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마음 속 10%

korman 2008. 11. 11. 18:12

마음 속 10%

 

어느새 27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러버렸다.

오늘 아침 생각나는 그 스리랑카 친구를 만났던 게.

27년 앞을 내다보면 매우 긴 세월이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누구나 이야기하는 통속적인 표현으로

지나고 나니 세월은 긴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늘 머릿속에 남아있는 지난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이 먹은 사람의 머리에 남아있는 기억들은

늘 그리움으로 변하여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 앉는다.

나도 어느새 60이 가까워오고 있으니

나이를 먹었다고 표현하여도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 같지만

나 스스로가 나이 먹었다고 하는 게 많이 쑥스럽기는 하다.

 

아침 신문에 외국 며느리들에 대한 슬픈 기사가 났다.

누가 누구에게 잘못을 한 일은 없으되

서로 다른 문화와 어려운 의사소통에서 오는

이해 부족과 갈등에서 빚어지는 결과였다.

문화가 같은 우리나라 안에서도

자식이 집을 떠나 어디 외지로라도 가면

낯설고 물 설은 곳에서 어찌 지낼까

부모들은 자식을 보내기 전에 우선 걱정부터 앞세운다.

하물며 전혀 문화가 다르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 온 그 며느리들은 어떠하랴.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이 우리문화에 빨리 적응하지 못함을

그들의 결점으로 치부하고 이해하는데 참 인색한 것 같다.

다른 문화와 다른 언어를 가정의 한 부분으로 받아드렸으면서도

진작 우리 자신은 그들의 문화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게

다민족국가가 되어가는 우리나라 사회의

벗어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한 단면이기도 하다.

 

그 스리랑카 친구는 내가 중동에서 일할 때

운전기사겸 같은 나라 인부들을

통솔하고 총괄하는 직책에 있었는데

자신의 나라에서는 중고등학교 영어교사였던 관계로

비록 스리랑카식 발음이었지만

늘 그의 능통한 영어실력을 이용하여

내가 외국과 교신하고 문서를 만드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모인 처지였던지라

그와 처음 대면하였을 때나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어진 한참 후에도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질의 벽은

많이 두껍고 높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워낙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던 곳이었으므로

익숙하지 않은 다른 나라의 문화나 풍습도

상호간 이해하려 많이 애쓰고 있었기 때문에

이민족이라 하여 같이 일하는데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지만

처음 그를 만나 대화의 혼란을 없애는 데는

그에게나 또 나에게도 긴 시간이 필요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의 경우 무언가를 물었을 때 그게 긍정이면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이고 아니면 옆으로 젓는다.

이건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일종의 바디랭귀지이다.

그도 무언가를 묻거나 부탁을 하면 말없이 그리하였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의 결과는 늘 내가 원하는 것의 반대였다.

끄덕이고는 못하고 젓고는 하고…….

그가, 그의 나라에서는, 머리를 끄덕이고 젓는 것이

우리와는 정 반대라는 것을 내가 안 것은

여러 건의 시행착오가 있은 후 서로의 오해를 풀기 위하여

‘예스’인지 ‘노’인지를 말로 대답하라고 내가 요구한 후였다.

신기하게도 그는 ‘예스’라 대답하면서 머리는 옆으로 저었고

‘노’라 답할 때는 아래, 위로 끄덕였다.

참 어처구니없게도 세계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통하는

바디랭귀지의 비애가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순간 나는 그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오해해서 미안했다고.

그리고 그는 그 스스로 고치기 참 어려웠을 텐데

머리 흔드는 것을 우리식으로 바꾸었다.

그가 나와 일한지 1년 후 나보다 먼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

지금도 나는 다른 문화를 접할 때마다

우리식으로 고쳤던 그의 머리 흔들기가

자신의 나라에 가서 혼란기를 맞아야 했던 건 아니었는지

궁금증과 함께 바디랭귀지에도 통역이 필요하였음을 생각한다.

 

그렇게 오해를 일으키고 어처구니를 찾아가며

그와 일 한지 한 6개월쯤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아침

늘 하던 것처럼 굿모닝을 외치며 사무실로 들어서던 그가

갑자기 내 앞으로 오더니 나의 턱을 만지고 간다.

우리의 풍습으로 아침에 그런 행위는 참 재수가 없는지라

앞뒤 생각 없이 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조금 후 한국인 동료 한명이

구석에서 울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이유를 물으니

자기는 나를 참 좋아한다는 표시로 턱을 만졌는데

나는 화를 내며 자기의 엉덩이를 발로 차더라고

그것이 서러워 울고 있었노라는 설명이라

동료가 나에게 오해를 풀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것 또한 문화와 풍습의 차이를

한 방향으로만 해석한데서 오는 오해 중의 하나였다.

나는 그 즉시 그에게로 가서 우리의 풍습을 설명하고

오해해서 미안하고 나도 그가 좋다고 악수를 청하였더니

그는 다시 환한 웃음으로 기꺼이 내 손을 잡으며

다른 나라 사람인 나에게 사전 설명도 없이 무턱대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해서 미안하다고 이해해 주었다.

 

우리나라는 지구상에서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거의 유일한 국가라한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우리식으로 해석하는 편견이 많이 존재하는 것 같다.

또한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문화에 대하여는 관대하면서도

우리에게 뒤지는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는 참 인색한 느낌이다.

우리가 “우리 것이 소중한 것이여”라 외치듯이

이민족의 문화도 그들에게는 소중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제 우리 인구의 10% 이상이 이민족이라 하는데

더 이상 단일민족국가가 아님을 인지하며 

우리의 마음속에 한 켠으로 그들의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10%쯤은 빈자리를 마련하여야 하지 않을까.

 

오늘 아침 우리나라의 외국 며느리들이 처한 기사를 보며

27년 전 그와 겪었던 그 오해와 이해의 날들이

머릿속에서 잊어가던 그의 윤곽을 어렴풋이 되살리고 있다.

 

2008년 11월 초 여드렛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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