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가을의 부부여행 (10월 10일~11일)
선배 한분이 추석때 보름달을 보며 무엇을 빌었냐는 이메일을 보내 주셨다. 이 나이엔 그런 물음에 누구나 늘 하는 표준 대답이 있다. 아이들이 좋은 배필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것과 가족이 늘 건강하게 생활하는 것. 그러나 난 그런 대답 대신에 매달 적어도 2박3일 가족이 함께 아니면 마누라 하고 둘이라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행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기를 빌었다는 대답을 하였다.
며칠 전 뉴질랜드에 사는 친구가 집안일이 있는 관계로 오랜만에 부인과 같이 다니러왔다. 한 1년여 만에 만나는 그의 부인은 더욱 건강한 얼굴로 여전히 그 풍성한 미소를 간직하고 있다. 오클랜드의 한적한 주택가에서 호화롭지는 않지만 주위의 온갖 꽃에 묻혀 그림같이 사는 분이기도 하다.
추석날 보름달에 빈 것이 효험이 있었을까! 이 깊어지는 가을에 생각지도 않았던 부부여행을 친구덕분에 갑작스레 할 수 있는 행운이 주어졌다. 깊은 가을에 한적한 해변으로 그것도 1박 2일씩이나.
안면도 입구의 청포대 해수욕장으로 향한 발걸음은 집을 나서며 베란다에 묵혀 두었던 와인 한 병을 챙기고 마트에 들러 6병들이 소주 한 다발과 깡통맥주 몇 개를 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자동차에 여물을 가득 주고 서해대교를 건넜다. 이번 여행에는 뉴질랜드 친구부부 외에 흰머리가 많은 그러나 살며시 굴곡진 약간 긴 머리가 잘 어울리는 그리고 모든 친구들 사이에서 정통신사로 인정받는 친구와 뛰어난 재능으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패션 디자이너인 그의 부인이 동행하였다. 모두는 서울과 인천에서 각자 출발하여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행담도 휴게소에서 상봉을 하고 청량고추의 칼칼함과 바지락의 담백함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칼국수와 수제비를 안주로 1박2일의 대화를 열어갔다. 서해대교 밑을 오가는 어선들이 보이는 계단 위에서 갯내음이 섞인 커피향을 맡으며 증명사진도 남기고.....
아직은 많은 철새가 찾아오지 않은 것 같은 천수만의 황금들녘을 지나다 물위에 떠 있는 조그마한 그러나 무척이나 유명한 암자인 간월암을 만나기 위하여 간월도를 찾았다. 물이 빠지면 걸어서 건너갈 수 있는 암자가 전부인 주먹만한 바위섬, 그러나 만조가 된 바다 저쪽에 섬은 갇혀있고 우리는 받줄로 이어진 그야말로 일엽편주에 의탁하여 아주 맑고 깨끗한 속살을 보이는 수로를 지나 부처님을 뵈었다.
청포대로 들어서자 우리가 묵을 펜션의 오렌지색 지붕이 보인다. 오솔길을 지나 들어선 이 펜션의 이름은 “화가의 정원” 이다. 뒤에는 송림이 울창하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바다에 그 얼굴을 모두 보여주지는 않는다. 적당히 갑갑하지 않게 노송의 가지들이 해풍을 막아주는 펜션의 위치가 무척 아늑하다. 제주도 공항 앞에 일자로 늘어선 야자수(?)가 입구를 따라 나란히 심어져 있는 펜션의 느낌은 한마디로 이태리 남부와 산토리니를 합쳐놓은 지중해적 분위기라고나 할까. 흰 벽에 기대어 있는 자전거가 어느 음료광고에 등장하는 자전거 탄 소녀의 이국적 분위기를 연상케 한다.
이 분위기에는 사장님 보다는 쥔장이라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리겠다. 쥔장의 부인은 작품 활동을 왕성히 하고 있는 현역 화가이다. 그래서 펜션에 들어가는 입구부터 예술적 냄새가 물씬 풍긴다. 흰 벽과 현관에 그려진 자작 그림은 둘째 치더라도 2층 계단을 오르는 중간에 온 벽을 차지하고 있는 그것은 그림을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그 앞에서 한참을 머무르게 한다. 그래서 그런지 쥔장 명함에는 화가의 남편임을 강조하였다.
이곳의 모든 방은 화가들의 이름을 땄다. 모네, 샤갈, 고흐. 그 방들의 내부 분위기도 매우 고전적이어서 중세 프랑스의 귀족들이 사용하였음직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동행한 마누라들이 나이를 잊고 사춘기 소녀들처럼 감탄을 연발한다. 마침 솔밭사이로 보이는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해가 노송의 가지사이를 뚫고 다락방 창문에 걸리며 낙조를 떠서 액자에 걸어놓은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쳐다보는 사람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수평선 아래로 모습을 감추는 저녁해를 황홀하게 바라보다 그만 증명사진 찍을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
쥔장의 안내로 저녁 스산한 공기를 가르고 달려간 곳은 안면도 백사장항의 화려한 야경을 한눈에 담고 있는 야외주점. 밤바다의 검은 출렁임이 불빛을 받아 반사되며 몇 순배의 소주잔을 구한다. 가을 전어 굽는 냄새에 집나간 며느리가 돌아온다고 하던가. 마음을 너울에 실고 전어를 안주로 하여 비운 소주병이 몇 개인지 헤아리다 자리를 떴다.
쥔장부부와 함께 다시 자리한 곳은 펜션에서 제일 큰방. 진한 밤색의 바닥과 탁자와 나폴레옹의 방에서 금방 가져온듯한 커튼이 더욱 중후한 고전적 분위기를 풍긴다. 눈으로 느끼지 못하는 바다의 가을이 이 방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도 함께 풍긴다. 큼직한 와인 잔에 담긴 붉은 와인이 분위기를 더하여 깊어가는 밤 펜션에서의 대화의 끈은 끊어질 줄 모른다. 쥔장내외의 다방면에 걸친 박식함이 짐짓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는 분위기를 반전 시키고 와인으로 시작한 목운동은 친구가 준비해간 딤플과 마호타이로 이어지며 새날의 3시를 훨씬 넘기고 있었다.
분위기와 맑은 공기에 취해서 술에 취할 시간이 없었는지 이른 아침 해변을 산책하는데 아무런 방해가 없다. 내가 생활하는 곳에서 그리 마셨다면 아침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을텐데. 이른 아침이 간조시간인지 아득한 곳까지 바닷물이 빠져있다. 남쪽의 바위섬으로 가다 거북등에 토끼가 올라있는 조각상이 놓여있기에 쥔장에게 이유를 물은즉 해안 남쪽에 별주부전을 테마로 한 테마공원이 들어설 계획이라는 이야기다.
큰조개와 콩나물을 넣고 화가인 안주인께서 얼큰하게 끊인 맛있는 해장국으로 속을 확 풀고 쥔장이 준비해준 바구니와 호미, 삽, 소금 등을 챙기고 쥔장의 안내로 물가로 나갔다. TV에서 많이 나오는 대맛을 캐기 위함이다. 삽이나 호미로 모래를 걷고 나타나는 구멍에 소금을 넣으면 그 염분에 바닷물이 들어온 줄 알고 대맛이 고개를 쏙 내밀면 잽싸게 구멍 밖으로 뽑아 올리면 된다. 영특한 인간이여. 쥔장은 잘 찾아내는 구멍을 이 무능한 도시민은 힘들여 삽질만 할 뿐 수확이 없다. 그래도 쥔장의 도움으로 바구니의 한곁이 채워졌다.
점심을 위하여 쥔장부부가 우리를 안내한곳은 펜션에서 그리 멀지 않은 허브농장. 작은 구릉에 각종 허브와 꽃과 나무가 가득 찬 이 농장의 농장주는 굴곡진 긴 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허브를 다듬던 손으로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동화책에 나오는 풍차를 구릉 높은 곳에 지은 이 젊은 농장주의 검게 그을린 얼굴에서 그의 부지런함을 읽을 수 있었다. 허브향이 가득 찬 건물의 이층에 아담하게 마련된 레스토랑은 유럽의 어느 고성의 한 모퉁이를 생각게 한다. 빛이 잘 드는 탁자에서 커튼을 드리우고 쥔장이 서비스하는 화이트와인을 곁들여 예술적 가치가 높은 식사를 하였다.
또 하루해가 가울어지는 시각에 펜션 쥔장은 바비큐 그릴에 야자수�을 넣고 불을 피운다. 여행의 마지막 시간을 대우 굽기로 안내하는 것이다. 쥔장 부부는 하루 종일 몸놀림을 멈추지 않는다. 손님으로 간 우리들 보다는 젊었으나 그렇다고 젊은층에 끼일만한 나이는 아닐 것 같은 이 부부는 자신들이 직접 펜션의 모든 시설들을 손수 설치하고 유지보수를 하며 DIY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대하는 소금에 굽는 것도 좋지만 껍질을 벗기고 버터구이를 하는 것도 일품이라며 손수 비닐장갑을 끼고 대우의 껍질을 벗기고 버터구이를 하는 쥔장의 모습에서 진한 삶의 향기가 느껴진다.
어두움이 내려 한참이나 지난 다음에야 쥔장 부부와 악수를 나누고 청포대를 벗어났다. 돌아오는 길 잠시 행담도 휴게소에 다시 들러 뜨거운 원두커피 한잔으로 아쉬운 여행의 뒷풀이를 하고 각자 인천과 서울을 향하여 길을 갈랐다. 펜션 쥔장의 호의를 까페에 어찌 표현해야 하나 하는 마음과 함께 언젠가는 꼭 다시 와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갖고.....
2007년 10월 열사흔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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