서는 모내기나 논매기를 할 때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행위 전승, 즉 머리에 담쟁이넝쿨이나 칡넝쿨을 감는 풍속이 있다. 이는 일본 오키나와 지방의 ‘오월(五月) 우마찌(ウマチ)’, 즉 도작의례(稻作儀禮) 때 신제무당(神祭巫堂)인 ‘노로’, 즉 신녀(神女)가 신맞음을 의미하는 나뭇잎이나 풀 넝쿨을 머리에 감는 것과 흡사하다. 또 삼별초의 마지막 항거지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읍 소재 항파두성 주변에서는 예전에 거의 떼로 고기잡이했기 때문에 이른바 ‘배방선’에 떼를 썼다. 이것 역시 오키나와 일대의 경조민속(競漕民俗)과 흡사하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이귀영)은 일본 류큐(琉球)왕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마련한 ‘류큐 왕국의 보물’ 특별전을 내년 2월 8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연다. 문화 교류를 통해 국외 왕실문화를 국내에 소개하고 더 나아가 우리 왕실문화를 다각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국외 왕실 특별전의 하나로 마련됐다. 요즘 독도와 위안부 문제 등으로 한일관계가 나쁘다 못해 험악한 지경이다. 이렇게 한일관계가 냉각된 민감한 이 시기에 “왜 일본 관련 전시를 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수 있다. 다른 일본 지역에 대한 전시였다면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일수록 문화적 교류는 이뤄져야 한다”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키나와의 경우는 다르다. “오키나와는 일본이지만, 류큐왕국은 우리 선조 삼별초의 역사일 수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적어도 당시에는 일본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우리나라를 그 어느 나라보다도 소중히 대했던 사람들의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류큐 왕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유물 200여 점을 접할 수 있다. 그중 일본 국보 33점을 비롯해 중요문화재 6점을 포함한 대다수 유물이 국외 전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여러 기관의 류큐 왕국 관련 문화재를 한 자리에서 감상하는 흔치 않은 기회다. 일본 오키나와에 가도 이런 전시는 볼 수 없다. 아니 일본 그 어디에서도 이렇게 수많은 국보가 나온 전시를 접할 수 없다. 관람도 무료다. 지하철 3호선을 타면 우리는 오키나와에 갈 수 있다.

1429년 쇼하시(재위 1422~1439년)가 호족 세력을 모두 통일하면서 ‘류큐 왕국’이 성립됐다. 류큐 왕국은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를 잇는 지리적 위치를 이용해 15세기에는 중계무역으로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1609년에는 규슈(九州) 사쓰마번(薩摩藩)의 침략을 받아 일본의 간섭이 시작됐다. 사쓰마번은 류큐의 무역을 장악해 세금을 받았으며 특산물을 수탈했다. 류큐 왕국은 일본 바쿠후의 정치적 간섭 속에서도 독립 국가로서 중국·조선과 교역을 위해 노력했고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일본 메이지(明治)정부의 폐번치현(廢藩置縣)정책으로 1872년 류큐현으로 일본에 편입됐으며 1879년 오키나와현(沖繩縣)이 설치되면서 ‘류큐’라는 이름은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이번 전시에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인 류큐의 왕성, 슈리성은 류큐 왕국의 제1대 왕이 즉위한 1406년부터 일본에 병합되는 1872년까지 왕실의 주거와 왕의 집무와 의례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됐다. 1945년 태평양전쟁 중 대부분 전소했으나 1992년 오키나와의 본토 복귀 20주년을 기념해 주요 건물을 재건했다. 성곽 일대는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470여 년간 류큐 왕국을 통치한 세력은 쇼씨(尚氏)였다. 쇼씨 왕조는 나하의 항구를 통해 각국에서 수입한 다양한 재료를 구해 왕실의 고급 생활용품에 사용했다. 쇼씨 왕조의 유물은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남방제국 등의 영향을 반영하면서도 독자적으로 발달한 류큐 왕국의 미적 감각을 잘 보여준다. 특히 나하시역사박물관 소장 ‘쇼씨 왕조의 전래품’은 2006년 일본 국보로 지정됐다.

우리나라에도 백제 이래 유서 있는 씨족으로 목천(木川) 상씨가 있다. 시조 상국진(尙國珍)은 목천호장(木川戶長)을 지낸 인물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목천상씨갑자대동보(木川尙氏甲子大同譜)’ 등에 의하면 그의 선조는 백제 유민으로 왕건(王建)이 고려를 개국할 때 목천(木川) 상왕산(尙王山)에 웅거하면서 여러 차례 백제 재건운동을 벌이자 왕건은 이들을 미워해 상(象)이라는 짐승글자로 성을 고치게 했다. 그 후 그의 아들 상득유(尙得儒)가 고려 문종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최충(崔冲)이 설치한 구재(九齋)의 하나인 대빙재(待聘齋)에 뽑혀 수학하면서 향역(鄕役)을 면제받고 본래의 성인 상씨(尙氏)로 회복했다고 한다.

출처 :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41216_0013360440&cID=10701&pID= 

         10700 2014년 12월 16일 에 입력된 기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