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조선의 종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 동종 (南陽州 奉先寺 銅鍾)(보물 제397호) (봉선사대종)

korman 2007. 1. 21. 19:42

[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32> 낙산사종과 봉선사종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종(落山寺鐘, 1469)이나 남양주의 봉선사종(1469)은 장소와 크기는 조금 다르지만 흥천사종(興天寺鐘, 1462)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조선 왕실 발원 범종이란 공통점을 지녔다. 이 두 종은 공교롭게 같은 해에 만들어져 500년을 넘게 잘 보관되어 왔지만 낙산사종은 2005년 4월5일 식목일날 낙산사 산불과 함께 소실되어 그 원형을 잃고 말았다. 두 점 모두 쌍룡(雙龍)의 용뉴와 굵은 횡대로 나누어진 구획선, 종신 하단에는 파도문대를 둔 모습에서 앞서의 흥천사종을 계승한 점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종 모두 종신 상단에 보살입상이 배치되어 있으나 낙산사 종에는 연곽과 연뢰의 표현이 생략된 점이 이채롭다. 아울러 범자문이 종신 상단에 하나의 문양대로 장식된 점에서 새로운 변화가 느껴진다.

 

쌍룡의 용뉴와 하단 파도문대

흥천사종 양식 계승흔적 남아

종신 상단에 보살입상 배치해

범자문도 문양대로 장식 변화

보물 397호 봉선사종은 1469년에 조성됐다.

   높이 238cm 종 상단에는 보살입상이 새겨졌는데(아래 사     진) 세조와 예종의 어용화사 이백련 작품으로 세련미가 낙     산사종을 능가한다.

 

봉선사종

 

경기도 남양주군 봉선사(奉先寺)에 소장된 봉선사종은 낙산사종이 만들어진 같은 해에 그보다 약 3개월 뒤에 만들어진 종이다. 그러나 원 낙산사종보다 훨씬 큰 238cm로서 앞서 만들어진 보신각종, 흥천사종에 이어 3번째로 큰 조선시대 종이다. 종명에는 ‘세조의 덕과 공로를 찬탄한 후에, 세조가 재위 14년(1468)에 돌아가심에 그 뒤를 이은 예종이 광릉(光陵)에 장사지내고 광릉 곁에 원찰인 봉선사를 세운 뒤 종을 만들기를 명하였다’는 내용을 기록하였다. 일반적인 종과 달리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종을 만들었다는 내용은 이미 통일신라의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 神鍾, 771)에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그러한 전통이 계승되어 세조의 공덕과 그를 이어받을 예종의 업적을 후세에 길이 남기기 위한다는 명문을 남기고 있다. 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왕실의 기념비적인 상징물로서 이러한 종을 만들고 종명을 쓰는 것은 낙산사 종의 명문에도 나타나 있어 조선 전기 왕실의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의지를 불사에까지 동원한 시대적 배경을 보여준다.

 

불룩이 솟아오른 천판 위로는 음통 없이 두 마리의 역동적인 쌍용으로 구성된 용뉴와 그 주위로는 각이 진 복판의 연화문이 상대(上帶)처럼 둘러져 있다. 그 아래의 종신 상단부분에 1줄의 횡대를 두르고 종의 몸체 중단쯤에 다시 3줄의 융기 횡대가 둘러져 상하부로 나뉘도록 구성되었다. 이를 중심으로 상부에는 사방에 9개씩의 연뢰가 장식된 연곽대와 그 사이마다 1구씩 도합 4구의 합장한 형태의 보살입상을 조각하였다. 보살상의 광배 좌우에는 각각 ‘옴’자의 범자문과 연곽대 하부마다 ‘옴마니반메훔’이라는 6자의 육자광명진언(六字光明眞言)을 양각시켰다. 일체의 죄를 소멸한다는 의미를 지닌 육자광명진언은 고려시대 오어사종(吾魚寺鐘, 1216)에서 처음 문양으로 등장되었으며 조선시대 봉선사종으로 계승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이후 만들어진 종에는 진언의 수가 점차 줄어들거나 ‘옴’ 자 한자만으로 생략되어 점차 간략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종 몸체의 중단 융기선 띠와 종구의 하단에서 약간 위로 치우쳐 하대(下帶)처럼 표현된 문양띠 사이로는 긴 내용의 명문이 양각되었다. 그 아래의 문양띠 안에는 파도문을 빽빽하게 시문하였다. 낙산사종을 만들었던 정길산, 이파회, 오춘경 등이 동일한 주조 장인으로 기록되었고 나머지 조역들도 일부 같은 인물이 보이는 점에서 낙산사종을 주조한 인력이 거의 그대로 동원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화원은 이백련(李百蓮)이라는 새로운 인물로 바뀌었다. 이백련역시 세조와 예종의 어용화사(御容畵師)를 지냈던 도화서 화원이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보살상의 모습은 낙산사종과 약간의 차이점이 느껴지며 오히려 세련미에서는 낙산사종을 능가한다. 이처럼 조선전기 왕실 발원의 종 제작에는 도화서 내의 최고의 화원들이 직접 참여한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들에게 밑그림을 맡겼다는 것은 가장 최상의 전문가 집단을 활용하여 왕실 발원을 제작하였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잘 말해준다.

 

봉선사종은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대형 범종 가운데 형태가 안정되고 세련된 문양과 보살상이 정교하게 표현된 대표적인 걸작으로 평가된다.

 

 

[불교신문3399호/2018년6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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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67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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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봉선사 동종 (南陽州 奉先寺 銅鍾)(보물 제397호) (봉선사대종) 

 

봉선사 대종

 

• 코드: cp0501b02901 

 

• 명칭 : 봉선사대종 

 

• 지정 : 보물 제 397호 

 

• 조성연대 : 조선 예종 원년(1469) 

 

• 제원 : 전체높이 236㎝, 종신 176㎝, 입지름 154㎝, 입두께 23㎝ 

 

• 소재지 : 봉선사 

 

• 관리자 : 봉선사 

 

• 설명 

 

1469년에 세조 비인 정희왕후(貞喜王后)가 봉선사를 창건하면서, 선왕(세조)의 추복을 위해 주성한 종이다. 조선 초기 왕실발원으로 제작한 종 가운데 가장 완성도 높은 종으로 평가받고 있다. 재질은 청동이며 주종장은 정길산이다. 

 

음통이 없으며 쌍룡이 서로 등진 모양의 용뉴를 가진 전형적인 조선종의 모습이며, 천판에 머리를 가까이 댄 쌍룡의 모습은 구조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다. 연판무늬를 장식한 귀꽃과 종신 사이에는 이중의 가로줄을 돌려 몸통 부분과 구분 짓고 있으며, 종 가운데는 굵고 가는 3가닥의 가로줄을 그어 몸통 부분을 상·하로 나누고 있다. 

 

줄 윗부분에는 사각형의 연곽과 보살상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4개의 연곽은 천판에서 분리되어 당초문으로 장식하고 그 안에 연화위의 연뢰 9개를 갖추고 있다. 연곽과 연곽 사이에는 원형두광(圓形頭光)을 갖추고 양손을 마주 잡은 보살입상 4구가 돋을새김 되어 있다. 보살의 광배 좌우에는 ‘옴’자를 두고 연곽 아래로 새롭게 옴마니반메훔의 육자대명왕진언을 첨부하였다. 후덕한 상호에 우아한 자태를 간직한 보살상은 천의자락이 신체를 따라 가볍게 흘러내리고, 머리에 쓴 보관과 몸에 걸친 영락은 화려하면서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하대 문양 아랫부분에는 강희맹이 짓고 정난종이 글씨를 쓴 장문이 새겨져 있다. 글에는 종을 만들게 된 연유와 만드는데 관계된 사람, 즉 화원(畵員), 주성장(鑄成匠), 조각장(彫刻匠), 주장(注匠), 각자목수(刻字木手), 노야장(爐冶匠), 수철장(水鐵匠), 사령(使令) 등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어서, 대대적인 공사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 종의 입구 위쪽으로 넓은 띠가 있는데 그 안에는 파도무늬를 뒤집어 놓은 듯 위로 잔물결이 이는 모습인데 일렁이는 물결 표현이 자연스럽다. 

 

고려시대에 비해 종 입구가 넓어진 형태나 몸통에 있는 가로 띠와 조각수법 등은 조선시대 나타난 새로운 양상으로, 양식의 형식 규명 등 조선 전기 동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큰 종이다. 

<자료참조 : 문화재청, 직지성보박물관, 사찰 홈페이지>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7년 12월 7일 현재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7&cp_code=cp0501&index_id=cp05010041&content_id=cp050100410001&search_left_menu=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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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31일 현재


남양주 봉선사 동종 (南陽州 奉先寺 銅鍾)
(봉선사대종)





    
                


종 목 보물  제397호
명 칭 남양주 봉선사 동종 (南陽州 奉先寺 銅鍾)
분 류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의식법구
수량/면적 1구
지정(등록)일 1963.09.02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봉선사길 32, 봉선사 (부평리)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봉선사
관리자(관리단체) 봉선사

남양주 봉선사 동종(南陽州 奉先寺 銅鍾)은 임진왜란 이전에 만든 것 중 몇개 남지 않은 조선 전기의 동종으로 예종 원년(1469) 왕실의 명령에 따라 만들었다.

높이 238㎝, 입지름 168㎝, 두께 23㎝로 꼭대기에는 용통이 없고 두 마리 용이 서로 등지고 종의 고리 구실을 하는 전형적인 조선종의 모습이다. 종의 어깨에는 이중의 가로줄을 돌려 몸통 부분과 구분짓고 있으며, 종 가운데는 굵고 가는 3중의 가로줄을 그어 몸통 부분을 상·하로 나누고 있다.

줄 윗부분에는 사각형의 유곽과 보살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아랫부분에는 강희맹이 짓고 정난종이 글씨를 쓴 장문이 새겨져 있다. 글에는 종을 만들게 된 연유와 만드는데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어서, 대대적인 공사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 종의 입구 위쪽으로 넓은 띠가 있는데 그 안에는 당시에 유행하던 파도치는 모양이 사실적으로 잘 표현되었다.

고려시대에 비해 종 입구가 넓어진 형태나 몸통에 있는 가로 띠와 조각수법 등은 조선시대 나타난 새로운 양상으로, 그 특징들이 잘 나타난 중요한 큰 종이다.



출처 : 문화재청 사이트 2014년 1월 31일 현재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3970000,31


2008년 10월 17일 현재 문화재청 자료


종목 : 보물  제397호소재지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55 봉선사지정일 : 1963.09.02시대 : 조선시대소유자 : 봉선사관리자 : 봉선사 봉선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이다. 969년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창건하여 운악사라 하였다. 그 후 1469년(예종 1) 정희왕후(貞熙王后) 윤씨가 광릉(光陵)의 세조를 추모하여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라고 하였다.

1551년(명종 6)에는, 교종(敎宗)의 수사찰(首寺刹)로 지정되어 여기서 승과시(僧科試)를 치르기도 하고, 전국 승려와 신도에 대한 교학(敎學)진흥의 중추적 기관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여러 번 수축했으나, 1951년 6 ·25전쟁 때 다시 법당과 함께 14동 150칸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화엄(華嚴)이 56년 범종각을, 1961~1963년에 운하당(雲霞堂)을 세우고, 1969년에는 주지 운허(耘虛)가 법당을 중건하고, 1977년에는 월운(月雲)이 영각(靈閣)을 세웠다. 절 종각에 보존되어 있는 동종(銅鐘)은 조선 전기의 것으로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선사대종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의 몇 개 안 되는 조선(朝鮮) 전기(前期) 동종(銅鐘)의 하나로, 성화(成化) 5년(1469)인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왕실(王室)의 명령에 따라 주조(鑄造)된 종이다.종의 형태는 정상(頂上)에 음관(音管)이 없는 쌍룡(雙龍)으로 용뉴(龍유)를 나타내고, 종견(鐘肩)에는 겹연꽃잎을 돌렸다. 그 바로 밑으로 도드라진 2가닥의 옆띠를 돌려서 몸체와 뚜렷이 구분하였다. 종의 몸체 중앙에는 굵고 가는 3가닥의 옆띠를 돌려 위아래로 구분하였다. 윗부분에는 유곽(乳廓)과 보살상(菩薩像)을 교대로 배치하였는데 4개의 유곽은 종견에서 분리되어 당초문으로 장식되고 그 안에 연화(蓮華)로 된 화좌유(華座乳) 9개를 갖추고 있다. 이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원형두광(圓形頭光)을 갖추고 양손을 마주 잡은 보살입상 4구(四軀)가 양각(陽刻)되어 있다. 또한 유곽 밑과 중앙의 옆띠 사이 공간에는 범자(梵字)가 4자씩 새겨져 있고, 보살상의 위아래, 네 귀퉁이에도 같은 형식의 범자가 새겨져 있다. 종구(鐘口)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파도문(波濤文)으로 장식한 아래띠와 비슷한 옆띠를 돌렸다. 그리고 이 옆띠와 중앙의 3가닥 옆띠 사이에 강희맹(姜希孟)이 짓고 정난종(鄭蘭宗)이 글씨를 쓴 장문(長文)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이명문으로 주종(鑄鐘) 연유와 화원(畵員), 주성장(鑄成匠), 조각장(彫刻匠), 주장(注匠), 각자목수(刻字木手), 노야장(爐冶匠), 수철장(水鐵匠), 사령(使令) 등의 인명(人名)이 열기(列記)되어 대대적인 주종공사였음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이 종은 조선 전기 동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동종이며, 양식의 형식 규명에 상당한 중요성을 갖는 대종이다.
문화재청자료 2008년 10월 17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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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27일 현재

成化 5年(1469), 청동, 전체높이 235.6cm, 종높이 176.0cm, 입지름 154.0cm, 주종장 정길산,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 보물 제397호

1469년에 세조 비인 정희왕후貞喜王后가 봉선사를 창건하면서, 선왕(세조)의 추복을 위해 주성한 종이다. 조선 초기 왕실발원으로 제작한 종 가운데 가장 완성도 높은 종으로 평가받고 있다.

봉선사 종은 3개월 전에 완성된 낙산사 종과 형태와 문양이 비슷하지만 크기가 커지고 용뉴는 종신에 비례가 맞게 적절한 크기도 제작되었다. 천판에 머리를 가까이 댄 쌍룡의 모습은 구조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다. 견대의 연판무늬를 장식한 귀꽃은 낙산사종보다 화려해지고 보살상 옆에 다시 등장한 연곽은 흥천사 종에서 보았던 유려한 당초무늬로 조각되어 있다. 보살의 광배 좌우에는 ‘옴’자를 두고 연곽 아래로 새롭게 옴마니반메훔의 육자대광명진언을 첨부하였다. 후덕한 상호에 우아한 자태
를 간직한 보살상은 천의자락이 신체를 따라 가볍게 흘러내리고, 머리에 쓴 보관과 몸에 걸친 영락은 화려하면서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하대 문양은 낙산사종에서 보았던 파도무늬를 뒤집어 놓은 듯 위로 잔물결이 이는 모습인데 일렁이는 물결 표현이 자연스럽다. 종신의 명문은 강희맹姜熙孟이 짓고 글씨는 정난종鄭蘭宗이 썼다.
  2007년 3월 27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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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富坪里)의 봉선사에 있는 조선 전기의 동종.

지정번호 보물 제397호
소재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富坪里)의 봉선사
시대 조선전기
크기 높이 238 cm, 입지름 168 cm, 두께 23 cm, 무게 2만 5000근
종류 동종

정상에는 쌍룡(雙龍)으로 된 꼭지가 있고, 어깨에는 복판(複瓣)의 연꽃무늬가 돌려져 있다. 종신은 중간에 세 줄기의 굵은 융기횡선(隆起橫線)을 쳐 상하로 구분하였으며, 윗부분에는 당초문 장식이 있고 안에 9유(九乳)를 갖춘 4각 유곽(乳廓) 4구(區)와 그 사이에 장신의 보살상 4구를 교대로 배치하였고, 상하에 범자(梵字)를 양주(陽鑄)하였다. 아랫부분에는 종구(鐘口)에서 훨씬 올려서 수파문대(水波文帶)를 돌리고 그 위의 공간에는 명문(銘文)이 꽉 차 있다.

일부에 고식(古式)을 남기고 있으나 한국종 형식을 떠난 새로운 양식이다. 종명(鐘銘) 끝에 ‘成化五年七月 日’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1469년(예종 1)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대종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의 몇 개 안 되는 조선(朝鮮) 전기(前期) 동종(銅鐘)의 하나로, 성화(成化) 5년(1469)인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왕실(王室)의 명령에 따라 주조(鑄造)된 종이다.

종의 형태는 정상(頂上)에 음관(音管)이 없는 쌍룡(雙龍)으로 용뉴(龍유)를 나타내고, 종견(鐘肩)에는 겹연꽃잎을 돌렸다. 그 바로 밑으로 도드라진 2가닥의 옆띠를 돌려서 몸체와 뚜렷이 구분하였다. 종의 몸체 중앙에는 굵고 가는 3가닥의 옆띠를 돌려 위아래로 구분하였다. 윗부분에는 유곽(乳廓)과 보살상(菩薩像)을 교대로 배치하였는데 4개의 유곽은 종견에서 분리되어 당초문으로 장식되고 그 안에 연화(蓮華)로 된 화좌유(華座乳) 9개를 갖추고 있다. 이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원형두광(圓形頭光)을 갖추고 양손을 마주 잡은 보살입상 4구(四軀)가 양각(陽刻)되어 있다. 또한 유곽 밑과 중앙의 옆띠 사이 공간에는 범자(梵字)가 4자씩 새겨져 있고, 보살상의 위아래, 네 귀퉁이에도 같은 형식의 범자가 새겨져 있다. 종구(鐘口)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파도문(波濤文)으로 장식한 아래띠와 비슷한 옆띠를 돌렸다. 그리고 이 옆띠와 중앙의 3가닥 옆띠 사이에 강희맹(姜希孟)이 짓고 정난종(鄭蘭宗)이 글씨를 쓴 장문(長文)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이명문으로 주종(鑄鐘) 연유와 화원(畵員), 주성장(鑄成匠), 조각장(彫刻匠), 주장(注匠), 각자목수(刻字木手), 노야장(爐冶匠), 수철장(水鐵匠), 사령(使令) 등의 인명(人名)이 열기(列記)되어 대대적인 주종공사였음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이 종은 조선 전기 동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동종이며, 양식의 형식 규명에 상당한 중요성을 갖는 대종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
2008년 5월 24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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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25일 현재


 소속사찰 : 봉선사(奉先寺)

 현주소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55번지

 사찰내 위치 : 범종각 내부

 창건연대 : 조선중기

 양식설명 : 이 종은 전체적으로 종신의 폭이 좁고 정상에는 음통이 없이 용뉴만 있다. 용뉴는 쌍룡이 양쪽 머리를 서로 반대방향으로 돌렸는데 꽉 다문 입과 코, 머리위의 뿔등이 웅건한 모습이다. 종신의 윗부분에는 4개의 유곽과4인의 보살상이 교대로 배치되었고, 그 상하 여백에는 범자(梵字)를 새겼다. 보살상은 정교하고 가는 선으로 양각한 보관과 천의, 각종 장식구들이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비단 범종의 양식만이 아니라 조선 초기 조각사를 살피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종신의 중앙에는 3개의 굵은 선을 양각하여 구획을 나누고 그 아래에 명문을 가득 적었다. 종신의 아래부분에는 2개의 선을 둘러 하대를 이루고 이 안에 파도문양을 새겼다. 종신의 맨 아래 부분에는 종을 치는 당좌가 없어 타종의 흔적이 하얗게 남아 있다. 봉선사 동종은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하였다. 종신에 가득 새긴 명문에는 조성에 관여한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 등이 나열돼 있어 금속공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종명은 당대에 시·문·서·화의 4대가로 불리던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짓고 명필로 손꼽히던 정난종(鄭蘭宗, 1433∼1489)이 써 그 문장의 아름다움과 글씨의 유려함이 극치를 이룬다.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었으며 크기는 높이 230㎝, 입지름 168㎝, 두께 23㎝.
 
출처 : 부다피아 2007년 1월 25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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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26일 현재

 

봉선사대종(奉先寺大鍾)

한국미술전집 / 동화출판공사 / 1974.
설명 ▶조선시대. 높이 2.38m, 입지름 1.68m, 寶物 397. 경기도 양주군 奉先寺藏.
조선시대 銅鐘으로는 최대의 巨作이다. 이 종의 鑄成이 洛山寺 銅鐘과 같은 해이고 鐘銘의 書者도 같으며, 형식 또한 洛山寺 鐘에는 乳廓이 없음이 다를 뿐 같은 사람의 제작이라고 하여도 좋을 정도로 같다. 정상에는 雙龍으로 된 꼭지가 있고 어깨에는 도안화된 연꽃이 돌려 있다.
鐘身은 중간에 3條의 굵은 隆起構線을 쳐서 상하로 구분하고 上區에는 唐草文으로 장식하고 안에 9乳를 둔 方形 유곽 4區와 그 사이에 長身의 보륭상 4軀를 교대로 배치하고 상하에 梵字를 陽鑄하고 있다. 下區에는 鐘口에서 훨씬 올려서 水波文帶를 돌리고 그 위 공간에는 銘文이 꽉 차 있다. 일부에 古式을 남기고 있으나 한국종 형식에서 떠나 새로운 양식이 나타난 종이다. 鐘銘 끝에 「成化五年七月 日」이라고 있어 이 종이 조선 세조 15년(1469) 洛山寺 종보다 3개월 뒤에 鑄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http://www.sejon.or.kr/main/main_art.htm 

2006년 10월 26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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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사(奉先寺) 성화오년명(成化五年銘) 범종(梵鍾)(2-58, 3-44)

 

소재지(所在地) : 경기도(京畿道) 남양주군(南楊洲郡)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연 대(年 代) : 1469年(예종(睿宗) 원년(元年), 성화(成化) 5年)

지정번호(指定番號) : 보물(寶物) 제(第)397호(號)

실측치(實測値) : 총고(總高); 230.5cm, 용통고(甬筒高); cm, 상대폭(上帶幅); 16.2cm, 유곽장(乳廓長); 51 

×45.5cm, 구경(口徑); 154cm, 종신고(鍾身高); 189cm, 용통경(甬筒徑); cm, 하대 

폭(下帶幅); 13cm, 종구후(鍾口厚); 21cm, 용뉴고(龍鈕高); 41.5cm, 천판경(天板徑); 

97cm, 유곽폭(乳廓幅); 5.5cm, 당좌경(撞座徑); cm 

 

조선시대(朝鮮時代) 종(鍾)으로는 흥천사(興天寺) 범종(梵鍾)․보신각(普信閣) 범종(梵鍾)․낙산사(洛山寺) 범종(梵鍾)들과 더불어 거종(巨鍾)에 속하며 고려말(高麗末) 제조(製造)하여 유행(流行)하였던 개성(開城) 남문누상(南門樓上)에 걸려있는 광복사(廣福寺) 범종(梵鍾)의 중국(中國) 범종양식(梵鍾樣式)과 형태(形態)를 따르고 있다.

 

종정상(鍾頂上)에는 일체(一體) 쌍두(雙頭)의 용뉴(龍鈕)를 갖추고 있으며 천판(天板) 역시 반구형(半球形)으로 처리하였다. 종신(鍾身)에는 전통적(傳統的)인 한국범종(韓國梵鍾)의 상대(上帶)와 하대(下帶)가 없어진 대신(代身)에 조선(朝鮮) 전기(前期) 범종(梵鍾)들에서 보이는 특유(特有)의 형식(形式)를 갖추고 있다. 2cm 정도(程度)의 태선(太線) 일선(一線)을 상하(上下) 12.5cm폭으로 돌리고, 이 12.5cm의 공간대에 특색있는 복연(覆蓮)을 돌려 견대(肩帶)를 이르고 있고 이 밑으로 3.7cm의 간격을 두고 횡대(橫帶) 1조(條)를 돌리고 있다.

 

종복(鍾覆)에도 1.5cm, 3cm, 1.5cm 굵기의 3조(條) 횡대(橫帶)를 돌려 종신(鍾身)은 상하(上下)로 구분(區分)하게 하였으며 상단(上段)에는 견대(肩帶)와 분리된 유곽(乳廓)을 4개소(個所)에 배치하였다. 당초문으로 장식된 유곽대에는 4cm정도 폭의 팔판단엽(八瓣單葉)의 반원(半圓)돌기 화좌유(花座乳) 구유(九乳)를 배치하고 있다. 4개소(個所)의 유곽(乳廓)과 유곽(乳廓) 사이에는 원광(圓光)을 갖추고 연화좌 위에 보살입상(菩薩立像)을 배치하고 있다.

 

보살입상(菩薩立像)의 보관, 의문 등은 전부 양각(陽刻)의 선조(線彫)로 표현(表現)하였으며 원형(圓形)의 두광(頭光) 좌우(左右)에는 1자(字)씩과 유곽 밑에 6자(字)씩의 범자(梵字)가 굵게 양주(陽鑄)되어 있는 것이 주목(注目)된다. 종복(鍾覆)의 3조(條) 횡선대(橫線帶)에서 하대(下帶)로 보이는 곳까지의 42.5cm의 공간대에는 ‘成化五年 七月…’로 시작(始作)되는 장문(長文)의 명문(銘文)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밑으로 조선시대 특유의 파도문이 13cm 정도의 좁은 하대(下帶)로 있다. 이 하대(下帶) 밑에서 명구(銘口)에 이르기까지의 넓은 공간은 무문(無紋)으로 남아 있다.

 

전체 동종(銅鍾)의 양식(樣式)은 유곽을 구비하고는 있으나 전통적인 한국 범종의 양식 형태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식과 양식에 의한 동종이다. 주조연대(鑄造年代)도 성화오년(成化 五年)의 종명(鍾銘)으로 보아 세조(世祖) 15年, 예종(睿宗) 원년(元年)(1469)에 주조 되었음을 알 수 있고 낙산사(洛山寺) 범종(梵鍾)보다 3개월(個月) 늦게 제작되었음도 알 수 있으며 장문의 명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출처 :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간 한국의 범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