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고려의 종

경희대학교박물관 소장 동종

korman 2007. 1. 21. 23:05

 

 


유물명칭

청동 범종(小)

국적/시대

한국(韓國) / 고려(高麗)

재질

금속(金屬) / 동합금제(銅合金製)

크기

높이 : 21.7 cm

용도기능

종교신앙(宗敎信仰) / 불교(佛敎) / 의식(儀式) / 범종(梵鍾)

소장기관

학교(學校) / 경희대(경희대)

유물번호

경희대(경희대) 100114


<정의>
법구사물(法具四物) 중의 하나로 중생을 제도하는 불구.

<발달과정/역사>
범종의 기원은 첫째, 중국 은(殷)나라 이후 악기의 일종으로 사용되어 왔던 고동기(古銅器)의 종을 본떠 오늘날 불교사원에서 볼 수 있는 범종의 조형이 비롯되었다는 설과 둘째, 고대 중국의 종이나 탁(鐸)을 혼합한 형식이 점점 발전되어 범종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 2가지 설의 공통점은 모두가 악기인 고동기의 일종인 종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종은 용종(甬鐘)을 의미한다. 용종은 중국의 주대(周代)에 만들어져 성행하다가 주나라 말기인 전국시대(戰國時代) 이후부터 다른 예기(禮器)와 같이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된 악기의 일종이다. 이와 같은 용종을 모방하여 오늘날 한국종의 형태가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불교는 신라시대와 같이 호국불교로서 왕실은 물론 일반국민에게까지 널리 확산되어, 범종을 주성하는 일도 성행하였다. 신라의 양식을 계승하였던 고려 초기의 범종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양식적으로나 각 부의 수법에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고려시대는 12세기 초 몽고에 병란을 당할 때까지를 전기, 그 이후인 12세기 이후를 후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대구분인데, 범종도 전기와 후기에 따라 양식과 수법이 달라지고 있다. 전기는 북방(北方) 요(遼)의 연호를 사용하던 때로 신라종의 전통을 이어오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때부터 고려의 미술은 조각적인 것에서 공예적인 방향으로 흘러 공예미술에서 특색을 나타냈다.

한편, 후기에 들어와서는 다른 나라의 연호 대신 독자적인 ‘간지(干支)’로써 기명을 나타냈는데, 고려예술의 각 부분이 치졸해지고 평민화되어 가는 쇠퇴기에 들어서는 시기로 범종 또한 신라종과는 달리 왜소해진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고려의 동종은 전기에는 신라시대의 형태를 본받아서 대체적으로 상대 위에 입상화문(立狀花文)이 없으나 후기에 들어서면서 상대에 입상화문이 나타나고 종의 규모도 왜소해지기 시작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작은 법종으로 종신의 상부에는 용종의 ‘무’에 해당하는 천정판(天頂板), 즉 종정(鐘頂)을 두 발로 딛고 머리를 숙여서 종 전체를 물어 올리는 듯한 용뉴를 만들어 놓았으며, 구부린 용의 몸뚱이에 철색을 끼워서 종뉴(鐘瞿)에 매달아 놓았다.

<참고문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1.
韓國鐘(坪井良平, 角川書店, 1974)


출처 : 경희대학교 중앙박물관 홈페이지 유물검색 2017년 3월 2일 현재

http://museum.khu.ac.kr/contents/bbs/bbs_content.html?homepage_id=khmuseum&bbs_cls_cd=005001&cid=08071800001219&bbs_ty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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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학교 박물관 소장 범종(慶熙大學校 博物館 所藏 梵鍾)(2-48)


소 재 지(所 在 地) : 서울특별시(特別市) 동대문구(東大門區) 회기동(回基洞)

연 대(年 代) : 14세기 

지정번호(指定番號) : 

실 측 치(實 測 値) : 총고(總高); 21cm 유곽장(乳廓長); 4.4×5.8cm 종신고(鍾身高); 15cm

당좌경(撞座徑); 4cm 용통고(甬筒高); 6cm 하대폭(下帶幅); 2.2cm 

상대폭(上帶幅); 1.1cm 종구경(鍾口徑); 14.3cm 유곽폭(乳廓幅); 1.6cm 

종구후(鍾口厚); 1.2cm 유곽폭(乳廓幅); 1cm

 

 경희대학교박물관(慶熙大學校博物館) 소장품(所藏品)으로서 강원도(江原道) 횡성(橫城)에

서 출토(出土)되었다 할 뿐 상세한 내용(內容)은 불명(不明)한 소종(小鍾)(No.1-68)(口)-114)이다. 

이미 『고고미술(考古美術)』101호(號)100)에 소개(紹介)된 바 있는 용뉴(龍

鈕)와 종신(鍾身)이 완전(完全)한 고려(高麗) 하대(下帶) 종(鍾)으로서 용통(甬筒) 정상(頂

上)에는 방판(方板)을 4유(乳)에 배치하고 그 위에 소주(小珠) 1개(個)씩을 부착시켰다. 이와

같은 예(例)는 다른 범종(梵鍾)의 용통(甬筒) 상단(上端)에서 볼 수 없는 특이(特異)한 수법

(手法)의 하나이다. 종정(鍾頂) 천판(天板) 주연상(周緣上)에는 3각형(角形)의 입상문대(立狀

文帶)를 돌리고 있으며 상하대(上下帶)와 유곽(乳廓)은 동일(同一)하게 뇌문(雷文)으로 주문

대(主紋帶)를 이루었고 특(特)히 하대(下帶)는 동일(同一)한 뇌문대(雷紋帶)를 상대(上帶)와 

달리 2단(段)으로 나타나게 한 것이 특이(特異)할 뿐 여타(餘他)의 특별(特別)한 특징(特徵)

은 없다. 종복(鍾腹)에는 조식(彫飾)하고 그 내부(內部)에 자방(子房)을 갖춘 8판연화(瓣蓮

華)로 되어 있다. 이상으로 볼 때 역시 종(鍾)의 조잡한 수법(手法)과 양식(樣式), 문양(紋樣)

의 처리(處理) 등(等)이 세련되지 못해 고려말(高麗末)인 14세기경에 제작․주조된 것으로 본다. 


출처 :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간 한국의 범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