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고려의 종

해남 대흥사의 탑산사동종 [塔山寺銅鐘]-대흥사 보관 (보물 제88호)

korman 2006. 11. 17. 00:30

탑산사명 동종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 대흥사에 있는 동종이다. 

전체 높이는 78.6㎝, 몸체 길이 57.5㎝, 

입지름 44㎝이다.
소재지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대흥사길 400

문화재지정번호보물 : 제88호

제공 : 해남군청

저작권 : 대흥사

출처 : 대흥사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1233년연표보기 - 탑산사명 동종 제작
문화재 지정 일시 1963년 01월 21일연표보기 - 탑산사명 동종 보물 제88호로 지정
현 소장처 대흥사 성보박물관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구림리 799]지도보기
원소재지 탑산사 - 전라남도 장흥군 대덕읍 연지리 탑산사
성격 범종
재질 동
크기(높이,길이,너비) 78.6㎝[높이]|57.5㎝[몸체 길이]|44㎝[입지름]
소유자 대흥사
관리자 대흥사
문화재 지정 번호 보물 제88호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 대흥사에 있는 고려시대 범종. 

 

[개설] 

탑산사명 동종(塔山寺銘銅鍾)은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 대흥사에 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범종으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88호로 지정되었다. 동종은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불교 공예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식 법구로 금고·운판(雲版)·목어와 함께 불전사물(佛前四物)의 하나이다. 지옥 중생을 제도하는 불구이다. 대중을 모으거나 때를 알리기 위하여 타종하는 실용적인 기능도 지니고 있다. 

 

[형태] 

탑산사명 동종의 전체 높이는 78.6㎝, 몸체 길이 57.5㎝, 입지름 44㎝이다. 

 

[특징] 

탑산사명 동종은 종 윗부분의 천판 위에 부착된 용뉴(龍紐)는 정교하고 생동감 넘치는 용두(龍頭)를 표현하였다. 불을 내품는 듯 입을 크게 벌리고 입술은 앞으로 쑥 내밀고 위·아랫니는 한껏 드러내었다. 왼뺨 부근에서 지름 31㎝의 여의주를 발바닥으로 받들고 있다. 반대쪽 발은 천판을 내디뎠다. 용머리 뒤쪽의 음통(音筒)은 상·중·하 삼단으로 구분하여 당초무늬를 꾸몄다. 어깨 부분에 연판 무늬를 촘촘히 세워 입체적으로 표현한 입화식(立花飾)이 장식되는 것은 고려 후기 동종의 특징이다. 상대(上帶)와 하대(下帶)에는 위아래로 연주무늬를 돌리고 안은 화려한 당초무늬로 마감하였다. 상대 밑에 이어서 구획된 네 개의 연꽃봉우리 울타리에는 당초무늬 연주문대(連珠紋帶)가 돌려져 있고 안에 아홉 개의 연꽃봉우리가 가로와 세로 세 줄씩 솟아 있다. 연꽃봉우리 울타리와 당좌 가운데인 몸체 중간 부분에는 네 구의 보살상을 배치하였다. 보살상은 연화대좌 위에 앉은 구름 위의 극락을 연상케 한다. 이중두광과 신광 밖으로 화염이 표현되었다. 사방에 한 개씩 모두 네 개의 원형 연화문 당좌(撞座)를 마련하였다. 하대 가까이에 배치된 원형의 연주문대 안에 여덟 잎 겹꽃의 연화무늬를 두르고 중심부에는 열두 개의 작은 연밥과 한 개의 큰 연밥을 배치하여 연자방을 표현하였다. 탑산사명 동종은 표면이 마치 잘 관리된 가마솥처럼 검으면서도 매끄러운 점이 특징적이다. 종의 몸체에는 보살상 아래에 선각된 명문 ‘계사시월일탑산사화향도(癸巳十月日語山鄕 資福[塔山]寺火香徒)’와 보살상 옆 다섯 곳에 점각으로 추기된 명문 ‘계사만력이십일년십이월일(癸巳萬曆二十一年十二月日)’이 있다. 

 

[금석문] 

탑산사 동종에는 두 종류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하나는 고려시대에 선각된 ‘계사’ 명문이고 다른 하나는 점각으로 후대에 추가로 기록한 ‘만력이십일년’ 명문이다. 고려시대 계사 명문은 “계사년[1233년 추정] 10월에 어산향 자복사의 화향도 상현, 지장 등과 어비호장 임중산 등이 함께 발원하여 80근짜리 쇠종을 만들었다[癸巳十月日語山鄕 資福[塔山]寺火香徒上玄智 長朩(等)於非戶長任仲山朩(等)同愿 金鍾入重捌拾斤印].”라고 하였다. ‘자복’ 명문 위의 ‘탑산’은 뒤에 동종이 탑산사로 이전된 뒤 추가로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어산향은 장흥도호부의 남쪽 15리[약 6㎞]에 있던 행정단위로 천관사와 가까운 거리로 어산향 자복사가 천관사로 추정된다. 탑산사 동종은 장흥 천관산 탑산사와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조선시대 기록인 『지제지』에 장흥 탑산사에서 실물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지제지』 탑산암 조]. 조선시대 만력이십일년[1593년(선조 26)] 명문은 “임란왜변으로 인하여 총통을 주성하기 위해 탑산사 종을 취해 깨뜨려 만들기 위해 동철을 모아서 바쳤다[癸巳萬曆二十一年十二月日仍爾*變銃筒鑄成及塔山寺鍾取來破造故同鍾今銅鉄收合入納].”라고 하였다. 여기서 한자 爾는 倭로 볼 수도 있다. 『지제지』 탑산암 조에 “동종(中鐘)은 무게가 8,000근으로 종에다 새기기를 임진왜변(壬辰倭變)에 탑산암(塔山菴) 종을 가져다가 총통(銃筒)을 지어 부었다.”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동종에 새긴 명문으로 해석상 논란의 소지가 다분하다. 

 

[현황] 

탑산사 동종은 원래 전라남도 장흥군 대덕읍 연지리에 있던 탑산사의 종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해남읍 내 일본 헌병수비대에 보관되다가 수비대가 철수된 후에 만일암(挽日庵) 등을 전전한 뒤에 현재는 대흥사 성보박물관에 전시 보존되고 있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88호로 지정되었다. 안내판이 설치되어 문화재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고 감시 장치[CCTV]를 설치하여 보호 관리하고 있다. 관리 주체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이다. 

 

[의의와 평가] 

탑산사 동종은 신라시대 범종의 형식을 계승한 중형의 종으로 문양을 새기고 꾸미는 방법이나 모양 형식 수법이 매우 섬세하고 옛 수법을 잃지 않은 고려 후기 대표적인 종의 하나이다. 신라 동종의 전통적인 모습에 고려 후기에 새롭게 나타난 특징들을 잘 보여 준다. 또한 주조 상태가 양호하고 조각 솜씨도 수준이 높아 고려시대 불교 공예품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지식연계]

출처 : 디지털해남문화대전 2020년 5월 12일 현재

http://haenam.grandculture.net/haenam/toc/GC0730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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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27> 탑산사명 종

 

완벽한 주조와 섬세한 명문 돋보이는 고려후기 대표작

역동적으로 표현된 용뉴 ‘걸작’

 

종신 중단 4면에 새겨진 보살상

화려한 보관 쓰고 경권 든 모습

생동감 있게 걸쳐진 천의 자락

 

양감 넘친 연화대좌 표현까지

고려후기 가장 뛰어난 보살상

 

◀ 해남 대흥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탑산사명 종은 보물 88호      로, 고려 1233년 조성됐다.

 

앞서 소개된 부안의 내소사종(來蘇寺鐘, 1222년)과 함께 고려후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가 현재 대흥사(大興寺)성보박물관에 소장된 탑산사(塔山寺) 종이다. 내소사종이 고려 후기 종 가운데 가장 화려하면서도 세련됨을 갖춘 수작이라 한다면 이 종은 높이가 79cm로 크기가 좀 작지만 장식성에서 단연 돋보이는 아름다운 종이다. 전체적으로 검은 색조를 띠고 있는 것은 어떤 이유에선지 골고루 산화된 것으로 보인다.

 

종 주조시 주석의 함량이 높으면 주조된 후 표면이 매끄럽고 문양이 잘 나오는 장점이 있지만 타종 시 파손이나 종소리 면에서는 그리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반영하듯 이 종은 전체적으로 매끈한 표면과 문양도 섬세하게 잘 표현되었으며 어느 한 곳 손상된 부분이 전혀 없이 완벽한 상태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내소사종과 유사하면서도 그보다 도식화된 느낌이 강하여 고려 후기 범종에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선 역동감 넘치게 조각된 용뉴는 그 입을 크게 벌려 앞을 바라보고 있으며 오른쪽 발은 천판 위로, 왼발은 음통 옆에 들어 크고 둥근 보주를 날카로운 발 사이에 올려놓은 모습이다.

 

용두의 얼굴은 솟아난 양 귀와 크게 부릅뜬 눈, 깊게 뚫린 코가 인상적이다. 앞으로 굴곡을 이루며 길게 뻗친 윗입술과 아랫입술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표현되었다. 또한 머리 위로 두 개의 뿔이 솟아있으며 S자로 굴곡을 이룬 목에는 비늘과 갈기까지 세밀히 묘사되었다.

 

굵은 음통은 위, 아래 두 단으로 나누어져 각 마디에 유려한 연당초문을 섬세하게 조각하였고 목옆에서 뻗어 나온 크고 화려한 불꽃 모양의 갈기(焰翼)가 조각되었다. 다만 고려후기 종의 음통 상부에 많이 표현되는 작은 보주 장식은 생략되고 대신 구연부를 밖으로 살짝 외반 시켜 처리한 점이 다르다. 고려시대 전기의 용뉴와 비교하여도 전혀 손색없는 고려 범종 가운데서도 역동적인 모습이 잘 살아있는 용뉴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 당좌.

 

상대 위로는 오각형의 연잎으로 장식된 입상화연판문대가 높게 돌출되면서 정연하게 둘러져 있다. 상, 하대와 연곽대에는 그 바깥을 연주문대로 구획하였고 내부에 유려한 굴곡을 이루며 사실적으로 묘사된 모란당초문을 시문하였다. 상대 아래 붙은 방형의 연곽 내부에는 9개씩의 연뢰를 배치하였는데, 6엽 사이로 간엽이 표현된 화려한 모습의 연판문과 그 중앙에 둥근 봉우리를 살짝 돌출시킨 모습이다. 이 연곽 아래마다 배치된 4개의 당좌는 하대 쪽인 아래로 약간 치우쳐 있는 모습에서 내소사 종이나 다른 13세기 범종의 양상과 유사하다. 가장 내부에는 이중원으로 두른 국화형 자방이 있다.

 

자방 안에는 1+4+8개의 연과를 배치하였고 자방 바깥으로 화려한 장식이 가미된 8엽의 연판과 간엽을 두른 뒤 그 외곽을 연주문대의 원권으로 두른 조금은 도식화된 당좌이다. 이러한 당좌는 특히 13세기 중엽의 당좌에 거의 동일한 형태로 사용되고 있어 당시 문양판이 계속 반복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 당좌 위 연곽과 연곽 사이에 해당되는 종신 중단에는 이중의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보살상을 네 면에 동일하게 부조하여 역시 같은 문양판을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보살상의 상호는 뚜렷치 않지만 머리 위로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있으나 한손에는 경권(經卷)을 든 것 같은 독특한 도상을 취하였다. 이 도상적 특징을 지닌 보살상의 존명(尊名)에 관해서는 앞으로 좀 더 규명이 필요할 것 같다. 특히 몸 위로 굴곡을 이루며 생동감 있게 걸쳐진 천의 자락과 양감 넘친 연화 대좌의 표현은 고려후기 보살상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조형감을 보여주어 이 종을 제작한 주조 기술자는 물론이고 문양과 보살상을 초본한 화원(畵員) 역시 당시에 매우 뛰어난 기량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한쪽 보살상 아래로는 서툰 글씨로 음각명을 새겨 놓았는데, ‘계사십월일낙산면, 탑산사화향도상현지, 장목어비호장주(?)중산촌동원, 금종입중팔십근인 (癸巳十月日落山面, 塔山寺火香徒上玄智, 長木於非戶長住(?)仲山寸同愿, 金鍾入重捌拾斤印)’로 읽혀진다. 명문 가운데 계사년(癸巳年)은 특히 용뉴와 입상연판문대의 형상이 내소사 종과 매우 유사하면서 세부 문양이 섬세한 점으로 미루어 그와 비슷한 1233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연호 대신 간지를 쓴 것은 몽고의 침입과 전란의 과정을 겪게 되는 정우(貞祐)년간(1213~1216) 이후부터 13세기 후반까지 년호의 사용이 어려웠던 이유로 보이며 실제로 이 시기 불구류에는 간지(干支)만 기록한 경우가 많다. 여기에 ‘계사십월일 아래 ▨산면’과 ‘탑산사’의 명문 부분을 잘 관찰해보면 원래의 글자 위에 다시 지금의 명문을 새긴 점이 확인된다. 이 종의 명문을 소개한 츠보이 료헤이(坪井良平)는 <조선종(朝鮮鐘)>에서 이 부분을 낙산면(落山面)으로 판독했으나 이는 관산면(冠山面)의 오독이다. 아울러 원래 ‘▨산면의 ▨▨사’로 새겨졌던 명문을 일부러 탑산사로 바꾼 것이라기보다 처음 새긴 명문이 잘 보이지 않아 선명하게 위에 다시 새긴 것으로 판단된다.

 

탑산사 아래 부분은 향도, 호장의 직책을 지닌 발원자가 팔십근을 들여 만든 금종(金鐘)이란 내용이며 인(印)은 고려시대 명문에 많이 등장되는 종결 어미이다. 여기에 덧붙여 당좌 주변을 돌아가며 조선시대에 추각된 긴 명문을 새긴 것이 주목되는데, ‘만력이십일년십이월일내▨변총, 통주성어탑산사종취래파, 조▨▨종▨동철수합입납, 반본사상철물대시주(萬曆二十一年十二月日乃▨変銃, 筒鑄成於塔山寺鍾取來破, 造▨▨鍾▨銅鐵收合入納, 返本寺上鐵物大施主)’ 의 내용 아래로는 철물을 시주한 것으로 보이는 많은 인명을 세세히 기록하였다. 점을 찍어 명문을 새겨 넣어 일부는 잘 판독되지 않지만 주된 명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만역21년인 1592년 12월에 탑산사종을 거두어 총통을 만들려 하였으나 대신 동철을 모아 시주하여 종을 다시 반환받았다는 것임을 밝히고 여기에 참여한 시주자 명단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전란이 일어났을 때 범종을 녹여 병기나 화포로 만들려 했다는 기록이 계룡산 갑사(甲寺) 종(1584)에도 남아있어 당시의 범종도 사찰에서 공출 대상이 된 사회상을 반영해 준다. 명문을 낙산면(落山面)으로 오독한 츠보이 료헤이와 달리 탑산사의 위치가 관산면(冠山面)에 있었다는 것은 권상노(權相老)가 편찬한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 탑산사(塔山寺) 항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병지제지(幷支提誌)’에서 인용한 탑산사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확인된다. ‘탑산암 즉 탑산사, 재전라도 관산면 천관사산내, 재아육탑동하곡, 천해대사대우기운, 당덕종정원십육년신라애장왕이년경신, 통영화상소창야…(하략)’ (塔山庵 卽 塔山寺, 在全羅道 冠山面 天冠寺山內, 在阿育塔東河谷, 天海大師大愚記云, 唐德宗貞元十六年新羅哀莊王二年庚申, 通靈和尙所刱也…(下略)’ 이를 통해 탑산사는 원래 탑산암으로 전라도 관산면 천관사 산내에 있었던 절이며 주변 동쪽 계곡에 아육왕탑이 있어 당 덕종 정원16년인 신라 애장왕 2년인 800년에 창건되었다는 내용이다.

 

◀ 생동감있게 표현된 보살상

 

추각명에도 탑산사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까지는 유지되어 오다가 이후 어느 시기쯤 폐사된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탑산사 종은 현재의 장소에 보관되기 전 일제 강점기 때까지 해남 읍내에 있던 헌병 수비대에 있던 것이 수비대가 철수하면서 인근 사찰인 만연암 등을 전전하다가 지금의 대흥사로 옮겨지게 된 것이라 전해진다. 그러니까 원래 전라도 관산면 탑산사에서 1233년에 만들어졌던 이 범종은 1592년 종을 녹여 총포가 될 뻔 했던 것을 많은 시주자들이 대신 철물을 시주하여 그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게 되었으나 절이 폐사된 이후 다시 여러 장소를 전전하다가 지금의 대흥사로 안착한 많은 사연을 지닌 종이다.

 

고려 13세기 전반인 1233년에 만들어진 이 탑산사종은 완벽한 주조와 섬세한 명문이 돋보이는 고려 후기 범종의 중요한 작품이다. 오래 전부터 이미 보물 88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불교신문3377호/2018년3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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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64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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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대흥사의 탑산사동종 [塔山寺銅鐘]-대흥사 보관 (보물 제88호)

▲ 탑산사명 동종

▲ 탑산사명 동종(塔山寺銘 銅鍾) 

▲ 용뉴

 

종 목 보물  제88호
명 칭 탑산사명 동종 (塔山寺銘 銅鍾)
분 류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의식법구
수량/면적 1구
지정(등록)일 1963.01.21
소 재 지 전남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 대흥사 (구림리)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소유단체) 대흥사
관리자(관리단체) 대흥사

고려 시대 만들어진 높이 79㎝, 입지름 43㎝의 종으로 신라 형식을 계승하면서 고려시대에 새로 나타난 특징들을 잘 보여준다.

종 꼭대기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 있고, 매다는 곳인 용뉴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부분에는 연꽃으로 띠를 둘렀고, 그 아래는 덩굴무늬를 새겼다. 사각형의 유곽 안에는 가운데가 돌출된 연꽃을 9개 두었는데, 신라 때의 유두보다 훨씬 납작해진 모습이다.

종의 몸체에 있는 글과 양식으로 보아 종의 제작시기는 고려 명종 3년(1173)이나 고려 고종 20년(1223)으로 추정된다.

전체 형태는 상원사 동종을 연상시킬 만큼 아름다운 선을 갖고 있으며, 각종 조각 수법이 빼어나 고려시대 걸작으로 손꼽힌다.

 

출처 : 문화재청 홈 페이지 2016년 8월 17일 현재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08800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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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산사 동종

 

• 코드: cp0501b01801 

• 명칭 : 탑산사동종 

• 지정 : 보물 제 88호 

• 조성연대 : 고려 명종 3년(1173) 또는 고종 20년(1233) 추정 

• 제원 : 전체높이 79㎝, 종신 57.5㎝, 입지름 43㎝ 

• 소재지 : 해남 대흥사성보박물관 

• 관리자 : 해남 대흥사성보박물관 

• 설명 

 

신라종의 형태를 계승하여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세부 조각도 뛰어나 고려시대 종 중에 걸작으로 꼽힌다. 재질은 청동이다. 몸체에 비해 용뉴가 매우 발달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크고 뾰족한 이빨과 혀를 드러내 놓으면서 앞을 주시하고 있어 매우 정교하고 박력이 있으며 생동감이 넘쳐 흐른다. 용두 앞으로 뻗은 왼발에는 여의주를 갖고 2개의 화염무늬(火焰文)는 음통을 감싸고 있다. 음통은 3단으로 구분하여 각단마다 당초문(唐草文)을 장식하였으며, 천판(天板)과 상대가 만나는 곳에는 섬세하게 처리한 연판을 촘촘히 세운, 화불이 새겨진 입상대(立狀帶)를 설치하였다. 입상대에 화불을 새기는 것은 조선시대 종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일인데 고려시대 종으로는 특이한 예라 하겠다. 

 

상대는 덩굴무늬를 새겼으며, 사각형의 연곽 안에는 중판(重瓣) 육엽(六葉) 연화문(蓮華文)에 가운데가 돌출된 9개의 연뢰를 배치하였는데, 신라 때의 연뢰보다 훨씬 납작해진 모습이다. 

 

종신에는 연화문 당좌(撞座) 4개와 화염광배를 갖추고 구름연화좌에 앉은 보살상(菩薩像) 4구를 상∙하 교대로 배치하였는데 마모가 심하여 정확한 자세나 표정은 알 수 없다. 이 종은 용뉴에서부터 당좌에 이르기까지 그 문양의 조식(彫飾)방법이 매우 섬세한 종이다. 

 

종신에 있는 명문(銘文) 중 '계사년(癸巳年)'에 대하여 지금까지 여러 가지 해석을 하고 있으나 종의 형태와 양식으로 보아 명종(明宗) 3년(1173)이거나 고종(高宗) 20년(1233)으로 추정된다. 특히 1222년에 주조된 내소사고려동종과 비교할 때 1233년에 주조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전체 형태는 상원사동종을 연상시킬 만큼 아름다운 선을 갖고 있으며, 각종 조각 수법이 빼어나 고려시대 걸작으로 손꼽힌다. 이 종은 원래 장흥군 대덕읍 연지리에 있던 탑산사의 종이었으나 일제 때 해남읍내 일본헌병수비대에 있었으며 수비대가 철수된 후 만일암(挽日庵) 등을 전전하다가 현재 대흥사성보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자료참조 : 문화재청, 직지성보박물관, 사찰 홈페이지>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7년 12월 6일 현재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7&cp_code=cp0501&index_id=cp05010030&content_id=cp050100300001&search_left_menu=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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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11일 발췌

  • 명      칭  : 탑산사동종(塔山寺銅鍾)
  • 종      류  : 청동/범종
  • 분      류  : 보물  제88호
  • 지 정 일  : 1963. 1. 21
  • 수      량  : 1개 높이 79cm, 입지름 43cm
  • 소 재 지  :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9
  • 시      대  : 고려시대
  • 소 유 자  : 대흥사 /  관 리 자  : 대흥사

탑산사 동종(塔山寺 銅鐘)

대흥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고려시대범종이다. 높이 79cm, 입지름 43cm이다. 본래 탑산사(塔山寺)에 있었던 종으로서, 일제강점기에 만일암(晩日庵)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보존되어 오고 있으며, 일명 대흥사 동종이라고 한다. 종의 상부 천판위에 부착되어 있는 용뉴(龍紐)는 정교하게 처리되어 매우 사실적이고 박력있는 용두(龍頭)를 갖추었고, 앞으로 힘있게 뻗은 왼편 발에는 여의주를 잡고 있는 등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바로 옆의 음통(音筒)은 표면을 상·중·하 3단으로 구분하여 당초무늬를 장식했다. 어깨부분에는 연판무늬를 촘촘히 세워 입체적으로 표현한 입화식(立花飾)이 장식되어 있어 고려 후기 동종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상대(上帶)와 하대(下帶)에는 위아래로 연주무늬를 돌리고 그 안에는 화려한 당초무늬를 장식했다.

 

상대 밑에 배치된 4개의 유곽(乳廓) 역시 안쪽에 당초무늬가 장식된 연주문대(連珠紋帶)가 돌려져 있고 9개의 유두(乳頭)가 솟아 있으며, 유곽 사이의 몸체 중간부분에는 4구의 보살상이 있다. 보살상은 각각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데, 형태를 이루는 선들이 부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 세련되지 못한 조각수법을 보여준다.

4개의 당좌(撞座)는 유곽 밑으로 구연부 가까이에 있는데, 원형의 연주문대 안에 8엽 중판의 연화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종의 몸체에는 주조 당시의 명문 '계사시월일탑산사화향도'(癸巳十月日塔山寺火香徒)와 추가된 명문 '만력이십년기해십이월일'(萬曆二十年己亥十二月日)이 있다.

 

이 명문만으로는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지만 계사라는 간지명과 명문을 근거로 1233년(고종 20)에 주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동종은 신라종의 형식을 계승한 중형(中型)의 종으로, 문양의 조식방법이나 양식수법이 매우 섬세하고 고조(古調)를 잃지 않은 고려시대 대표적인 종으로 특히 종신에 있는 '계사(癸巳)'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내려지고 있으며, 타종할 수 있도록 종각에 걸려있지 않고 나무로 된 받침 위에 놓여 있다

 

출처 : 대흥사 홈페이지 성보박물관 09/11/11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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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26일 발췌

 

 癸巳(1233년 추정), 청동, 전체높이 77.8cm, 종높이 57.5cm, 입지름 43.0cm, 대흥사성보박물관, 보물 제88호
전체적인 종의 형태는 신라종의 형태를 계승하여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세부 조각도 뛰어나 고려시대 종 중에 걸작으로 꼽힌다. 몸체에 비해 용뉴가 매우 발달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뾰죽한 이를 드러내 놓으면서 앞을 바라보고 있는 용은 매우 박력있으며 생동감이 넘쳐 흐른다.


당좌는 4좌이며 당좌 사이마다 보살상을 배치하고 있다. 보살상은 화염광배를 갖추고 구름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데 마모가 심하여 정확한 자세나 표정은 알 수가 없다. 이 종의 또 다른 특징은 화불이 새겨진 입상대이다. 입상대에 화불을 새기는 것은 조선시대 종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일인데 고려시대 종으로는 특이한 예라 하겠다.
명문의 계사년癸巳年은 내소사 종과 비교할 때 1233년으로 해

 

석되고 있으며 탑산사의 소재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종은 일제 때 해남읍내 헌병수비대에 있었으며 수비대가 철수된 후 만일암 등을 전전하다가 대흥사로 옮겼다고 한다.

 2007년 3월 26일 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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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 16일 발췌

 

[고려] 2636. 해남 대흥사 탑산사 동종 (두산)  
2636. 탑산사 동종 塔山寺銅鐘
    


전남 해남군 대흥사(大興寺)에 있는 고려 후기의 종.

보물 제88호. 높이 79cm, 입지름 43cm. 정부(頂部)에는 용통(甬筒)과 용뉴(龍쐤)가 있으며 용통에는 마디마다 무늬가 양각되고, 이를 등지고 있는 용두(龍頭)는 매우 선명하게 조각되었다. 종견(鐘肩)에는 연판(蓮瓣)을 돌려세웠고, 그 밑 상하에 주문대(珠文帶)가 있는 견대(肩帶)가 있어 그 안에 당초문(唐草紋)이 양주(陽鑄)되었다.

종신 하부에는 복판연화(複瓣蓮花)로 된 당좌(撞座)가 네 곳에 배치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보아 선이 아름답고 조루(彫鏤) 또한 수려하여 고려시대 동종의 걸작품으로 꼽힌다. 종신 보살상 밑에 새겨진 “塔山寺火香徒上玄智…”로 시작되는 명문으로 보아 탑산사에 있던 동종임을 알 수 있으며, 그 후 해남읍의 일본 헌병수비대, 만일암(晩日庵) 등을 전전하다가 대흥사에서 보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진 출전 : 문화재청 홈페이지
내용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엔싸이버] 2006년 11월 16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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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25일 발췌


탑산사동종(塔山寺銅鍾
  한국미술전집 / 동화출판공사 / 1974.
설명 ▶고려시대. 높이 79cm, 입지름 43cm, 寶物 88. 전남 해남군 大興寺藏.
한국종의 형식을 따른 종이다. 大鐘은 아니나 신라종의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

肩帶. 乳廓. 口緣帶의 唐草文帶의 장식무늬는 약간 섬약하고 장식성이 번다한 감이 있으나 周緣의 聯珠文帶나 조각 수법이 아직 古調를 잃지 않고 있다.
鐘身에는 乳廓 사이 밑에 보륭상이 1軀씩 조각되었는데 光背를 갖추고 蓮花위에 앉아 구름 위에 떠 있는 형상이다.

유곽 밑에는 鐘口 가까이에 撞座가 있는데 連珠圓圈 안에 寶相花같은 重辦蓮花로 표현하였다.

鐘肩 위에는 꽃무늬가 장식된 蓮瓣을 촘촘히 세워서 고려시대 銅鐘의 하나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위에 붙어 있는 龍이나 音筒의 조각 또한 어느 鐘보다도 우수한 솜씨를 보였고 특히 龍頭의 표현은 매우 박력이 있어 보인다.

이 鐘에는 鐘身에 「癸巳十月日塔山寺火香徒」운운의 銘文과 「萬曆二十年己亥十二月日」운운의 追刻銘이 있다.

이 銘文만 가지고 정확한 年代를 알 수는 없으나 고려시대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銘文으로써 이 鐘이 塔山寺에 있던 鐘임을 알 수 있다.
 
출처 : 탑산사 동종  2006년 10월 25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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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21일 발췌

 

16. 해남 대흥사 탑산사 종

2635. 탑산사동종(塔山寺銅鐘)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대흥사(大興寺)에 있는 고려 후기의 종. 높이 79㎝, 입지름 43㎝. 보물 제88호. 본래 탑산사에 있던 종으로서, 일제 강점기에 만일암(晩日庵)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보존되어 오고 있으며, 일명 대흥사 동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상부 천판 위에 부착되어 있는 용뉴(龍瞿)는 정교하게 처리되어 매우 사실적이고 박력 있는 용두(龍頭)를 갖추었고, 앞으로 힘있게 뻗은 왼발에는 여의주를 잡고 있다. 용통(甬筒)은 상·중·하의 3단으로 구분되어 단마다 당초문(唐草文)을 새겨 넣었으며, 천판과 상대(上帶) 계연상(界緣上)에는 섬세하게 처리한 연판(蓮瓣)을 촘촘히 세우고 있다.

상·하대 유곽(乳廓)에는 모두 상하 또는 내외로 연주문대(連珠文帶)를 돌리고, 그 내부를 화려한 보상화(寶相花) 같은 중판연화(重瓣蓮花)로 장식하였다. 유곽 안의 유두(乳頭)는 6판중엽의 연화에 자방(子房)이 돌기된 9개의 연화유(蓮花乳)를 배치하였고, 종신(鐘身)에는 4개의 당좌(幢座)와 보살상 4구(軀)를 서로 교대로 배치하고 있다.

당좌는 연주원권(連珠圓圈) 안에 8엽중판의 연화당좌로 되어 있고, 보살상은 광배(光背)를 갖추고 연화좌에 앉아 구름 위에 떠 있는 듯이 표현되어 있다. 종신에는 ‘癸巳十月日塔山寺火香徒(계사10월일탑산사화향도)’라는 음각명과 ‘萬曆二十年己亥十二月日(만력20년기해12월일)’이라는 추각명(追刻銘)의 명문이 적혀 있어 종의 내력을 밝혀 주고 있다.

이 종은 신라종의 형식을 계승한 중형(中型)의 종으로, 문양의 조식방법이나 양식수법이 매우 섬세하고 고조(古調)를 잃지 않은 대표적인 고려 후기 종의 하나이다. 특히, 종신에 있는 명문 가운데 ‘계사(癸巳)’에 관하여서는 현재까지도 여러 가지 해석이 내려지고 있다. 이 종은 타종할 수 있도록 종각에 걸려 있지 않고 나무로 된 받침 위에 놓여 있다.

≪참고문헌≫

韓國鐘硏究(廉永夏,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4).

<이호관>

출처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2006년 9월 21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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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소장 탑산사 계사명 범종(大興寺 所藏 塔山寺 癸巳銘 梵鍾)(2-21, 3-16)

 

소 재 지(所 在 地) : 전라남도(全羅南道) 해남군(海南郡) 삼산면(三山面) 구림리(九林里)

연 대(年 代) : 1233年(고종(高宗) 20年, 계사(癸巳))

지정번호(指定番號) :

실 측 치(實 測 値) : 총고(總高); 79cm 구경(口徑); 43cm

 

신라종(新羅鍾)의 형식(形式)을 계승한 중형(中型)의 종(鍾)으로 용뉴(龍鈕)에서부터 견대(肩帶), 유곽(乳廓), 하대(下帶) 및 당좌(撞座)에 이르기까지 그 문양(紋樣)의 조식(彫飾) 방법(方法)이나 수법(手法) 양식(樣式)이 매우 섬세하고 고조(古彫)를 잃지 않은 우수(優秀)한작품이다.

 

용뉴(龍鈕)는 정교하게 처리하여 매우 사실적이며 박력있는 용두(龍頭)를 갖추고 있고 앞으로 뻗은 좌족(左足)에는 여의주(如意珠)를 갖고 2개(個)의 화염(火焰)무늬는 용통(甬筒)을 감싸고 있다.

 

용통(甬筒)은 상중하(上中下)의 3단으로 구분(區分)하여 각단(各段)마다 당초문(唐草紋)으로 조식(彫飾)하였으며, 천판(天板)과 상대(上帶) 계연상(界緣上)에는 섬세하게 처리한 연판(蓮瓣)을 촘촘히 입상대(立狀帶)를 설치하였다.

 

상하대(上下帶)의 유곽(乳廓)에 동일(同一)하게 상하(上下) 또는 내외(內外)로 세잔한 연주문대(連珠紋帶)를 돌리고 그 내부(內部)에 화려한 연주문대(連珠紋帶)로 장식하였다. 유곽(乳廓) 내(內)의 유두(乳頭)는 중엽육판(中葉六瓣)의 연화(蓮華)에 자방(子房)이 돌기(突起)된 9개(個)의 연화유(蓮華乳)를 배치하였다. 종복(鍾腹)에는 당좌(撞座) 4개(個)와 보살상(菩薩像) 4구(軀)를 교호(交互)로 배치하고 있는데 당좌(撞座)는 연화(蓮華) 당좌(撞座)이고두신광(頭身光)을 갖추고 연화좌(蓮華座)에 앉아 구름 위에 떠있는 듯한 화려한 보살상(菩薩像) 4구(軀)를 배치하고 있다.

특(特)히 주목(注目)되는 것은 종신(鍾身)에

의 명문(銘文)과 ‘만력이십년기해십이월 일(萬曆二十年己亥十二月 日)…’의 점각(點刻)한 추각명(追刻銘)이 있어 더욱 본(本) 종(鍾)의 내력(來歷)과 중요성(重要性)을 더하게 하고 있다.상기(上記) 명문(銘文)에서 보이는 계사(癸巳)에 대(對)하여는 지금까지 여러 해석(解釋)을하고 있는바 그 예(例)를 들어보면 등전양책씨(藤田亮策氏)는 계사(癸巳)는 고려(高麗) 고종(高宗) 20年 계사(癸巳)(1233)로 해석해 규정(規定)하여 본(本) 종(鍾)의 시대(時代)를 정(定)하고 있고57), 갈성미치(葛城未治)는 계사(癸巳)를 문종(文宗) 7年(1053)과 예종(睿宗) 8年(1113), 명종(明宗) 3年(1173)으로 하여 고종(高宗) 20年(1233年) 계사(癸巳)보다 앞서는 시대(時代)로 보고 있다.58) 그러나 고려 후기 종(鍾)들에서 보이는 제반 양식과 특징 등으로 보아 역시 1173年 이전(以前)의 것으로 보기에는 여러 문제점이 있으며 고종(高宗) 20年(1233) 계사(癸巳)로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출처 :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간 한국의 범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