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조선의 종

사인비구 제작 인천 강화역사관 소장 강화 동종 (강화 범종) (보물 제 11-8호)

korman 2006. 10. 25. 21:14

(보완 혹은 수정)

 

강화 범종 (江華 梵鍾)

문화재명강화 범종 (江華 梵鍾)

지정사항 : 보물

소재지 : 인천광역시(仁川廣域市) 강화군(江華郡) 관청리(官廳里) 고려궁지(高麗宮址)

분류 :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의식법구

시대 : 조선 범종(朝鮮 梵鍾)

년대 : 1711年(숙종(肅宗) 11年, 강희(康熙) 50年)

 

요약정보

조선시대(朝鮮時代) 범종(梵鍾)의 특색(特色)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고 정상부(頂上部)는 반구형(半球形)으로 되어 있으며 중앙(中央)에 쌍두일체(雙頭一體)의 용뉴(龍?)를 갖추고 있다. 범종(梵鍾)의 견대부(肩帶部)에는 4cm 정도 비스듬히 내밀린 턱이 있는 것은 고려 후기 동종의 입상문(立狀紋) 장식의 퇴화 형식으로 보인다. 종신(鍾身)에는 중앙에 융기된 태선 (太線) 2조(條)의 횡대(橫帶)를 돌려서 상하(上下)로 양분(兩分)하였다. 상대부분(上帶部分) 의 4개소(個所)에 사다리꼴의 유곽을 배치하였는데 유곽문양은 약식화된 보상문양으로 장 식하였고 6엽(葉) 연화좌(蓮華座) 9유(乳)를 각각 갖추고 있다. 하대(下帶)에 당좌(撞座)없 이 장문(長文)의 명문(銘文)만이 양주(陽鑄)되어 있으며 이 명문(銘文)에서 범종(梵鍾)이 숙 종(肅宗) 37년(1711)에 주조(鑄造)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종구(鍾口) 가까이에 하대(下帶)로 보이는 곳에 문양대(紋樣帶)를 돌리고 있는데 보상화 문대(寶相華紋帶)로 장식하고 있으나 문양(紋樣) 자체가 상대문양(上帶紋樣)과 같이 약식된 문양대이다. 특히 상하대(上下帶)는 종신(鍾身)에 배해 좁은편이다. 전체적 형태는 조선시대 의 특색을 갖춘 범종의 하나이다.

 

실측정보

총고(總高); 186.5cm, 용통고(甬筒高); cm, 상대폭(上帶幅); 9cm, 유곽장(乳廓長); 36×33.5cm, 구경(口徑); 141cm, 종신고(鍾身高); 160cm, 용통경(甬筒徑); cm, 하대폭(下帶幅); 10cm 종구후(鍾口厚); 15cm, 용뉴고(龍?高); 26.5cm, 천판경(天板 徑); 78cm, 유곽폭(乳廓幅); 6.5cm, 당좌경(撞座徑); cm

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2022년 12월 22일 현재

https://portal.nrich.go.kr/kor/buddhistView.do?menuIdx=805&idx=14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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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동종

사인비구 제작 동종-강화 동종
(思印比丘製作 銅鍾-江華 銅鍾)
(Bronze Bell Cast by Buddhist Monk Sain)

 

사인비구 제작 동종 - 강화동종(思印比丘 製作 銅鍾 - 江華銅鍾)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강화역사박물관에 있는 조선시대의 종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1호로 지정되었다가, 2000년 2월 15일 사인비구 주성 동종 7구가 보물로 지정됨에 따라 보물지정번호변경], 문화재청장, 2000-02-18

 

종목: 보물 제11-8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수량: 1구, 시대: 조선시대, 소유: 공유

개요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1711년에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사인비구의 거의 말년에 해당되는 거의 말년에 해당되는 숙종 37년(1711)에 제작된 종으로, 높이 198cm, 입지름 138cm이다. 종 꼭대기에는 두마리 용이 좌우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종 윗면은 반원 모양으로 둥글고, 어깨 부분에는 ㄱ자형의 턱을 만들었다. 이것은 고려시대 꽃잎을 세워 장식하여 어깨부분이 돌출되었던 입상화문대에서 새롭게 변화시킨 모습으로 보인다.

어깨에서 훨씬 떨어진 곳에 사각형 모양의 연곽이 4곳에 있는데, 그 안에는 9개씩의 연꽃으로 된 돌기 연뢰(蓮蕾)가 있다. 몸통 중앙에는 중국 종 양식을 따른 굵은 2줄의 횡선을 둘러 상·하로 2등분하였다. 횡선 아래로는 종 입구 바로 위에 꽃무늬를 새긴 넓은 띠가 있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으며,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명문을 새겼다.

이 종은 전통적인 범종 양식을 계승 하였던 사인비구가 그의 말년에는 이처럼 중국 종 계열을 따른 범종을 제작하였다는 점을 밝혀주는 자료이다.

 

출처 : 위키백과 2022년 5월 7일 현재

https://ko.wikipedia.org/wiki/%EA%B0%95%ED%99%94_%EB%8F%99%EC%A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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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비구 제작 인천 강화 강화역사관 소장 동종 (보물 제 11-8호)

 

 

종 목 보물  제11-8호


명 칭 사인비구 제작 동종-강화 동종 (思印比丘製作 銅鍾-江華 銅鍾)분 류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의식법구수량/면적 1구지정(등록)일 1963.01.21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350-4번지 강화역사박물관시 대 조선시대소유자(소유단체) 공유관리자(관리단체) 강화군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1711년에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사인비구가 거의 말년에 해당되는 숙종 37년(1711)에 제작된 종으로, 높이 198㎝, 입지름 138㎝이다. 종 꼭대기에는 두마리 용이 좌우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종 윗면은 반원 모양으로 둥글고, 어깨 부분에는 ㄱ자형의 턱을 만들었다. 이것은 고려시대 꽃잎을 세워 장식하여 어깨부분이 돌출되었던 입상화문대에서 새롭게 변화시킨 모습으로 보인다.


어깨에서 훨씬 떨어진 곳에 사각형 모양의 연곽이 4곳에 있는데, 그 안에는 9개씩의 연꽃으로 된 돌기 연뢰(蓮蕾)가 있다. 몸통 중앙에는 중국 종 양식을 따른 굵은 2줄의 횡선을 둘러 상·하로 2등분 하였다. 횡선 아래로는 종 입구 바로 위에 꽃무늬를 새긴 넓은 띠가 있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으며,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명문을 새겼다.

 

이 종은 전통적인 범종 양식을 계승 하였던 사인비구가 그의 말년에는 이처럼 중국 종 계열을 따른 범종을 제작하였다는 점을 밝혀주는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우리지역문화재 검색창 2017년 3월 18일 현재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2&VdkVgwKey=12,001108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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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동종

• 코드: cp0501b00201 

 

• 명칭 : 강화동종 

 

• 지정 : 보물 제 11-8호 

 

• 조성연대 : 조선 숙종 37년(1711) 

 

• 제원 : 전체높이 198㎝, 입지름 138㎝, 입두께 15㎝, 무게 2490kg 

 

• 소재지 : 강화역사관 

 

• 관리자 : 강화역사관 

 

• 설명 

 

이 동종은 조선 현종∙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의 뛰어난 주종장(鑄鍾匠)이었던 사인(思印)스님이 만든 종 중에서 가장 크며, 조선시대에 강화성문(江華城門)의 여닫는 시간을 알리는데 쓰던 종이었다. 재질은 청동이다. 사인스님은 사원 세습으로 내려오던 승장(僧匠)의 맥을 이은 마지막 거장(巨匠)이며, 전통수법의 재현과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면서 창조적인 시각으로 자연을 조명하고 사실적인 표현으로 불교 공예미를 표출시킨 명장(名匠)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으며,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종 꼭대기에는 두 마리 용이 등을 맞대고 종을 매달기 위한 용뉴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음통은 없다. 종 윗면은 반원 모양으로 둥글고, 상대 위에는 ㄱ자형의 턱을 만들었다. 이것은 고려시대 꽃잎을 세워 장식하여 어깨부분이 돌출되었던 것의 변형된 모습으로 보인다. 

 

상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사각형의 연곽이 네 곳에 있는데, 그 안에는 아홉 개씩의 연꽃이 새겨져 있다. 전통적인 한국종의 형태에서 벗어나 몸통 중앙에는 굵은 2줄의 횡선을 둘러 상·하로 2등분하였다. 횡선 아래로는 하대로 꽃무늬를 새긴 넓은 띠가 있어 구연대(口緣帶)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주목되며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다. 이 무늬 띠와 가운데 옆 띠 사이의 넓은 공간에는 장문(長文)의 명문(銘文)이 돋을새김 되어 있는데 이 명문에는 주종(鑄鐘)과 개주(改鑄) 관계 등의 사실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후기 동종으로는 거종(巨鐘)에 속하며 전통적인 고려 종의 양식이 퇴화하고, 조선종의 새로운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종이 간결한 솜씨를 보이고 꾸밈이 없는 것은 조선시대 문화의 특징이라 하겠으며, 종신 중앙에 띠를 돌리는 수법은 고려시대까지의 종 만드는 장식과는 다른 점이다. 

 

현재의 종은 강화유수 윤지완(尹趾完)이 주조한 것을 그 후 유수 민진원(閔鎭遠)이 정족산성에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다시 주조한 동종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종(高宗) 3년(1866)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침입한 프랑스군이 종을 약탈하여 가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다. 

 

원래 고려궁터 진입로 옆의 김상용 선생 비각 자리에 있던 것을 1977년 고려궁터를 보수하면서 궁터 안으로 옮겨 보존하였으나, 1999년 12월에 강화역사관으로 옮겨 보존, 전시하고 있다. 

 

<자료참조 : 문화재청, 직지성보박물관, 사찰 홈페이지>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7년 12월 7일 현재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7&cp_code=cp0501&index_id=cp05010015&content_id=cp050100150001&search_left_menu=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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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21일 발췌

 

 

사인비구 제작 동종-강화 동종

 

소재지 : (417-871)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강화대로 994-19, 강화역사박물관

지정번호 : 보물 제11-8호

지정년월일 : 1963.01.21

관리자 : 강화군

소유자 : 국

규모 : 1기

 

강화 동종은 1711년(숙종 37)에 강화성문을 여닫을 때 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다. 처음에 1688년(숙종 14)에 강화유수 윤지완이 만들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 균열이 생겼기 때문에, 1711년 강화유수 민진원이 깨진 종을 녹이고 여기에 재료를 더하여 정족산성에서 다시 만들었다. 종래 이 종은 사인(思印)이 중심이 되어 만든 종으로 알려져 왔으나, 근래 명문을 상세히 판독한 결과 사인은 깨진 종을 만들 때의 주종장이었고, 다시 만들 때의 주종장은 조신(祖信)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높이 198㎝, 입지름 138㎝이다. 종 꼭대기에는 두 마리 용이 얼굴을 좌우로 향하여 몸이 서로 얽히어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종 윗면은 반원 모양으로 둥글고, 어깨 부분에는 ㄱ자형의 턱을 만들었다. 이것은 고려시대 꽃잎을 세워 장식하여 어깨부분이 돌출되었던 것의 변형된 모습으로 보인다. 어깨에서 훨씬 떨어진 곳에 사각형 모양의 유곽이 4곳에 있는데, 그 안에는 9개씩의 연꽃으로 된 돌기가 있다. 몸통 중앙에는 굵은 2줄의 횡선을 둘러 상·하로 2등분 하였다. 횡선 아래로는 종 입구 바로 위에 꽃무늬를 새긴 넓은 띠가 있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으며, 만든 시기를 알 수 있는 글이 남아 있다. 이 종은 전통적인 고려 종의 양식이 퇴화하고, 조선 종의 새로운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신대현,『전등사』한국의 명찰 시리즈 1, 대한불교진흥원, 2009.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중 문화와 사상, 강화군, 2003.
김형우·안귀숙·이숙희,『인천의 전통사찰과 불교미술』1,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2011.
강화군·강화문화원, 『강화금석문집』, 2006.
문화재청 홈페이지

출처 : 강화군청 문화관광 사이트 2014년 2월 21일 현재

http://www.ganghwa.incheon.kr/open_content/tour.do?act=detail&tour_no=8&img_no=1&keyWord=%B5%BF%C1%BE&keyField=tour_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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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자료 : 출처일 2009년 12월 28일 현재

 

 

종 목 : 보물 11-8호
명 칭 : 강화동종 (江華銅鍾)
분 류 : 동종류
수 량 : 1구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40 강화역사관내부
시 대 : 조선 숙종
소유자 : 인천광역시
관리자 : 강화군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사인비구가 숙종 37년(1711)에 제조한 종으로, 높이 198㎝, 입지름 138㎝이다. 종 꼭대기에는 두마리 용이 좌우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종 윗면은 반원 모양으로 둥글고, 어깨 부분에는 ㄱ자형의 턱을 만들었다. 이것은 고려시대 꽃잎을 세워 장식하여 어깨부분이 돌출되었던 것의 변형된 모습으로 보인다. 어깨에서 훨씬 떨어진 곳에 사각형 모양의 유곽이 4곳에 있는데, 그 안에는 9개씩의 연꽃으로 된 돌기가 있다. 몸통 중앙에는 굵은 2줄의 횡선을 둘러 상·하로 2등분 하였다. 횡선 아래로는 종 입구 바로 위에 꽃무늬를 새긴 넓은 띠가 있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으며, 만든 시기를 알 수 있는 글이 남아 있다. 이 종은 전통적인 고려 종의 양식이 퇴화하고, 조선 종의 새로운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2009년 12월 28일 현재

출처 : 네이트백과 131229현재

   

 제목 : 강화동종 원본보기

 

설명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고려궁지에 있는 조선의 범종. 보물 제11호.

이 종은 정상이 반구형으로, 용통이 없는 것이 특색이며, 종의 주조 연대는 1711년(숙종 37)이다.


출처 : Copyrigh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관련항목 : 강화동종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고려궁지(高麗宮址)에 있는 조선시대의 범종. 보물 제11호. 본래 경기도 광주 관청리의 도로변에 있던 것을 1977년에 현위치로 옮겼다. 이 종은 정상이 반구형이며, 그 중앙에 용뉴(龍鈕)가 붙었는데, 용뉴의 형태는 U자를 엎어놓은 모양에 양쪽에 용두가 붙은 쌍룡이다.

 

따라서 용통(甬筒)이 없는 것이 특색이다. 종견(鐘肩)은 입화식(笠花飾)이 퇴화된 전 같은 변죽을 돌리고 있다. 종신의 중앙에는 굵게 도드라진 두 줄의 횡선대(橫線帶)가 돌려져서 상하로 양분하였고, 윗부분에는 상대와 분리되어서 4개의 유곽(乳廓)이 배치되었다.

 

유곽대(乳廓帶)는 연주문 같은 둘레 장식이 전혀 없이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이 양주(陽鑄)되었고, 유곽 안에는 6판연화로 된 유좌(乳座)에 얕은 반구형인 9개의 유두(乳頭)가 표현되었다.

 

종신에는 당좌(撞座)가 없고 명문(銘文)만 주조되어 있으며, 하대에는 보상당초문으로 장식되었다. 주조된 명문에 의하면 종의 주조연대는 1711년(숙종 37)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고려종의 양식에서 퇴화하면서 조선시대 종의 특색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韓國鐘硏究(廉永夏,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4)
≪참고문헌≫ 朝鮮鐘(坪井良平, 角川書店, 1974)

 

출처 : 네이트백과 091229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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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자료 : 출처일 2006년 10월 25일 현재

 

 강화동종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강화역사관에 있는 조선시대 후기의 동종으로 보물 제11-8호이다.

 

이 종은 조선 숙종 14년(1688) 강화유수 윤지완이 주조한 것을, 숙종 37년(1711) 강화유수 민진원이 녹여서 정족산성에서 다시 만든 것이다.

 

이 종은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스님 사인비구에 의해 만들어진 사인비구주성동종(보물 11호) 8개 중 하나이다. 사인비구는 전통적인 신라의 종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가해 새로운 종을 만들었는데, 전해지는 작품이 모두 보물 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인다.

 

종의 꼭대기에는 두 마리 용이 몸을 얽힌채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고 그 아래에 종을 매달기 위한 공간이 있다. 윗면은 둥글며, 어깨에는 비스듬히 나온 턱이 있는데, 고려시대 동종에서 혼히 발견되는 입화형(立花形)이 퇴화된 것이다. 어깨에서 떨어진 곳에 꽃무늬로 장식한 4개의 유곽이 있고, 그 안에 연꽃 모양의 돌기가 9개씩 들어있다. 몸체의 가운데에는 가는 윗띠와 굵은 아랫띠를 돌려서 몸체를 위 아래로 구분하였다. 가운데 옆띠 아래에는 종을 처음 만들고, 다시 고쳐 만든데에 대한 기록이 양각 되어있다.

 

특징

 

우리나라 전통적인 종 과는 달리 맨 아래에 넓은 꽃무늬 띠를 돌린 것이 특징이다. 종을 만든 기록이 종의 아랫부분에 에 나타나 있지만, 어깨부분의 퇴화된 입화형 장식, 어깨로 부터 떨어져 있는 유곽, 용뉴에 음관이 없는 점, 등도 조선시대 후기의 종임을 나타낸다.

 

중량 2,490kg, 두께 15cm, 높이 198cm, 입지름 138cm 으로 조선시대 후기 동종으로는 큰 편이며, 사인비구의 작품세계와 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역사

 

고종 3년(1866년) 병인양요 때 침입한 프랑스군이 강화동종을 약탈하여 가려고 하였으나 무거워서 배에 싣지 못해 갑곶리의 토끼다리 근처에 놓고 돌아갔다고 한다.

 

강화산성 남문 동쪽의 종각에 있었고, 강화산성의 사대문을 열고 닫을 때 이 종을 사용했다. 김상용순의비 자리로 옮겼던 것을 1977년 강화중요국방유적복원정화사업으로 고려궁지의 강화부종각으로 옮겼다.

3.1절, 광복절, 제야에 33번씩 타종하던 것을 1995년1월에 몸통부분에 균열이 생기고, 치마부분이 떨어지자 타종이 중단 되었고, 1999년 12월에 강화동종과 모양과 크기가 같은 종을 강화부종각에 만들어 놓고, 강화동종강화역사관으로 옮겼다. 강화동종

 

 

출처 : http://www.kanghwado.net/YuMul/JongGyo/GangHwaDongJong/

 

2006년 10월 26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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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자료 : 출처일 2006년 10월 25일 현재

 

강화동종

보물 제 11호 
 현재 고려궁터 서쪽에 종각을 마련하여 걸어 놓았다. 원래 강화읍 관청리 고려궁 터 
(강화유수부)입구 동쪽 종각에 걸려 있으면서 강화 성문 여닫는 시각을 알리던 종이었 
다. 그런데 병인양호때(1866)프랑스군이 가져가려다가 갑곶에 버린 것을 강화읍내로 
옮겨 왔다가 1977년 강화 국방 유적 복원 사업때에 고려궁터로 다시 옮겼다. 강화 동 
종은 용으로 장식한 용뉴는 있으나 용통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종의 몸체는 어깨 부 
분 유곽대안에 9개의 연꽃을 새겨 넣었고 중앙은 두줄의 띠로 상하를 구분하였으며 
아래 종 밑부분에는 보상화문을 양각으로 주조했다. 명문에는 조선 숙종 37년(1771)에 
제작했다고 되어 있으며 높이 186.5m, 밑지름 141㎝이다. 이 종은 사찰의 범종으로서 
가 아니라 강화성의 종각에 걸기 위한 일반 종으로 주조되었다. 

출처 : http://mahan.wonkwang.ac.kr/culture/98fall/road14.htm  2006년 10월 26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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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江華) 범종(梵鍾)(2-90)

 

강화(江華) 범종(梵鍾)(2-90)

 

 소재지(所在地) : 인천광역시(仁川廣域市) 강화군(江華郡) 관청리(官廳里) 고려궁지(高麗宮址)

 연 대(年 代) : 1711年(숙종(肅宗) 11年, 강희(康熙) 50年)

 지정번호(指定番號) : 보물(寶物) 제(第)11호(號)

 실측치(實測値) : 총고(總高); 186.5cm, 용통고(甬筒高); cm, 상대폭(上帶幅); 9cm, 유곽장(乳廓長); 

 36×33.5cm, 구경(口徑); 141cm, 종신고(鍾身高); 160cm, 용통경(甬筒徑); cm, 

 하대폭(下帶幅); 10cm 종구후(鍾口厚); 15cm, 용뉴고(龍鈕高); 26.5cm, 천판경(天板 

 徑); 78cm, 유곽폭(乳廓幅); 6.5cm, 당좌경(撞座徑); cm

 

조선시대(朝鮮時代) 범종(梵鍾)의 특색(特色)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고 정상부(頂上部)는 반구형(半球形)으로 되어 있으며 중앙(中央)에 쌍두일체(雙頭一體)의 용뉴(龍鈕)를 갖추고 있다.

 

 범종(梵鍾)의 견대부(肩帶部)에는 4cm 정도 비스듬히 내밀린 턱이 있는 것은 고려 후기 동종의 입상문(立狀紋) 장식의 퇴화 형식으로 보인다. 종신(鍾身)에는 중앙에 융기된 태선(太線) 2조(條)의 횡대(橫帶)를 돌려서 상하(上下)로 양분(兩分)하였다. 상대부분(上帶部分)의 4개소(個所)에 사다리꼴의 유곽을 배치하였는데 유곽문양은 약식화된 보상문양으로 장식하였고 6엽(葉) 연화좌(蓮華座) 9유(乳)를 각각 갖추고 있다. 하대(下帶)에 당좌(撞座)없이 장문(長文)의 명문(銘文)만이 양주(陽鑄)되어 있으며 이 명문(銘文)에서 범종(梵鍾)이 숙종(肅宗) 37년(1711)에 주조(鑄造)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종구(鍾口) 가까이에 하대(下帶)로 보이는 곳에 문양대(紋樣帶)를 돌리고 있는데 보상화문대(寶相華紋帶)로 장식하고 있으나 문양(紋樣) 자체가 상대문양(上帶紋樣)과 같이 약식된 문양대이다. 특히 상하대(上下帶)는 종신(鍾身)에 배해 좁은편이다. 전체적 형태는 조선시대의 특색을 갖춘 범종의 하나이다.

 

출처 :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간 한국의 범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