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현충일의 태극기

korman 2008. 6. 7. 00:59

현충일의 태극기  

 

 

잔뜩 찌푸린 아침 날씨가 비를 뿌릴 것 같다.

일기예보에 비가 오겠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베란다 밖에 걸어놓은 조기가 바람에 몹시 펄럭이고

열려진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한기가 느껴진다.

오늘이 현충일이라 하늘도 우울하셨는지.

이런 날에는 향이 진한 블랙커피가 생각난다.

 

 

TV에서 현충일 기념식을 중계하는 시각

커피포트에 물과 커피를 넣으며 아파트 맞은편 동을 내다본다.

그들의 베란다 창문밖에도 당연히 결려있어야 할 태극기는 없다.

그 옆 동을 본다. 다섯 집. 그것도 조기를 건 집은 두 집뿐이다.

다른 국경일에도 늘 그랬었다.

아파트 관리실에서 국기를 달아 달라고 방송을 하는데도

그들은 늘 무관심했었다. 오늘처럼.

그래도 오늘은 다른 날과는 다르기를 기대했었는데.

그들에게 국기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본다.

 

 

해외에 다녀온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 본 태극기에 가슴이 뭉클하였다고 한다.

불과 며칠동안 다녀온 해외에서 만난 태극기에

가슴이 뭉클하다는 것은

오랜 세월 어디에 두었는지 잊고 지내던

어머니의 빛바랜 사진을 찾았을 때의 기분과 같을까.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괘나 오랜 시간동안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학교 운동장에서, 군 연병장에서, 국가 행사장에서

국기가 계양되고 국가가 울리는 국내의 모든 행사장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이렇게 국기에 다짐을 하고 있다.

아파트 앞 학교행사에서 들리는 이 소리에

해외에서 만난 태극기가 아니라도 

나는 늘 가슴이 뭉클함을 느낀다.

 

 

한국전쟁전사자 유해 찾기 특집프로그램에 출연한

이제 중년을 넘어 초로에 접어든 내 나이의 아들이

자신이 첫 돌때 전쟁터로 떠나보낸 아버지의 유해를 찾고 있다.

그의 100세 된 할머니는 이제 심한 치매로

아들에 대한 기억을 말하지 못하지만

아들이 전쟁터로 떠난 그 날부터 지금까지

돌아올 아들을 위하여 늘 대문을 열고 계셨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지 반백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까지

유해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위하여 오늘도 대문을 응시하는

할머니의 눈동자에 고인 눈물이 내 눈물이 되어 흐른다.

 

 

국가를 위하여 희생한 모든 분들을 떠나보낼 때는

늘 태극기를 덮어 보내드린다. 그리고 그 태극기는

유가족에게 전해진다.

국가와 국민이 늘 희생하신 분들과 그 가족들을

기억하겠다는 우리의 맹세와도 같은 의미라 생각한다.

6.25전쟁에서 나라를 수호하려다 희생한

수많은 전사자들이 유해도 찾지 못한 채 실종자로 남아있다.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그들이 전장으로 떠나며 바라보고 맹세한 태극기와

오늘 우리가 바라보는 태극기는 같은 것이거늘

가족에게 돌아오지 못한 그들과 그들의 가족에게

우리는 언제쯤 그 태극기를 전할 수 있을런지.

 

 

현충일의 태극기는 단순한 국기 이전에

그들의 희생으로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우리세대가

그들에 행하여야 할 최소한의 예의인 것을 

저녁시간 태극기를 걷으며

내년에는 좀 더 많은 베란다에

그들을 기리는 태극기가 걸려지기를 기대해 본다.

 

 

2008년 6월 엿샛날 현충일에

   

'이야기 흐름속으로 > 내가 쓰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쇼핑과 샤핑  (0) 2008.06.30
백령도 때문에  (0) 2008.06.24
보이스 피싱에서 일확천금으로  (0) 2008.06.02
상념에 젖어  (0) 2008.05.24
119의 약속  (0) 2008.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