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고려의 종

박병래 개인소장 정풍2년명 범종 (정풍2년명 동종)

korman 2006. 10. 25. 19:37

박병래 개인소장 정풍2년명 범종 (정풍2년명 동종)

 

 

박병래 소장 정풍이년명 범종(朴秉來 所藏 正豊二年銘 梵鍾)(2-17)
소 재 지(所在地) : 서울특별시(特別市) 성북구(城北區) 동소문동(東少門洞))
연 대(年 代) : 1157年(의종(毅宗) 11年, 정풍(正豊) 2年
지정번호(指定番號) :
실 측 치(實測値) : 총고(總高); 22.5cm, 용통고(甬筒高); 5cm, 상대폭(上帶幅); 1.5cm,
하대폭(下帶幅); 2cm, 당좌경(撞座徑); 4.2cm, 좌상고(坐像高); 5cm,
유곽장(乳廓長); 6cm, 종구경(鍾口徑); 16.9cm
본(本) 종(鍾)은 원래(原來)는 김동현씨(金東鉉氏) 소장(所藏)이었던 작은 범종(梵鍾)이었
으나 후(後)에 박병래씨(朴秉來氏) 소장품(所藏品)으로 되었다. 본(本) 종(鍾)에 대(對)하여
는 1961年 1月 『고고미술(考古美術) 』 2卷 1號42)에 간략하게 탁본으로 소개되었던 것을 후일(後
日) 1961年 11月 『고고미술(考古美術)』 第2卷 第11號43)에 정영호씨(鄭永鎬氏)가 재차 상
세하게 논(論)하였다.
여기에서 논(論)한 것을 소개하면 정상(頂上)에는 용뉴(龍鈕)와 용통(甬筒)이 있는데 원형
(圓形)의 용통(甬筒) 정상(頂上)에는 소주육립(小珠六粒)이 배치되었고 용두(龍頭)의 형태(形
態) 및 조식(彫飾)은 완전(完全)하나 우족(右足)이 결손되었으며 좌족(左足)에는 1보주(寶珠)
를 갖고 있다. 상연(上椽)에는 입상화문대(立狀花紋帶)가 돌려 있고 그 하부(下部)에는 1조
(條)의 세선(細線)과 연주문(連珠紋)을 돌려 상대(上帶)와 경계(境界)를 이루었다. 상하대(上
下帶)는 뇌문(雷文)이며 그 내(內)에는 원권내(圓圈內)에 범자(梵字)가 들어 있는데 상대(上
帶)에 12자(字) 하대(下帶)에 7자(字)를 양각(陽刻)하였다. 견상(肩上) 4처(處)의 뇌문(雷文)
유곽(乳廓)에는 9유(乳)가 화판(花瓣)에 돌기되어 있으며 각(各) 유곽하(乳廓下)에는 8판연
화문(瓣蓮華紋) 당좌(撞座)가 있어 전(全)4좌(座)이다. 종복(鍾腹) 간지(間地)에는 보살상(菩
薩像) 4구(軀)가 배치되어 있는바 좌불(坐佛)로써 복판(複辦)의 앙연상(仰蓮上)에 합장(合掌)
결가(結跏)하고 두(頭)․신광(身光)을 구비하였으며 보관(寶冠)․영락(瓔珞)․통견(通肩)한
의문(衣紋) 등의 조식(彫飾)이 유려(流麗)하고 각명(刻明)하다. 당좌(撞座) 간(間)에는 명문
(銘文) 6행(行)이 음각(陰刻)되었는데 그 명문(銘文)은
正豊二年 庚戌支中 河寺住 持比丘宗 □發心 □□□
(정풍이년 경술지중 하사주 지비구宗 □발심 □□□)
로 판독(判讀)되었다. 상기명(上記銘)에서 정풍이년(正豊二年)은 정륭이년(正隆二年)으로 고
려(高麗) 태조(太祖)의 부왕(父王) 륭(隆)의 휘(諱)를 피(避)하여 풍자(豊字)로 대(代)한 것으로 이는 고려(高麗) 의종(毅宗) 11年(1157)에 해당한다. “형태(形態)가 단아(端雅)하고 조루
섬세(彫鏤纖細)하며 보존(保存)도 양호(良好)하며 더욱이 재명(在銘) 고려(高麗) 범종(梵鍾)
으로서 연구(硏究)의 신자료(新資料)로 중요시(重要視)되는 바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는 반면
평정양평저(坪井良平著) 『조선종(朝鮮鐘)』 고려시대(高麗時代) 후기종(後期鍾)44)에서 정풍이
년명(正豊二年銘)에 대(對)하여 저자(著者)는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즉 정풍(正豊)은 금
(金)의 해융왕(海隆王) 「정륭(正隆)」의 피휘연호(避諱年號)인데 고려(高麗) 의종(毅宗) 11
년(年)에 해당되며 간지(干支)로 정축(丁丑)이고 경술(庚戌)이 아니다. 그리하여 경술(庚戌)
로 판독된 2자(字)는 경술(庚戌)이 아닌 다른 자(字)로 판명(判明)될 때까지 본(本) 종(鍾)의
명문(銘文)에 대(對)하여는 큰 의문점이 있다고 하였으며 또한 종(鍾)의 장식(裝飾)에 있어
서도 상하대(上下帶)와 유곽(乳廓)이 뇌문(雷文)으로 되어 있다는 점(點), 그리고 당좌(撞座)
역시 연화문(蓮華紋)으로 되어 있는 바 이 시대(時代)에 볼 수 없는 양식(樣式)이다. 또한 상
하대(上下帶)에 범자(梵字)를 조각(彫刻)한 점(點), 그리고 3각형(角形)의 첨두형연판(尖頭形
蓮瓣)을 경계상(境界上)에 배치하고 있는 점(點) 등 여러 가지 수법(手法)으로 보아 12세기
이전(以前)에 이와같은 수법(手法)이 나타나지 않고 있고 13세기에 들어서서 나타난다고 본
다. 정풍(正豊)2年의 명문(銘文) 자체도 후각(後刻)한 것이 아닌가라고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는 종(鍾)이라고 보고 있고 또한 『한국미술전집(韓國美術全集)』 금속공예편(金屬工藝篇)
도판(圖版) 해설문(解說文)에서는 이와 반하여 확실히 정풍(正豊) 2年 고려(高麗) 의종(毅宗)
11年에 주성(鑄成)한 것으로 논(論)하고 있다.45) 이와같은 여러 점으로 볼 때 앞으로 본(本)
명문(銘文)과 종(鍾)의 양식(樣式)을 재고(再考) 판명(判明)하여야 할 자료(資料)이다.

 

출처 :

1996년. 12월.

국립문화재연구 소장(國立文化財硏究所長) 김동현金 東 鉉)간

한국의 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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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풍2년명동종(正豊二年銘銅鍾(13의 部分)) 

 

한국미술전집 / 동화출판공사 / 1974.

설명 ▶고려시대. 높이 22.5cm, 입지름 16.8cm, 서울 개인소장.
이 鐘은 鐘肩의 立花장식이 뚜렷하고 鐘口가 넓어진 고려양식을 보여 주는 小鐘인데 장식무늬가 특이하여 주목된다.
上帶와 下帶는 2段의 雷文으로 장식하였는데 이 紋樣帶 안에 上帶에 12字, 下帶에 7字의 梵字가 圓圈안에 조각되었다. 上帶 밑 네 곳에 큼직한 乳廓이 있는데 雷文帶를 돌린 속에 돌기된 9乳가 있다.
유곽 밑에는 子房과 꽃잎에 모두 珠文을 장식한 8葉 연꽃으로 撞座를 삼았고 乳廓 사이 鐘身 거의 중앙부에 頭光과 身光을 갖추고 蓮花座 위에 앉은 如來像 1軀씩이 있다. 어깨에는 한 줄 聯珠를 돌리고 그 위에 花形 立飾이 돌려 있다.
정상에는 용뉴와 音筒이 있는데 용뉴는 다리가 하나 없어졌으나 힘차게 표현되었고 音筒 위에는 작은 구슬이 있어 특징을 이루고 있다. 如來像 밑에는 「正豊二年庚戌」운운의 鐘銘이 있어 고려 毅宗 11년(1157)의 鑄成으로 추정된다.

 

 

 

 

 


출처 : http://www.sejo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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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정풍2년명동종

[ ]


유형유물
시대고려/고려 전기
성격불구, 범종
제작시기·일시1157년(의종 11)
수량1구
재질구리
크기(높이, 길이, 두께, 너비)높이 22.5㎝
소유자

 박병래(개인소장)



내용

1157년(의종 11) 주조. 높이 22.5㎝. 개인 소장. 소종()이지만 제작연대를 지닌 고려 중기 범종의 귀중한 편년자료이다.

우선 S자형으로 굴곡진 용뉴()는 고려 전기 종과 달리 그 입을 천판()상에서 띄워 앞을 바라보고 있으며 들려진 왼손 위에는 보주를 잡았다. 뒤에 붙은 음통()은 가늘고 형식적으로 표현되었지만, 상부에는 작은 보주 장식이 돌려져 있다.

높게 돌출된 입상화문대()는 여의두() 형태로 표현되었으며, 그 아래 1단의 연주문()을 둘렀다. 상대()와 하대()에는 원권()의 범자문()을 배치하고 그 여백 부분에는 2단의 뇌문()이 장식된 동일한 형태로, 고려범종 가운데 범자문이 표현된 가장 이른 예로서 주목된다.

상대 아래 붙은 네 유곽대()에는 범자 없는 뇌문대로 장식하였고, 각 내부에 작게 돌기된 연화좌의 종유()를 9개씩 배치하였다. 종신의 유곽과 유곽 사이마다 연화좌 위에 앉아 합장한 모습의 보살상을 1구씩 장식하였으며, 이와 별도로 유곽 아랫부분에는 국화형 자방() 바깥으로 원권 없는 8엽의 연판문으로 구성된 당좌()가 4개소에 배치되었다.

한편, 종신의 한쪽 면 부조보살상 아랫부분에 ‘ □□□□(정풍2년 경술난중 정사주 지비구종 어발심□□□□)’이라는 내용의 오목새김명문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정풍() 2년은 정륭() 2년으로서 고려 태조 부왕의 이름인 ‘융()’을 피하여 ‘풍()’자를 사용한 것이라 알려져 있는데, 이렇게 볼 때 그 2년은 1157년에 해당된다.

고려 후기종으로의 이행을 대변해주는 입상화문대의 정착이 이미 12세기 중엽에 이루어졌음을 밝혀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 『한국(韓國)의 미(美) -금속공예(金屬工藝)-』(정영호 감수, 중앙일보사, 1993)
  • 「정풍이년명소종(正豊二年銘小鐘) -박병래씨장(朴秉來氏藏)-」(정영호, 『고고미술』16, 한국고고미술사학회,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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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정풍2년명동종 [正豊二年銘銅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 네이버지식백과 2016년 10월 30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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