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산신령이 물었다.

korman 2016. 3. 26. 14:47

 

 

 

 산신령이 물었다

 

친아버지가 아기를 떨어뜨리고 방치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는 뉴스가 또 나왔다. 친모, 계모, 친부, 계부를 가리지 않고 아이들을 해한 기사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온다. 더군다나 몰래 매장을 한 사건도 있다. 하도 많이 나오니 어떤 게 어떤 건지 구분이 안갈 정도다. 예전 같으면 세간의 관심 밖이어서 그냥 묻혀버리던 사건들이 요새 아이들에 대한 전수조사다 하여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터져 나오는 것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남도 아니고 부모들에 의하여 저질러진 사건들이라 아이들이 없는 부모라 할지라도 소스라칠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겠다.

 

이른 아침에 들리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에 나는 아직 비몽사몽에 있는 나의 뇌가 깨어나는 느낌을 받는다. 난 그 아이들의 소리가 좋다. 때로는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거나 귀에 거슬리는 말을 쓰는 아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어린이 놀이터에서 골목을 타고 들려오는 그 즐거운 목소리들은 어른들에게 세상이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듯도 하다. 아이들의 잘못된 행동이나 말투는 모두가 어른들의 잘못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들을 깨우치게 하기도 한다. 물론 아이들에게서 그런 걸 느끼지 못하는 어른들도 많다. 어쩌면 어른 각자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가 그러니 아이들도 그렇다고 치부하는지도 모르겠다.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주 구성원은 어른들인 것을.....

 

말을 못하는 아이들은 울음소리로 자기표현을 한다고 한다. 어디 아프거나 옷이 불편하거나 배가 고프거나 할 때 그것을 알리는 울음소리가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현명한 부모가 되려면 그 울음소리를 구별하고 원인을 파악하여야 한다. 젊은 엄마들 보다는 할머니들이 아이의 울음을 더 잘 그치게 하는 것은 경험에 의하여 다각도로 그 울음의 원인을 분석하고 대처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의 울음에는 원인파악도 중요하지만 어른들의 참을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요즈음 사태의 원인은, 아이들이 말을 할 수 있거나 없거나, 부모들이 아이들의 의사표현을 파악하려 하지 않고 단시간에 참을성 없이 아이들과 싸워서 이기려 하기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무섭게 대하거나 윽박지르면 아이들이 금방 울음을 그치거나 버릇이 고쳐질 거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는지. 부모들에게는 참을성이 아이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컴퓨터와 핸드폰의 바탕화면을 볼 때마다 난 기분이 좋아진다. 그 속에 손주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는 곳이 가까우니 친손주들은 거의 매일 보지만 외손주까지 내집에서 같이 모일 때는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된다. 다 모여야 3명뿐이지만 난 매번 이 세 놈을 소파에 앉히고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아이들이 변화하는 새 모습으로 컴퓨터와 전화기 바탕화면을 바꾼다. 내 전화기에 들어있는 번호 중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거나 부모가 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사진이 나타나는 어플에 어김없이 아이들의 사진을 깔아 놓고 있다. 그만큼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궁금한 점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그리 몹쓸 짓을 한 부모들의 전화기나 컴퓨터에는 어떤 사진이 깔려 있을까 하는 것이다. 설마 그들도 아이들 사진을 깔아놓고 매일 보면서도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겠지.

 

큰손주가 이제 6살이 되었는데 글을 잘 읽고 있다. 가끔 동화책을 보다가 혹은 길을 가다가 쓰인 글을 보고 이 할아비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요즈음 걱정거리가 생겼다. 혹 이런 안타까운 사건에 대하여 이 녀석이 물어오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TV에 나오는 자막을 주절주절 읽어가기 때문이다. 어떤 대답을 준비하고 있어야 할지 고민스럽다.

 

아이가 암매장된 산의 산신령이 부모에게 물었다.

“이 아이가 네 아이냐?”

무슨 답이 있었을까?

 

2016년 3월 24일

하늘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