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주노초파남보
별로 볼 프로그램이 없는지 TV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던 집사람이 TV앞으로 나를 부르더니 쇼핑체널에서 진행자가 이야기하는 색이 무슨 색이냐고 묻는다. 방송에서 팔고 있는 옷 색깔을 묻는 것이었다. 물론 방송으로 보여주고는 있지만 천연색과 화면상에 보이는 색이 다를 수 있고 진행자가 알려주는 색은 화면 밖의 보통 사람들은 별로 쓰지 않기 때문에 낯선 색이름에 대하여 묻는 것이었다.
집사람이 가끔 보고 있는 그런 프로그램, 특히 섬유류 관련 프로그램에서 진행자들의 말을 곁다리로 듣고 있으면 난 늘 갑갑함을 느낀다. “컬러”, 칼라“, ”블루“, ”레드“ ”네이비블루“,”퍼플“, ”버건디“, ”와인“ 등등. ”빨주노초파남보“를 외운 내 세대에서는 참 불편하게 들린다. 염료와 염색 기술이 발달하면서 새로 생기는 색깔에도 모두 무리 말을 붙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색의 이름을 말하던 형용사를 섞어 쓰던 아니면 자연에서 나오는 특정한 이름을 빌리던 간에 색을 표현하는 말이야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진행자가 무조건적으로 소개하는 외국어 색깔 이름들이 기본적인 것 외에 모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사전을 찾아보면 별로 탐탁하지 않은 색이 나올 때도 있기 때문이다. 쉬운 우리말이 존재하는 기본적인 색들 조차에도 발음도 어려운 외국어를 줄줄이 엮어내려고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게 보일 때도 있다. 곧 빨주노초파남보는 뇌리에서 사라질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국물 내는 멸치가 필요하다하여 집사람과 대형마트에 동행하였다. 국물별치 할인한다는 팻말이 건어물 진열 칸에 붙었다. 그 앞에서 난 남이 보면 미소처럼 보이게 그러나 좀 씁쓸하게 슬쩍 웃었다. 멸치를 담은 큰 비닐봉투의 주된 제목은 맨 윗단에 커다랗게 영어로 인쇄된 ‘ANCHOVY’였다. 그 밑에 몇 줄 건너 좀 작은 글씨로 ‘국물 내는 멸치’라는 부제의 설명이 붙었다. 언제부터 우리가 국내용 멸치를 ‘ANCHOVY'라 부르고 한글에 앞서 영어로 그렇게 표기해 왔을까. 난 별로 기억에 없다. 오래전 미국 출장길에 누님집에 가져다드리느라 세관신고서에 써본 이래로 잊고 있었는데 얼마 전 TV프로그램에서 참석자들이 멸치젓갈을 이야기하던 중에 어느 연예인이 ’앤쵸비젓갈‘이라 말하는 것을 보고 “풋”하고 침 튀기는 웃음을 웃은 기억이 떠올랐다. 나이 많으신 내 누님은 늘 “메르치”라고 하셨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쳐온 누님의 일본식 우리말 발음인줄 알았더니 국어사전에는 여러 지방의 사투리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혹 세월이 흐른 후 사전에서 앤쵸비를 찾으면 멸치의 서양식 사투리로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
몇 년 전에 “세월이 흐르면 (어느 정도를 이야기 하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한 200년 정도?) 세상에 남는 언어는 5가지밖에 없을 것”이라는 어느 외국 언어학자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다섯 가지 언어에 한국어는 없었다. 속옷은 언더웨어, 운동화는 스니커즈, 바지는 팬츠, 생활은 라이프, 문화는 컬쳐 등등 줄줄이 외국어로 바꾸고 학교부근 아이들의 안전먹거리구역 조차도 ‘그린푸드존’이라는 억어지 용어를 가져다 붙이는 이 때에 이제 멸치까지 ‘앤쵸비’라고 한다면 우리말은 그 언어학자가 이야기한 그 때까지 살아 남을 수는 있을는지 걱정이 된다.
어지럽게 다양해진 세상에서 비록 한자어를 많이 섞어 쓴다 하더라도 우리말로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외래어라는 것을 쓴다. 나 또한 그 외래어를 쓰지 않고는 누구와도 대화를 잘 하지 못한다. 그러나 외래어나 외국어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외국인 우선이 아닌 다음에야 통상적으로 내국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면 한글이 우선적 표기가 되어야 하고 외국어표기는 부수적이 되어야 한다. 가끔 TV나 인터넷 뉴스에서 늘 누구나 사용하는 우리말 단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생소한 외국어를 쓰고는 그 뒤 괄호 안에 우리말 단어를 표기하는 것을 보면 ‘참 어렵게도 산다’라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는 요즈음 유행하는 외국어 단어 ‘매거진’보다는 “잡지‘가 더 읽을거리가 많은 것 같이 느껴지고 ‘힐링’보다는 ‘치유’가 더 정감 있게 치유용으로 다가옴을 느낀다. 나이 탓인가? 누군가 외국어 울렁증이 있냐고 물으면 어찌 대답해야 하나?
2021년 3월 23일
하늘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