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고려의 종

중앙박물관소장 보암사 을축명 범종(寶巖寺 乙丑銘 梵鍾)

korman 2016. 8. 16. 14:43

중앙박물관소장 보암사 을축명 범종(寶巖寺 乙丑銘 梵鍾)





보암사 을축명 범종(寶巖寺 乙丑銘 梵鍾)(2-27, 3-22)


소 재 지(所 在 地) : 서울특별시(特別市)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
연 대(年 代) : 1325年(충숙왕(忠肅王) 12年, 을축(乙丑))
지정번호(指定番號) :
실 측 치(實 測 値) : 총고(總高); 37cm 종신고(鍾身高); 29.7cm 용통고(甬筒高); 9.5cm
상대폭(上帶幅); 2.2cm 유곽폭(乳廓幅); 1.2cm 유곽폭(乳廓幅); 8.2×10.7cm
당좌경(撞座徑); 6cm 하대폭(下帶幅); 243cm 종구경(鍾口徑); 24.3cm
종구후(鍾口厚); 2.4cm


1974年 10月 14日 매장문화재(埋藏文化財)로 당국(當局)에 신고(申告)된 동종(銅鍾)으로서
출토지(出土地)와 출토(出土) 시대(時代)이 확실(確實)한 것이다. 발견(發見) 출토시일(出土
時日)는 1974年 10月 12日 은평구(恩平區) 진관내동(津寬內洞) 산(山)51번지(番地)에서 경기
도(京畿道) 의정부시(議政府市) 가릉삼동(佳陵三洞) 산(山)75에 거주(居住)하는 김수만씨외
2인(人)이 우연히 상기(上記) 장소(場所)에서 산사태로 인(因)하여 일부지상(一部地上)에 노
출(露出)된 것을 수집하여 신고(申告)한 것이다. 출토시(出土時)에는 동종(銅鍾) 이외(以外)
에도 일괄유물(一括遺物)로서 청동제향완(靑銅製香垸) 1점(點), 청동제시(靑銅製匙) 2점(點),
청동제(靑銅製)국자 1점(點), 청동완(靑銅垸) 2점(點), 청동제(靑銅製)접시 10점(點), 파수부
청동기물(把手付靑銅器物) 1점(點)과 대형철부(大形鐵釜) 1점(點)이 동시(同時) 출토(出土)
수습된 점(點)이 주목(注目)된다.
을축명(乙丑銘) 범종(梵鍾)을 개관(槪觀)하여 보면 용뉴(龍鈕)는 단용(單龍)에 용통(甬筒)
을 구비(具備)하고 용(龍)의 좌족(左足)과 용구(龍口)에는 일주(一珠)씩 여의주(如意珠)를 물
고 또는 장악하고 있다. 용통(甬筒)의 상부(上部)에는 6엽(葉)의 연판좌(蓮瓣座) 위에 각(各)
1개(個)씩 배치(配置)한 6주(珠)의 여의주(如意珠)를 갖춘 전형적인 고려종(高麗鍾)의 용뉴
(龍鈕)를 갖추고 있으며, 종정(鍾頂)과 상견대(上肩帶)가 접(接)하는 곳에서 입상문대(立狀文
帶)를 돌리고 있다. 입상문대(立狀文帶)는 연판문양(蓮瓣紋樣)으로서 각(各) 연판(蓮瓣)에는
연주문(連珠紋) 1개(個)씩을 배치(配置)하였다. 상견대(上肩帶)는 연당초문(蓮唐草紋)과 작은
연주문대(連珠紋帶)로 표현(表現)하고 있다.
4처(處)에 배치(配置)된 유곽(乳廓)은 유곽(乳廓) 내부(內部)와 외부(外部)에 연주문대(連
珠紋帶)로 구획(區劃)하고 그 중심부(中心部)의 유곽대에는 완자문(紋)으로 처리한 것이 또
한 특색(特色)의 하나이며, 유곽(乳廓) 내(內)의 9유(乳) 역시 도식화(圖式化)된 연화좌(蓮華
座) 위에 돌기(突起)된 9유(乳)를 갖추고 있을 뿐 별다른 특색(特色)이 없다. 종복(鍾腹)에는
운문(雲紋) 위에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갖추고 보관(寶冠)을 머리에 얹고 무릎을 굻고
앉아 합장(合掌)하여 공양(供養)하는 보살상(菩薩像) 4구(軀)가 4처(處)에 배치된 당좌(撞座)
4개(個)와 서로 교호(交互)로 배치(配置)되어 있다. 당좌(撞座) 역시 복엽(複葉)의 연판(蓮
瓣)으로 처리하고 8과(顆)를 중심(中心)하여 이룩된 자방(子房)으로 처리하였다. 하대(下帶)
는 상대(上帶)와 같이 연화당초문대(蓮華唐草紋대)로 돌리고 종구(鍾口) 가까이에 이르러서
는 작은 연주문(連珠紋)을 접(接)하여 처리하였다. 하대(下帶)는 상대(上帶)와 같이 연화당초
문대(蓮華唐草紋대)로 돌리고 종구(鍾口) 가까이에 이르러서는 작은 연주문(連珠紋)을 접
(接)하여 처리하였다. 이상(以上)과 같은 특징 이외에 가장 주목(注目)되는 것은 종구(鍾口)
의 내경(內傾)한 구연부(口緣部)에는 중요(重要)한 명문(銘文) 59자(字)가 음각(陰刻)으로 각
자(刻字)되어 있어, 본(本) 동종(銅鍾)이 평장사기씨(平章事奇氏)가 보암사(寶巖寺)에 증정한
종(鍾)임을 알게 되었고 종(鍾)의 주조년대(鑄造年代)도 파악(把握)하게 되었다.
음각(陰刻) 명문내용(銘文內容)을 살펴보면
伏爲先亡父母亡男將軍奇福法界迷倫咸登樂岸夫婦福壽延長後世證菩提謹捨冡財鑄成安于 寶巖
(복위선망부모망남장군기복법계미윤함등낙안부부복수연장후세증보제근사몽재주성안우 보암)
寺 因牙法眞者 時乙丑六月 日誌 平章事奇
(사 인아법진자 시을축육월 일지 평장사기)
이상과 같은 명문(銘文)의 판독(判讀)과 아울러 그 내용(內容)을 해석하여 대략(大略) 본다
면 “먼저 돌아가신 부모와 죽은 아들 장군 기복과 법계에 미혹한 뭇무리들이 모두 극락에
오르고 우리 부부 역시 수(壽)와 복(福)이 연장되고 후에 함께 보리를 깨우치도록 하기 위하
여 삼가 가재를 바쳐 종을 주성하여 보암사에 봉안하는 바이다” 라는 내용(內容)이다. 말미
(末尾)에 “시을축육월일지평장사기(時乙丑六月日誌平章事奇)‘라는 명문(銘文)과 본문(本文)
내(內)의 ’망남장군기복(亡男將軍奇福)‘이라는 명문(銘文)으로 보아 종(鍾)의 주성년대(鑄成
年代)를 밝히는데 중요(重要)한 점으로 보이며, 또한 기씨가(奇氏家)에서 염원으로 조성(造
成)한 것을 알게 된다. ’시을축육월일지(時乙丑六月日誌)‘의 명문(銘文) 중(中) 을축년(乙丑
年)에 해당(該當)되는 것은 고려(高麗) 광종(光宗) 16年(965)과 현종(顯宗) 16年(1025), 그리
고 선종(宣宗) 2年(1085), 인종(仁宗) 23年(1145), 희종(熙宗) 1年(1205), 원종(元宗) 6年
(1265), 충숙왕(忠肅王) 12年(1325), 우왕(禑王) 11年(1385) 등(等)에서 보인다.69) 또한 명문
(銘文) 중(中) 평장사(平章事)와 장군(將軍) 등의 직명(職名)이 보이는데 고려(高麗) 중앙직
제(中央職制)에 의(依)하여 평장사(平章事)는 정이품(正二品)이고 장군(將軍)은 정사품(正四
品)에 해당(該當)되는 벼슬이다. 고려(高麗)의 중앙직제(中央職制)가 완성(完成)된 때는 11대
(代)의 문종(文宗) 때이며, 이후(以後) 계속(繼續)하여 중앙직제(中央職制)에 평장사(平章事)
의 직명(職名)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시을축(時乙丑)과 평장사기(平章事奇)’라는 것을 중시
(重視)하여 볼 때 기씨(奇氏)가 중앙(中央)벼슬에서 세도(勢道)를 부리며 행세하던 때는 몽
고(蒙古)의 第3차 침입(侵入) 이후(以後)이며, 가장 전성기는 第27代인 충숙왕(忠肅王)때인
점으로 보아 필자(筆者)의 생각으로는 역시 충숙왕(忠肅王) 12年(1325) 을축년(乙丑年)이 아
닐까 추정(推定)된다. 또한 충숙왕(忠肅王) 이후(以後)부터는 기씨(奇氏)의 세도(勢道)가 약
화(弱化)되기 시작(始作)한 때이며 종(鍾)의 형태(形態)와 양식(樣式)으로 보아서도 1300年
代 이후(以後)로 하강(下降)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주조년대(鑄造年代)도 역시 1324年
을축(乙丑)을 이후(以後)하여 주조(鑄造)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출처 :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간 한국의 범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