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일본속 우리나라 종

일본 시마네현(島根縣) 야스기시(安來市) 운주지(雲樹寺, Unjuji) 소장 통일신라범종

korman 2016. 10. 16. 21:28

[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⑤

일본 윤쥬지(雲樹寺) 소장 통일신라종

 

일본 소재 한국 범종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종
천상의 소리 자태 지닌 

‘주악천인상’ 일품 꼽혀 

뱃길로 건너간 것 짐작 

8세기말 9세기 초 제작 

통일신라 종은 국내에 3점의 완형 (상원사종, 성덕대왕 신종, 청주 운천동 출토 종)과 2점의 파종(선림원지종, 실상사 파종)이 남아있지만 일본에는 국내보다 많은 4점의 통일신라 종이 확인된다. 특히 지금은 소실되어 사라졌지만 통일신라 745년에 만들어진 ‘천보4년명 종’은 상원사종과 비견되는 아름다운 작품이었으며 856년에 제작된 범종이 나가사키(長崎)에 있었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오키나와(沖繩)에 있던 현덕3년명(顯德三年銘, 956년) 종은 대동아 전쟁으로 불타 버리고 현재 용뉴(龍鈕)만 남아있어 더욱 아쉬움을 준다. 일본에 건너가 있는 4점의 범종 가운데 죠구진자종(常宮神社鐘, 833년)과 우사진구종(宇佐神宮鐘, 904년)은 국내에서 찾아볼 수 없는 9~10세기 통일신라 범종의 편년자료로 한국 범종 연구에 귀중한 공백을 메워 주고 있다.

큐슈(九州) 지방은 우리나라와 지역적으로 가까운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가장 많은 수인 총 11점의 한국 범종이 산재되어 있다. 큐슈 다음으로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지역이 많으며 토쿄(東京) 쪽인 칸토우(關東) 지역으로 가면서 점차 그 수효가 줄어드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통일신라와 고려 초기 범종의 경우 주로 북부 해안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기타의 범종도 대부분 해안에서 가까운 지역에 소장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동시에 중형종이나 소종이 많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종을 가져갈 때 이동이 간편한 종을 대상으로 삼아 해상 운반이 용이한 해안가 일대의 사찰, 신사 등에 옮겨간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에 남아있는 53점의 한국 종 가운데 한 점이 일본 국보(國寶)로, 20점이 중요문화재(重要文化財)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는 점은 비록 아쉽지만 우리 종의 가치에 자부심마저 든다.

일본 소재 한국 범종 가운데 가장 연대가 앞서는 것이 이번 호에 소개할 일본 시마네현(島根県) 야스기시(安來市) 소재의 윤쥬지종(雲樹寺鐘)이다. 시마네현 북부 해안가인 윤쥬지(雲樹寺) 경내의 개산당(開山堂) 안에 보관되어 있는 통일신라의 종이지만 제작 당시부터 명문은 기록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일본에 건너온 이후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 추각명(追刻銘)이 남아 있어 어떻게 본다면 이 종이 일본에 건너온 아픈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다.

우선 용뉴(龍鈕)는 목 부분이 파손된 것을 현재 철끈으로 연결시켜 놓았다. 앞, 뒤로 뻗어 천판을 누르고 있는 좌우의 발은 우리나라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상원사종(上院寺鐘, 725년)과 동일한 모습이지만 용두는 그다지 역동감 있게 표현되지 않았다. 용뉴 뒤에 붙어있는 굵은 음통에는 크게 상, 중, 하단의 세부분으로 구획된 문양대를 두었는데, 상, 하단에는 중앙부에 화문(花文)이 첨가된 앙· 복련의 연판문을, 그리고 중단에는 천의를 옆으로 날린 채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모습의 공양자상(供養者像)을 낮게 부조하였다. 이런 독특한 모습을 지닌 음통의 문양은 이 종이 거의 유일하다.

종신(鐘身)에 비해 폭이 넓은 상, 하대에는 그 외연 부분을 화문이 첨가된 연주문대(連珠文帶)로 두르고 그 내부에 향로를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게 배치한 2구씩의 공양자상을 새겨놓았다. 이러한 문양은 음통 중단에 표현된 공양자상과 거의 동일한 형태이지만 사이사이의 여백 면에 화문과 운문을 첨가시켜 보다 화려하게 꾸몄다. 반면에 하대는 상대보다 폭이 조금 넓고 내부의 중심문양을 삼중(三重)으로 구획한 반원형의 장식문양으로 반복 시문한 점이 다르다. 이처럼 상, 하대 문양을 서로 다르게 시문한 통일신라 종으로는 지금은 소실된 선림원지종(禪林院址鐘, 804년)에서도 보이지만 이 종은 그와 반대로 하대 쪽에 공양자상을 배치한 점이 서로 다르다.

이 반원형 삼중원 내에는 각각 화문, 당초문, 여의두문을 가득 차게 장식하였고 주 문양 사이마다 보상화문을 채워 화려한 모습으로 꾸몄다. 상대 아래에 붙어있는 네 개의 방형 연곽대(蓮廓帶)에도 하대와 동일한 문양이 표현되었으며, 내부의 연뢰(蓮蕾)는 성덕대왕 신종처럼 돌출되지 않고 납작한 6엽의 화문좌형(花文座形)으로 표현되었다. 연곽과 연곽 사이에 해당되는 종신 여백 면에는 구름 위에 무릎 꿇은 채 천의를 날리며 하늘에서 날아 내리는 2구 1조(二軀一條)의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이 앞, 뒷면 동일하게 부조되어 있다. 왼쪽 상은 두 손을 모아 입으로 횡적(橫笛)을 불고 있으며 다른 한 상은 오른손을 머리 위에 들어 배 앞에 놓인 요고(腰鼓)를 치는 모습이 유려하게 표현된 천의와 함께 생동감 넘치게 묘사되었다.

정면관을 하고 구름 위에 앉아 무릎을 곧추 세운 전체적인 모습은 상원사종의 주악상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얼굴의 세부 윤곽이 보다 강조되었고 가느다란 천의의 날림은 복잡하면서도 어딘지 힘이 빠진 듯 느슨해졌다. 당좌 역시 다소 간소화되어 넓은 자방(子房) 안에는 연밥(蓮子)이 표현되지 않았고 그 바깥에는 화형 장식이 첨가된 8엽의 연판문을 둥근 테두리(圓圈) 없이 시문하였다.

한편 당좌와 주악천인상 사이의 한쪽 여백면을 택해 ‘사입, 운주서탑산천장운수흥성선사, 응안칠년갑인 시월, 일일, 원주종순(舍入, 雲州瑞塔山天長雲樹興聖禪寺, 應安七年甲寅 十月, 一日, 願主宗順)’이라는 4행 29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여기에 기록된 응안(應安)7년은 일본 년호로서 1374년에 해당된다. 윤쥬지에 전해 오는 <고종기(古鐘記)>에 의하면 종순(宗順)이란 거사가 꿈에 계시를 받아 운수사의 북방 바다 한가운데서 인양한 것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보존이 양호한 현재의 상태로 미루어 바다에서 꺼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이 기록은 1374년에 가까운 어느 시기쯤 뱃길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것을 시사해 주는 내용이라 짐작된다. 주악천인상이 2구 1조의 형식이면서 횡적과 요고를 연주하고 있는 종으로 가장 먼저 제작된 종은 지금은 사라져 버린 천보4년명종(天寶四年, 745년)종이다. 이 종은 원래 나가사키현(長崎縣) 코쿠부후하치망구(國府八幡宮)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신불분리(神佛分離) 때 안타깝게 녹아 없어졌다.

이처럼 요고와 횡적을 연주하는 모습의 주악상은 804년에 제작된 선림원지종(禪林院址鐘)까지 계승을 이루었다. 그러나 주악천인상의 유려한 의습과 천의, 볼륨감 넘친 신체의 표현 등에서 운수사종이 그 보다 이른 시기의 제작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단순화된 당좌의 표현과 왜소한 용뉴의 모습에서 상원사종, 성덕대왕신종 보다는 뒤늦은 시기로 판단되어 그 제작 시기는 대체로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경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본다면 천보4년명 종이 사라져 버린 현재 이 윤쥬지종은 일본에 현존하는 한국 범종 가운데 가장 시대가 올라가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총고가 75.3cm에 불과하여 통일신라 종 가운데서 그리 큰 편에 속하지 않지만 음통과 상하대에 표현된 다채로운 장식성과 상원사종에 비견될 만한 주악천인상의 우아한 자태는 일본 소재 한국 범종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종이라고 평가될 만하다. 현재 일본 중요문화재이다. 

 여음(餘音)

이 종을 조사한지 어언 20여년이 흘렀다. 당시 개산당 바닥에 두 개의 긴 목제 받침 위에 종을 올려놓은 어설픈 전시 모습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또 원래는 종을 보기 위해 별도의 관람료를 끊고 들어가야 했지만 한국 종을 한국 학자가 조사하는데 왜 표를 끊어야 되냐고 강력히 항의하자 그냥 입장을 시켜줬던 기억이 난다. 그나마 사진 촬영을 흔쾌히 허락해 줬던 윤쥬지 스님들의 배려에 고마움을 표한다.

[불교신문3285호/2017년3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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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⑤일본 윤쥬지(雲樹寺) 소장 통일신라종 - 불교신문

천상의 소리 자태 지닌 ‘주악천인상’ 일품 꼽혀 뱃길로 건너간 것 짐작 8세기말 9세기 초 제작 통일신라 종은 국내에 3점의 완형 (상원사종, 성덕대왕 신종, 청주 운천동 출토 종)과 2점의 파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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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마네현(島根縣) 야스기시(安來市) 운주지(雲樹寺, Unjuji) 소장 신라범종

 

 

 

 

 

유형                       유물

시대                       고대/남북국

성격                       불구, 범종

제작시기/일시          통일신라시대

수량                       1구

재질                       구리

크기(높이, 길이, 두께, 너비)  높이 75.3㎝, 입지름 44㎝

소장처  일본 시마네현(島根縣) 야스기시(安來市) 세이세이정(淸井町) 운수사(雲樹寺)

관리자  일본 시마네현(島根縣) 야스기시(安來市) 세이세이정(淸井町) 운수사(雲樹寺)

정의

일본 시마네현(島根縣) 야스기시(安來市) 세이세이정(淸井町) 운수사(雲樹寺)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종.

 

내용

높이 75.3㎝, 입지름 44㎝. 용뉴(龍鈕)는 목줄기 일부가 결손되었으며, 매우 빈약하게 보이나 용통(甬筒)은 상하단에 연판문(蓮瓣文)을 둘러 장식하는 등 비교적 섬세한 조식(彫飾)을 하고 있다.

 

상하대는 서로 다른 무늬를 넣었는데 대상(帶狀) 위의 변두리에 영락대(瓔珞帶)를 두르고 있음은 동일하다. 상대에는 유운(流雲) 속에 보화(寶花)를 중심으로 서로 마주 나는 비천상을 장식하였고, 하대에는 반원권문(半圓圈文)을 연속시켜서 바탕에는 보상화문(寶相花文)을 채워 넣었다.

 

반원권 안에는 중앙에 반화형(半花形) 보상화문을 크게 배치하고 밖으로 동심원상에 여의두문(如意頭文) 같은 화판(花瓣)을 둘렀다. 상대의 하단에 붙여서 설치된 4개소의 유곽(乳廓)은 하대의 의장과 유사하고, 그 안에는 6엽연화좌(六葉蓮花座)에 얕게 돌출된 9개의 유두(乳頭)가 들어 있다.

 

종신의 비천상은 구름 위에 무릎을 꿇고 요고(腰鼓 : 장구)와 횡적(橫笛)을 연주하는 2구의 비천상이 유려하게 새겨졌다. 자방(子房)을 2개 표현하고 8엽연판문을 두른 당좌(撞座)는 비천 사이의 2개의 부분에 배치되어 있다.

 

이 범종은 신라 범종의 전형을 고루 갖추고 있는데, 특히 비천상이라든지 유곽·하대 등의 의장양식이 상원사동종(上院寺銅鐘)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어떠한 경로로 일본에 전해지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출처 : http://m.blog.daum.net/xorud1350/441?categoryId=58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330

 

 

 

 

8세기 추정, 청동, 전체높이 75.3cm, 종높이

55.9cm, 입지름 44.0cm,

日本 島根縣 安來市 淸井町 雲樹寺, 일본 중요문화재

 

현재 일본에 있는 한국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종이다. 종복 부분이 가장 불룩 솟아 항아리를 엎어놓은 형태, 용뉴와 음통, 상하대의 문양 띠, 연곽 아래로 2개의 당좌와 비천을 갖추어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종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용두는 목 부분이 깨져서 종을 달 수 없기 때문에 운주지의 보물고에 있다. 음통은 3단 무늬로 이루어져 있는데 상단과 하단에는 앙련 및 복련의 연판무늬가, 중앙단에는 구름 위에 주악비천상을 새겼다. 상대의 위아래에는 4엽 꽃무늬를 두고 천의자락을 유려하게 날리며 마주하고 있는 비천상이 있다. 연곽과 하대는 3중 반원권무늬가 주문양인데 이 무늬와 비천상의 모습이 상원사종과 유사하여 이 종을 8세기 후반 제작으로 보는 근거로 삼고 잇다. 반원무늬 외부는 화려한 당초무늬가 베풀어져 있다. 연곽 안의 연꽃봉오리는 돌기가 없이 평평하고 단정하다.
당좌는 정면과 뒷면에 1개씩 있고 종신 좌우에는 마주보고 있는 한 쌍의 주악비천상이 있다. 당좌 가운데에는 큰 중방을 두고 8엽 겹연꽃무늬가 둘려 화려하다. 쌍비천상의 오른쪽 비천은 장구를 치고, 왼쪽 비천은 횡적을 부는 형상이며, 천의자락은 몸 뒤쪽으로 활달하게 휘날리고 있어 역시 상원사 종과 유사하나 악기와 천의의 모습은 다르다. 그러나 세부가 섬세한 상원사종과는 달리 문양 하나하나가 아주 선명하지는 않다.
종이 소장된 운주지는 일본의 서북부 해안 시마네현에 있는 사찰로 일본 임제종臨濟宗의 고찰이다. 종신에 음각으로 새겨진 추명에 따르면 오안應安 7년(1374), ‘宗順’이 운주지에 시납했다고 하며, 절에 전해 내려오는 『古鐘記』에는 꿈을 따라가서 동종을 바다에서 건져 봉납했다고 하나, 바다에서 건진 종이라기에는 보존 상태가 아주 우수하다. 일본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직지사박물관 2007년 3월 25일 현재

보완 2014년 3월 2일 현재

 

http://www.jikjimuseum.org/Gallery_200407/product/UnifiedSilla/05.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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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약탈해 간 '운주지소장종' 복원품

원광식 (진천종박물관 명예 관장)

 

 

종의 울림은 듣는 이의 잠자는 영혼을 일깨운다는 말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 매년 1월 1일, 33 번의 종소리로 새해를 맞이하는 까닭도 저마다 꿈과 계획이 오랫동안 마음 속에 울려 퍼지기를 바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신비로운 종의 울림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곳이 있다. 충북 진천군의 진천종박물관에서는 명예 관장인 필자가 직접 수집하고 복원한 신라 시대의 상원사 종, 조선 시대의 낙산사 종 등 우리의 소리 역사를 대표하는 종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소개할 보물은 지난 1992년 필자가 복원한 통일 신라 시대의 '운주지 소장 종'이다. 항아리를 거꾸로 엎어 놓은 것 같은 모습으로, 작은 용이 종을 입에 물로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이 종은 성덕대왕신종과 더불어 통일 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종은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없다. 13ㆍ14세기 무렵 약탈을 당해 현재 일본의 남서부에 위치한 혼슈 지역의 작은 사찰에 있기 때문이다.

당시 왜적들은 우리의 종 가운데 아름답고, 크기가 작아 옮겨 가기 편리한 것을 마구 빼앗아 갔다. 이 종이 일본의 바다에서 발견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랫동안 물 속에 잠겨 있었다는 흔적도 증거는 없다. 소드락질해 간 장물이 분명하다.

필자는 이 종을 되찾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한 끝에 1984년, 일본의 운주지 소장 종을 복원하기로 마음먹었다. 결심을 실현하는 데는 힘겨운 노력이 따르는 법이다.

필자는 신라 시대 종소리의 비밀을 풀어 내기 위해 연구에 열중하며 숱하게 종을 만들고 깨기를 거듭했다. 8 년 동안의 고된 작업 끝에 1992년 마침내 높이 75.3 cm의 복원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진품은 아니지만 후손들이 복원된 종이라도 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작품을 우리 박물관의 전시관에 내놓고 있다.

진천종박물관에서는 이 밖에 고려 시대의 덴린지 소장 종과 엔세이지 소장 종 등 복원품 12 점과 신라 시대로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진품 150여 점을 만나 볼 수 있다.

 

입력시간 : 2009/10/12 15:52:09

 

출처 : 소년한국

http://kids.hankooki.com/lpage/news/200910/kd2009101215520910317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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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사(雲樹社) 소장(所藏) 범종(梵鍾)


소재지(所在地) : 일본(日本) 도근현(島根縣) 안래시(安來市) 청정정(淸井町)
연 대(年 代) : 9세기경
지정번호(指定番號) :
크 기 : 높이 75.3cm 구경(口徑) 44cm


이 범종(梵鍾) 역시 신라(新羅) 범종(梵鍾)에서 보이는 용뉴(龍鈕)를 구비한 것으로 , 견대(肩帶) 와 하대(下帶)의 문양(紋樣)은 연주문대(連珠紋帶)를 시문(施紋) 조식(彫飾)하고, 이 연주문대(連珠紋帶) 의 곳곳에 4판화문(瓣花紋)을 배치(配置)하였다. 특히 견대(肩帶)의 주문양대(主紋樣帶)에는 천의(天衣)를 옆으로 날리며 마주보고 승천(昇天)하는 비천상(飛天像)으로 처리하고, 여타(餘他)의 공간(空間)에는 운문(雲紋)과 화문(花紋)을 조식(彫飾)하였다. 그러나 하대(下帶)는 견대(肩帶)와 동일하게 외주(外周)에 연주문대(連珠紋帶)로 조식(條植)하고, 그 내부(內部)의 주문양대(主紋樣帶)는 상원사종(上院寺鍾)․선림원종(禪林院鍾) 등에서 보이는 반원권문양(半圓圈紋樣)을 연속시켜 하대문양(下帶紋樣)의 주류(主流)를 이루었다. 이 반원권(半圓圈)은 외곽(外廓)과 중앙(中央)․내곽부(內廓部)로 삼분(三分)하여 연주문(連珠紋) 반화문(半花紋)․보상문(寶相紋) 등으로 나누어 조식(彫飾)한 것이 다른 범종(梵鍾)의 문양대(紋樣帶)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다. 또한 유곽(乳廓) 부분(部分)도 하대(下帶)의 주문양대(主紋樣帶)와 유사한 문양(紋樣)을 응용하여 조식(彫飾)되어 있으며, 그 내부(內部)에 6판(瓣)의 연화좌(蓮華座)로 9유(乳)를 배치하고 있다. 이와같은 유두(乳頭)의 형식(形式)은 봉덕사종(奉德寺鍾)의 유두(乳頭)와 유사한 것이다. 또한 종신(鍾身)의 비천상(飛天像) 역시 운상(雲上)에 무릎을 꿇고 2구(軀)의 천인상(天人像)이 요고(腰鼓)와 횡적(橫笛)을 주악(奏樂)하면서 비천(飛天)하는 상(像)으로 되어 있으나, 그 조각(彫刻) 수법(手法)이 타(他) 범종(梵鍾)의 비천상(飛天像)의 선(線)보다 유려(流麗)하고 아름답게 처리(處理)되어 있는 것이 특징(特徵)이다.
당좌(撞座)에 있어서도 다른 범종(梵鍾)의 당좌(撞座)에 비(比)해 자방(子房)이 몹시 크게 되고 외곽(外廓)에 8판(瓣)의 연판문(蓮瓣紋)으로 조식(彫飾)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범종(梵鍾) 역시 8세기까지는 이르지 못하나 9세기 경의 작품으로는 충분(充分) 한 신라(新羅) 범종(梵鍾)의 일례(一例)인 것이다.

 

출처 :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간 한국의 범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