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세트의 너트 때문에
아침에 눈을 뜨면 몸은 숨긴 채 시간을 확인하는 버릇대로 핸드폰을 집어 드니 시간보다 먼저 ‘로켓배송’이라며 새벽 5시30분에 문 앞에 주문한 물건을 놔두었다는 문자가 눈에 뜨였다. 연말에 내가 뭘 주문한 기억이 없으니 연초에 배달될 물건도 없는데 문자가 잘못 왔나하고 현관문을 열었더니 작은 박스가 든 비닐봉지가 놓여있었고 송장 스티커엔 수신자로 내 이름과 함께 며느리 이름이 주문자로 적혀 있었다. 아마 며늘아이가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필요한 거라 판단하여 뭘 주문한 모양이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내용물에 대한 궁금증에 앞서 업체에서 비록 로켓배송하는 상품이라 해도 배달하시는 분들이 새해 벽두 해도 뜨기 전부터 고생을 많이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포장을 열어보니 싱크대에 설치되어 있는 수전세트였다. 아무리 경쟁력을 생각한 상술이라 해도 신선식품도 아닌데 이리 이른 시간에 배달되도록 한들 이런 물건을 새벽 5시30분에 가지고 들어와 급하게 설치할 사람들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뒤따랐다. 알림음을 크게 설정하였다 하더라도 그 시간에 문자를 확인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을 것 같은데 배달 시간까지 명기된 스티커에 택배원들이 얼마나 중압감을 느낄는지 짚어볼 볼 문제였다.
지난 반년가량 방향도 틀어지지 않고 접착제로 고정되어 싱크볼 코너에 붙어있는 시댁 수전꼭지가 새해에도 바뀌지 않을 것 같고 작년에 이 수전세트이야기를 할 때마다 바꾸지는 않고 핑계만 대던 시아비가 더는 미덥지가 않았음인지 사전 고지도 없이 무작정 새 세트가 배달되면 바꾸겠지 하고 벽두에 배달 되도록 주문한 모양이었다. 사실 내 집의 싱크대 수전세트는 헤드의 방향을 틀지 못하게 고정되어 있어 물을 사용하는데 좀 불편할 뿐 그것도 헤드와 연결된 호스를 뽑아 사용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스테인리스 강판 위에 멀쩡하게 잘 서있던 수전세트가 어느 날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만져보니 수전헤드를 잡아주는 헤드꽂이가 덜렁거리고 제대로 서 있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왜 그리 되었는지 싱크대 위아래를 살펴본즉 강판을 사이에 두고 싱크볼 위의 헤드꽂이가 꼿꼿이 서있도록 잡아주는 것은 강판 밑의 조임새인데 딱딱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이 조임새(너트)가 깨져 제구실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트의 다른 부분은 모두 멀쩡하니 그 너트 하나만 바꾸면 되겠다 생각하고 동네의 점포들 탐방에 나섰다. 그러나 세트 전체만 있을 뿐 어디에서고 부품만은 팔지 않았다. 싱크대맞춤 전문점이나 수전시설 전문점에 가서 물어도 세트 전체를 사거나 설치의뢰는 안 하고 너트 한 개만 요구하기 때문인지 돌아오는 대답은 “그거 하나만 파는 데는 없어요”였다. 인터넷도 모두 뒤졌지만 어디에도 그 플라스틱너트만 파는 곳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수전이 안 되도록 중요부위가 망가졌으면 전체를 바꾸어야 하겠지만 DIY시대라는 요즈음 그 간단한 부품너트하나 못 구해서 거액(?)을 들여 필요치 않은 본체와 연결호스 부분까지 모두 사야할까 하는 생각과 함께 예전 전화선 연결구 하나 구하지 못해 긴 선을 새로 구매하여야 했던 일까지 생각나 선뜻 세트 전체를 구매하지 않고 몇 달을 보냈다. 물론 며늘아이가 물어보면 늘 너트를 찾아보고 정 못 구하면 살련다“라는 대답과 함께.
건들거리고 덜렁거리는 걸 임시로 어찌 고정시킬까 생각하며 다*소라는 곳에 들러 뭐 좀 될 만한 것이 없을까 기웃대던 중 발견한 게 접착제였다. 손가락 굵기의 고무 같은 둥근 것을 주물러 주면 금속과 금속을, 수분이 있어도, 강하게 접착해 준다는 설명이 있었다. 개당 2,000 원이니 속는 셈 치고 시도는 해 봐야겠다 생각하고 접착에 임하였는데 하룻밤을 지내고 나니 그게 너트 역할을 톡톡히 해서 ‘접착해 놓은 거 떨어질 때 까지만 찾아보자’ 생각하고 버텼는데 작년 연말까지도 너트는 못 찾았지만 떨어지지도 않고 있어 해를 넘겼던 것인데 며느리 마음에 ‘아버님 댁에 수전세트 하나 보내드려야겠어요’ 라고 생각되었던 모양이었다.
설치를 마치며 ‘이 새 뭉치의 너트도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또 같은 현상이 일어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전세트에서 싱크볼 강판위의 무겁고 기다란 수전뭉치를 지탱해주며 가장 힘을 많이 받는 것은 강판 아래의 너트뿐인데 그 중요한 부품이 금속으로 되어있지 않고 깨지기 쉬운 플라스틱으로 되어있는 것이 아쉬운 점이었다. 헌 뭉치를 버리기 전 나중을 위해서 멀쩡한 헤드와 파킹 등을 챙겨 놓으면서 ‘너트는 어디서 구해야 하나’를 되뇌었다.
고맙다는 전화를 하며 며느리와 나눈 대화는
“새해 벽두 아침부터 강제로 시아비 일을 시키냐?”
“다 설치 하셨어요?”
“그냥 볼트 너트 세팅만 하면 되는데 뭘.”
“인터넷으로 주문하면서 보니 거기 여자들은 설치비가 더 들어갈 수 있으니까 설치에 자신이 없으면 사지 말라고 쓰여 있어 어려우면 어쩌나 했어요.”
“여자들에게 그런 말은 미투에 안 걸리냐?”
생활의 통상적인 일 외에 새해 들어 예기치 않게 찾아온 첫 번째 일이었지만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중을 위하여 그 너트는 꼭 구해 놔야겠다는 생각은 이 달에도 쭉 계속될 것이다.
2021년 1월 2일 첫 글
하늘빛
* 혹 어디서 그 너트를 구할 수 있는지 아시는 분 댓글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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