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울림 속으로/아시아의 종

(일본) 군산의 일본사찰 동국사의 일본 종

korman 2019. 4. 23. 10:30

군산 일본사찰 동국사의 일본 종






* 금강사는 동국사의 전신인 일제강점기때의 이름이다.



사진 : 2019년 4월 20일 현재



동국사의 본래 이름은 금강선사(錦江禪寺)이다.


금강선사는 1909년 일본인 승려 내전불관(內田佛觀)이 군산에

포교소를 개설하면서 창건한 조동종(曹洞宗) 사찰이다. 


..일본불교는 1877년 부산의 개항과 함께 일본정부의 요청에 의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정토진종 대곡파(淨土眞宗大谷派)가 포교를 개시하였고 1904년 군산에도 포교소를 개설하였고 일연종(一蓮宗)이 뒤를 이었다. 

결국 일본불교의 한국진출은 순수한 불교포교가 목적이 아니라 한국을 일본에 同化시키려는 일본정부의 의지를 그대로 반영하였다고 본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불교를 포교하고자 1911년 6월 3일자로 사찰령을 발령한다. 이를 계기로 일본불교는 전국에

별원, 출장소, 포교소 등을 건립하였다.


금강사가 창건되기 전 군산에는 본원사, 군산사, 안국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금강사를 창건한 내전불관(內田佛觀)은 1909년 당시 77세의 고령으로 군산지역을 순석(巡錫)하다가 군산 일조통(一條通)에 있던 집을 빌려 포교소를 개설하였다. 1913년 7월에는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본당(本堂)과 고리(庫裡)를 신축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단기간에 본당을 신축할 수 있었던 것은 단가(檀家)에서

많은 시주를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금강사에 등록된 단도(檀徒)로는 대지주였던 궁기가태랑(宮崎佳太郞)과 웅본이평(熊本梨平)을 비롯하여 대택등십랑(大澤藤十郞), 하전길태랑(下田吉太郞) 등이 있었다.




동국사 창건의 역사적 배경


군산(群山) 동국사(東國寺)는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한일합방.韓日合邦) 1년 전인 1909년 일본 승려(僧侶)

선응불관(善應佛觀)스님에 의해 창건(創建)되어 일제 강점기 36년을 일인 승려들에 의해 운영되다가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이하여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품으로 돌아온 뼈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하여 대한제국(1897-1910순종,隆熙.3)과 일제 식민지시대(日帝時代, 1910년 8월 29일 ~ 1945년 8월 15일)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09년(己酉, 불기2453년, 단기4242년, 대한제국 순종隆熙.3년)은 일본 년 호로 명치(明治)42년이다.

이 시기는 일본이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勝利)하였고, 1909년 7월에는 대한제국에 대한 강제 병합이 일본 각료회의에서 결정된 해이며,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이에 분노한 민족주의자 안중근의사가 중국 하얼빈 역(驛)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いとう ひろぶみ)를 암살(暗殺)한 해이다. 

이를 기회로 일본 내에서 대륙 침략을 위장한 소위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는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대한제국(大韓帝國) 강제 병합(倂合)의 추진이 가속화되던 때이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경술국치.庚戌國恥)이 맺어지면서 5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가 되어, 소위 일본천황 직속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의해 1945년까지 36년간의 고통어린 식민지배(植民支配)가 시작되었다. 


19세기 후반 전 세계적인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爭奪戰)의 일환으로 탈 아시아를 외치던 일본은 조선 측에서 일본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거부한다는 것을 명분삼아 공식적으로 정한론(征韓論)을 제기한 이래 메이지 덴노(명치천황.明治天皇) 시대의 과두정부는 일본 국내에 대륙 침략을 위한 소위 정한론(征韓論)을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래 일본 정부는 조선을 무력으로 식민지화시키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였고, 1894년 청일 전쟁과 1905년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침략을 가시화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그 외에도 엄연한 독립국인 대조선국의 국권을 무시하고, 영일 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으로 제국주의적인 침략을 본격화 하던 시기다.


이렇게 볼 때 동국사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합방에 앞서 그들의 국교이다시피 숭상되고 있는

불교를 한국에 가지고 들어와 왜색불교를 전파 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한국에서 건너간 불교가 식민통치 수단으로 역수입 된 것이므로 종교도 국력 앞에서는 무기력 할 수밖에 없다는 좋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주(註)


범종에도 1909년에 선응불관 화상(善應佛觀和尙)이 금강선사(錦江禪寺)를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병현(2001). 일제의 침략과 불교-일본 조동종의 武田範之와 圓宗. 한국사연구. 114. 93-118.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각 불교종파는 앞다투어 일본군대에 종군승을 파견하였다.

이 때 먼저 들어온 불교 종파 외에 본파 서 본원사(本派西本願寺)와 정토종(淨土宗)이 새로 추가되어 일본종파 사이에 경쟁적인 상황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1904년 노일전쟁 당시 일본불교의 각 종파는 종군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함과 아울러 한국의 불교계에 대한 침투활동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때 진언종(眞言宗), 조동종(曹洞宗), 임제동(臨濟宗) 등도 한국에 진출하였다.


본원사는 진종대곡파(眞宗大谷派)로 1900년에 군산에 지원(支院)을 설치하였고 5년 후에 거류지(居留地) 을(乙) 19호·20호에 본당을신축하였다. 군산사는 정토종(淨土宗) 사찰로서 거류지 밖 개복동에 있었으며 1906년 가을에 본당을 고지(高地)에 신축하였다. 

안국사는 일연종(日蓮宗) 사찰로서 1907년 신흥동에 당우(堂宇)를 건립하였다.

조기호(2003). 일본 근대말기의 장법(葬法)과 묘제(墓制) 관한 연구. 정토학연구. 6. 415-438.

단가제도는 에도시대(江湖) 기독교의 포교를 막기 위한 제도로서 당시 일본인이면 누구나 사찰의 단도(檀徒)가 되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단가(檀家)란 사찰의 경영을 받쳐주는 단위조직을 말한다. 또한 특정 집의 장례나 그 외 불교의례를 전담하는 사찰을 단나데라(檀那寺; 단나사)라고 한다. 이 사찰에서는 불교 의례를 전담해 주고 단가로 하여금 불공을 드리고 시주를 하게 하였으며, 매년 그 대가로 현금이나 곡식을 단가로부터 받도록 되어 있었다.

한편 일본 사찰에서는 단가 집단이 하나의 분묘를 공유하는 형태가 있었는데 사찰 내에 묘나 납골당을 설치하기도 했다.



(한·일 병합 1년 전) 일본인 승려 내전(內田, 우찌다) 불관(佛觀, 붓깐)이 금강선사

  (錦江禪寺)로 창건.

대웅전 및 요사 준공

범종 및 범종각 준공

대문 석주 준공

개축

해방 직후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

전북종무원에서 매입.

남곡 스님께서 동국사(동국은 "해동대한민국"의 준말로 우리의 절이란 뜻)로 개명

  하고,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로 증여.

등록문화재 제64호 등록(문화재청)

석가삼존불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213호 지정)


글 : 동국사 홈페이지 2019년 4월 23일 현재

http://www.dongguksa.or.kr/01/01-3.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