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32> 낙산사종과 봉선사종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종(落山寺鐘, 1469)이나 남양주의 봉선사종(1469)은 장소와 크기는 조금 다르지만 흥천사종(興天寺鐘, 1462)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조선 왕실 발원 범종이란 공통점을 지녔다. 이 두 종은 공교롭게 같은 해에 만들어져 500년을 넘게 잘 보관되어 왔지만 낙산사종은 2005년 4월5일 식목일날 낙산사 산불과 함께 소실되어 그 원형을 잃고 말았다. 두 점 모두 쌍룡(雙龍)의 용뉴와 굵은 횡대로 나누어진 구획선, 종신 하단에는 파도문대를 둔 모습에서 앞서의 흥천사종을 계승한 점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종 모두 종신 상단에 보살입상이 배치되어 있으나 낙산사 종에는 연곽과 연뢰의 표현이 생략된 점이 이채롭다. 아울러 범자문이 종신 상단에 하나의 문양대로 장식된 점에서 새로운 변화가 느껴진다.
쌍룡의 용뉴와 하단 파도문대
흥천사종 양식 계승흔적 남아
종신 상단에 보살입상 배치해
범자문도 문양대로 장식 변화
◀ (구)보물 479호 낙산사종은 조선 1469년에 조성된 높이 158cm의 종에는 연곽과 연뢰표현이 생략돼 이채롭다. 안 타깝게도 이 종은 2005년 화재로 소실됐다.
낙산사종
비록 지금은 화재로 녹아 흉물스럽게 변해버린 낙산사종이지만 이 종이 지닌 원상을 살펴 그 가치를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낙산사종의 쌍용뉴는 종신에 비해 크게 묘사된 편인데, 하나의 몸체가 서로 뒤엉켜 머리를 반대로 두고 두 다리로는 불룩이 솟아오른 천판을 굳건히 밟고 있는 모습이 용맹스럽게 묘사되었다. 천판 조금 아래의 종신 상부 면에는 네모꼴로 조금은 도식화된 연판문대를 둘렀고 이 바로 아래에 광명진언(光明眞言)으로 보이는 양각의 굵은 범자문을 둥글게 돌아가며 배치하였다.
직선화된 종 몸체의 중단에는 3줄의 융기선 띠를 둘러 상, 하로 2분하였으며 상부 종신 면에는 우리나라 범종에 보이는 방형의 연곽과 연꽃봉우리가 전혀 표현되지 않았음이 독특하다. 대신 네 방향으로 보살입상을 1구씩 부조하였다. 이 보살입상은 조선 불화에 나타나는 도상을 충실히 따른 듯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합장한 채 두 발로 연화좌를 밟고 있는 자세이다. 머리 위에는 화관을 쓰고 뒤에는 둥근 두광이 둘러졌으며 양 어깨에 걸친 천의는 손목을 감싸며 유연하게 흘러내렸다.
이 보살상과 보살상 사이의 여백에도 범자문이 옆으로 4자씩 양각되었다. 이 보살상과 문양의 초본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명문에 기록된 화원(畵員) 김중경(金仲敬)과 이장손(李長孫)이다. 특히 이장손은 조선전기 미법(米法) 산수를 잘 그렸던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으로 세조의 어진을 그린 인물이었다. 그의 진품은 남아있지 않던 차에 이 보살상이야말로 이장손의 유일한 화적(畵籍)이었던 셈이어서 더욱 안타까움을 준다.
융기선 횡대 아래의 종신 하부 면에는 다음과 같은 양각 명문을 새겼다. ‘세조 12년(1466) 금강산 순행 길 중 낙산사에 이르러, 세조가 정희왕후와 세자(睿宗)와 함께 관음보살상에 예배하자 사리가 분신하고 오채가 빛나는 등의 서이(瑞異)가 일어났다. 이에 세조가 큰 서원을 내어 학열(學悅)에게 낙산사의 중창을 명하였으며 세자(睿宗)의 자복사(資福寺)로 삼아 백여 칸으로 중창하고 소용되는 것들을 갖추게 되었다. 예종이 즉위한 후 세조의 서원을 추념하여 낙산사에 범종을 주조하였으니(예종 1년, 1469) 이것은 곧 세조의 성덕을 예종이 이어받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 외에도 명문의 후반부에 제작에 참여한 조각장(彫刻匠), 각자(刻字), 주성장(鑄成匠), 주장(注匠), 노야장(爐冶匠), 목수(木手), 수철장(水鐵匠)의 분업 상황과 참가자 명단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종의 주성장인 정길산(鄭吉山), 이파회(李波廻), 오춘경(吳春敬) 등은 같은 해에 만들어진 봉선사종(奉先寺鐘)을 만드는데 다시 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종 역시 다른 조선 초기 범종과 마찬가지로 왕실의 발원에 의한 것이지만 처음부터 사찰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다르다. 한편 종구 쪽에서 조금 위쪽으로 올라와 파도문대를 둘렀다. 이 종은 중국 종 계열을 따른 유점사종(楡岾寺鐘)처럼 연곽과 연꽃봉우리가 생략된 점이 매우 독특하지만 같은 해에 만들어진 봉선사 종에서 다시 이러한 문양이 재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음(餘音)
현재 낙산사는 복구가 이루어져 옛 모습을 어느 정도 찾아가고 있으며 원래 있던 낙산사종을 그대로 복원한 새로운 종이 걸려 있다. 외관상으로는 비록 유사할지 모르나 낙산사종이 지녔던 500년의 장구한 소리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산불이라는 천재지변에 의해 사라지고 말았지만 이 종은 임진왜란과 병자의 양난은 물론이고 6·25의 전쟁을 거치고도 굳건히 견뎌온 조선 왕실의 역사적 편린이기도 하였다. 여기에 조선 최고의 화원인 이장손의 화적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는 점에서 그 아픔은 더 절실하다. 한번 사라진 문화유산은 결코 다시 살려내기 어렵다는 것을 타 버린 낙산사종은 우리에게 교훈으로 보여주고 있다.
[불교신문3399호/2018년6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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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67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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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8일 현재
낙산사 동종 (복원)
출처 : 낙산사 사이트 2014년 2월 8일 현재
http://www.naksansa.or.kr/web/home.php?go=naksan05_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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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16일 발췌
복원된 신 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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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26일 발췌
낙산사 동종’ 다시 울려퍼진다 지난해 산불 소실후 복원
작년 4월 산불로 녹아 사라진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의 동종(銅鐘)이 복원돼 돌아왔다. 낙산사는 16일 오후 동종을 전달 받아 화마에서 살아남은 보타락에 임시로 보관했다. 앞으로 종루(鐘樓)를 따로 마련해 보존할 예정이다.
보물 제479호였던 낙산사 동종은 작년 산불에 소실됐다. 문화재청은 그 후 불교미술·조각 예술·금속공예·보존과학 등의 분야별 전문가로 자문단을 구성해 복원을 추진해왔다. 그 결과, 충북 진천의 범종 제작업체인 성종사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인 주철장(鑄鐵匠) 보유자 원광식씨가 밀랍주조 공법으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
입력 : 2006.10.17 00:18 22'
복원된 낙산사 동종 안쪽면 보니…문화재청장 이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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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각사실 발견…유홍준 청장 “전혀 몰랐다” | |||
노형석 기자 | |||
지난해 산불에 녹아 사라졌다 1년6개월여 만에 복원된 강원 양양군 낙산사 동종 안쪽에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이름이 새겨진 사실이 드러났다.
낙산사 쪽은 지난 16일 복원한 동종을 절 안 누각 보타각에 설치하면서, 종 내부에 음각한 ‘낙산사 동종 복원기’에 유 청장의 이름도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17일 전했다. 절 주지 정념 스님은 “청장 이름을 종 내부에 새긴 것은 복원의 역사적 근거를 밝힌 것으로 이해한다”며 “실무자들에게 ‘국민의 정성으로 복원된 종’이라는 문구만 넣고 내 이름은 넣지 말라고 했는데, 오해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유 청장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담당 과장에게 보고받을 때까지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해명했다. 그는 “통상 기록을 남기려는 관행이었다고 말하길래, 당장 (이름을) 지우라고 지시했다”며 “책임자를 가려 특단의 조처를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문화재계 한쪽에서는 종 내부의 복원 기록 일부를 깎아내면 종소리에 나쁜 영향을 줄지 모른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연합뉴스 |
낙산사동종 복원기 논란에 대한 문화재청의 입장 |
낙산사동종 복원기에 문화재청장의 이름이 새겨져 논란이 있다는 2006년 10월 17~18일 중의 언론보도 내용에 대해 문화재청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2005년 4월 5일 강원도 양양군 일대의 대형 산불로 소실된 낙산사동종 복원은 문화재청에서 복권기금의 긴급보수비를 지원하여 추진되었으며, 시작에서 완성까지 관련분야 전문가로 자문단을 구성하여 고증과 기술자문을 거쳐 완성하였습니다. 논란이 되고 있는 동종 내부의 복원기는 최종 자문회의에서 최대한 간략하게 내부에 기록하자는 의견에 따라 작성을 위임받은 자문위원으로부터 제시된 문안을 문화재청에서 일부 자구수정 등 검토를 거쳐 확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산사 측에서 주장하는 ‘복원기에 누구의 이름도 넣지 않기로 자문단에서 합의하였다’는 내용은 사실과 다릅니다. 보도에 따르면 마치 문화재청이 합의 내용을 어기고 청장의 이름을 새겨넣은 것처럼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 자문회의의 의견에 따라 주관부서인 문화재청과 종을 주조한 기능보유자 원광식 종장의 이름을 명시하였고, 통상적인 관례에 따라 기관명 뒤에 ( )로 기관장 이름을 표시한 것입니다. 동종 내부에 새겨진 복원기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洛山寺 銅鐘 復原記 洛山寺 동종은 1469년 鑄成된 지 五百三十六年만인 二千五年 四月 五日 큰 火魔를 피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소실되었다. 이에 문화재청(廳長 兪弘濬)은 鐘의 原型復原을 위해 관계전문가의 자문과 고증을 받아 二千六年 十月 日에 복원을 완료하였다. 복원종은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인 元光植 鐘匠이 주조하였다. 또한, 보도내용상의 문화재청장의 이름을 지우기로 합의하였다는 내용도 사실과 다릅니다. 각종 문화재의 복원기나 중수기 혹은 상량문에는 주관관청(기관장) 및 공사에 관여(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이며, 이는 우리 사회의 소중한 전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문화재청에서는 통상의 관례에 따라 자문단에서 제시한 복원기의 내용을 일부 수정해서 반영한 것일 뿐 어떠한 다른 의도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경위에도 불구하고 청장 개인의 치적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된 행위로 오해받는다면 차라리 문화재청 표현을 지우는게 낫다는 담당자의 답답한 심정 표현이 있었다하나 이또한 그간 절차를 뒤바꿀만한 공식적 의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문화재청 내·외부 전문가의 신중한 검토와 논의를 거쳐 조만간 최종적인 입장을 표명하겠으며, 그에 기초하여 이후 다른 문화재의 보수정비과정에는 똑같은 사례 혹은 논란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확고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덧붙여 중대한 국가적 사안을 기록하여 후세를 위한 역사의 흔적으로 남기는 측면에서, 주무관서의 장과 주조한 장인의 이름을 새겨넣어 후손들이 당해 문화재의 연대와 가치, 그리고 그 시대의 사회상을 파악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도 문화재청의 중요한 책무라는 점을 양지하여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문화재청 동산문화재과장 연 웅 붙임 : (파일이름:낙산사동종 복원기 보도해명자료.hwp) |
등록일 : 2006.10.18 14:53: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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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25일 발췌
낙산사동종(洛山寺銅鐘)
한국미술전집 / 동화출판공사 / 1974.
설명 ▶조선시대. 높이 1.58m, 입지름 98cm, 寶物 479. 강원도 양양군 洛山寺藏.
한국종의 형식을 완전히 떠나 중국종에 가까워지고 있으나 조선시대 종으로서는 大作에 속한다. 이 종에서는 音筒. 乳廓. 乳가 모두 생략되었고 鐘身에는 중간에 굵은 隆起構帶를 쳐서 전체를 상하로 크게 구분하는 새로운 형식을 취하였다. 鐘肩에는 도식화된 연꽃을 빽빽이 돌리고 그 밑에 梵字 16字가 있고 다시 밑으로 상대하는 위치에 보륭상 4軀가 있고 그 사이에 梵字 4字씩이 옆으로 새겨 있다.
이에 대하여 構帶 밑에는 鐘口에서 간격을 띄어서 水波文이 陽鑄된 紋樣帶가 있고 構帶와의 사이에는 長文의 銘文이 陽鑄되었다. 정상에는 머리가 밖을 향한 두 마리 龍의 몸이 붙어서 꼭지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鐘치고는 조각이 비교적 우수한 편이다. 鐘身의 銘文 끝에 「成化五年己丑四月日」이라 있어 조선 세조 15년(1469)의 鑄成임을 알 수 있다.
출처 : http://www.sejon.or.kr/main/main_art.htm 2006년 10월 25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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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16일 발췌
수정 : 10/05/13 보물지정해제 (소실)-문화재청
낙산사 동종
산불로 소실되기 전 고향당 옆 종각에 보존되어있던 종으로 보물 제479호로 지정되었었다.
조선시대인 1469년(예종 1)에 낙산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세조를 위해 그의 아들인 예종이 만들게 한 범종이다.
이 범종의 양식을 보면, 종신(鍾身)은 중앙에 세 줄로 된 굵은 띠를 옆으로 돌려서 몸체를 위 아래로 구분했다. 보통의 범종에서는 띠 윗부분에 놓이는 유곽(乳廓)과 유두(乳頭)가 생략된 것이 특색이며, 그 자리에 보살상 4체를 양각했고, 그 사이에 범자(梵字) 네 글자씩을 역시 양각으로 배치했다.
보살상은 두광을 갖춘 채 연화좌 위에 서 있는 모습이다.
두광·보관(寶冠)·천의(天衣) 등의 표현이 모두 유려한 솜씨로 되어있다. 보살상 위와 종뉴 바로 아래에 있는 어깨띠〔肩部〕부분에는 또다시 범자 열여섯 자를 양각으로 돌아가며 배치했으며, 이 범자 위로 연잎 서른여섯 잎을 새겨 넣었다.
이 작품은 조선시대 범종 가운데 16세기 이전에 조성된 드문 예 가운데 하나로서, 당대의 범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크기는 전체 높이 158㎝, 입지름 98㎝이다. 동종은 옛 모습으로 복원되어 봉안될 예정이다.
2006년 10월 16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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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16일 발췌
* 수정 10/05/13 현재 문화재청 고시 보물해제 (화재소실복원)
이번 산불로 고통받고 있을 우리이웃들... ㅜ.ㅜ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이하의 스냅들은 낙산사와 문화재청의 협조를 받아 촬영해두었던 낙산사동종이다.
이제는 더이상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종. 이렇게 큰종이 녹아내렸다니 참으로 안탑깝다.
자료로 간직 하던건데 우리식구들에게 공개한다.
낙산사동종(洛山寺銅鐘) 이제는 사라진 보물 479호
큰 종으로는 조각수법이 뚜렷하고 모양이 아름다우며 보존상태가 좋아, 한국 종을 대표하는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종 꼭대기에는 사실적이고 기품 있어 보이는 용 2마리가 서로 등지고 있어 종의 고리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 부분에는 연꽃잎으로 띠를 둘렀다.
몸통에는 가운데 굵은 3줄을 그어 상·하로 나누고, 위로 보살상 4구를 새겼다. 보살상 사이사이에는 가로로 범자를 4자씩 새기고, 보살상 머리 위로는 16자씩을 새겨 넣었다. (그림왼쪽 윗쪽의 구멍2개는 6.25당시의 총탄자국이라고 합니다)
윗그림은 탁본작업입니다. 순서는 위서부터 아랫쪽으로...세척에서부터 먹을입히는 과정다음과 같은 기사내용에 눈물을 흘리고 전율한다.
"...불길이 낙산사로 번져 ‘낙산사 동종(보물 제479호)’이 종루와 함께 소실됐고 보물 제499호인 7층 석탑도 불에 탔다. 또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원통보전이 전소됐고 홍예문 누각이 소실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문화재청 연웅 동산문 화재과장은 이날 오전 “불에 탄 종루의 잔해를 헤치고 살펴보니 ‘낙산사 동종’의 종걸이 부분만 일부 남아있고 동체는 거의 모 두 소실됐다”고 밝혔다...."
이렇게 그림으로나마 볼 수 있어 다행. 은은한 동종소리가 귀에 선하다.
안타깝다.
출처 : http://cafe.naver.com/20050323/9 2006년 10월 16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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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13일 발췌
화재로 소실. 2008년 복원
출처 : | 한국역사문화기행회 2006년 10월 13일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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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洛山寺) 성화오년명(成化五年銘) 범종(梵鍾)(2-59, 3-45)
소재지(所在地) : 강원도(江原道) 양양군(襄陽郡) 강현면(降峴面) 전진리(前津里)
연 대(年 代) : 1469年(예종(睿宗) 원년(元年), 성화(成化) 5年)
지정번호(指定番號) : 보물(寶物) 第479號
실측치(實測値) : 총고(總高); 148cm, 용통고(甬筒高); cm, 상대폭(上帶幅); 8.5cm, 보살상(菩薩像); 고
(高) 37cm, 구경(口徑); 99cm, 종신고(鍾身高); 118cm, 용통경(甬筒徑); cm, 하대
폭(下帶幅); 9.5cm, 종구후(鍾口厚); 13.5cm, 용뉴고(龍鈕高); 30cm, 천판경(天板徑);
61cm, 유곽폭(乳廓幅); cm, 당좌경(撞座徑); cm
이 종(鍾)은 조선시대(朝鮮時代) 거종류(巨鍾類)에 속하는 것으로 봉선사(奉先寺) 성화오
년명종(成化五年銘鍾)보다 3개월(個月) 앞서서 주조(鑄造)되었으며 봉선사대종(奉先寺大鍾)
보다 더 중국(中國) 동종(銅鍾)의 양식(樣式)과 형태(形態)를 따르고 있다.
종정상(鍾頂上)은 반구형(半球形)의 천판(天板)을 갖추고 있으며 용뉴(龍鈕)는 쌍두일체
(雙頭一體)의 쌍용뉴(雙龍鈕)를 하고 있다. 한편 반구형(半球形)의 천판(天板)에서 흘러내린
종견(鍾肩)에는 단판(單瓣) 복연(覆蓮) 32엽(葉)으로 장식된 상대(上帶)를 구비하고 있는데
이와같은 형식(形式)은 조선시대(朝鮮時代) 특징(特徵) 중(中)의 하나이다.
종신(鍾身) 중앙(中央)과 종구(鍾口) 가까이에는 융기된 2조태선(條太線) 횡대(橫帶)와 1조
(條)의 태선횡대(太線橫帶) 등을 돌려 종신(鍾身)을 3구(區)로 구분하고 있는데 상구(上區)에
는 두광(頭光)을 갖춘 보살입상(菩薩立像) 4구(軀)를 일정 간격으로 대칭되게 배치하였다.
상대(上帶)의 복연대(覆蓮帶) 밑에는 12자(字)의 범자(梵字)을 장식하였고, 보살입상과 입상
사이에는 범자(梵字) 4자(字)씩 포함 16자(字)를 정연하게 배치하였다. 중앙(中央)의 2조태
선(條太線) 바로 밑인 중구(中區)에는 ‘成化五年乙丑四月 日’(성화오년을축사월 일)이 명기된
장문(長文)의 명문(銘文)이 전체를 메우고 있다.
이 명문(銘文) 밑의 하구(下區)에는 1조태선(條太線) 2개(個)를 11.5cm 일정 간격을 두고
돌렸고 그 사이의 공간을 하대(下帶)인 듯 파도문(波濤紋) 문양대를 돌려 장식하였으나 그
이하의 종구(鍾口)에 이르는 하구(下區)의 넓은 공간은 무문(無紋)으로 남겨 놓았다.
신라 동종이나 고려 동종에서 보이는 양식(樣式)이 완전히 사라진 조선시대 특유의 동종
으로 주조년대(鑄造年代)도 명문(銘文)에서 보이듯 ‘成化三年‘은 1469年에 해당되며 세조(世
祖) 15年,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간 한국의 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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