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손주 얼굴에서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korman 2012. 1. 2. 18:06

 

 

 

 

손주 얼굴에서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새해의 여명이

승천하는 용의 기운으로 태양을 밀어 올리는 시각

아직 쌔근대며 잠들어 있는 손녀의 얼굴을 쳐다보다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예전에 요 녀석의 애비가 요 녀석만 하였을 때

어머니께서 늘 어두움이 가시지 않은 시각에

손자의 얼굴을 쳐다보시며

행여 이불소리에 잠이 깨어날라 조심조심

방문을 여시고 부엌으로 가시곤 하셨습니다.

그 때 어머니께서 그리 키우신 손자가 장가를 가서

저에게 손녀를 안겨 주었고

그 손녀의 잠든 얼굴에서 어머니 얼굴을 봅니다.

 

어머니! 오늘 해가 바뀌어 새해가 되었습니다.

환갑이 넘은 놈이 새삼스레 뭔 어머니 타령이냐고요?

글쎄요. 손녀 얼굴을 쳐다보다

그저 어머니께 새해 인사를 드리고

어머니의 증손녀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곳에 계실 때는 치매라는 몹쓸 병 때문에

오랜 세월동안 기억의 저편에 계셨지만

이제 아버지 옆에 계시니

말씀드리는 거 다 기억 하실 수 있죠?

요 녀석이 요새는 말을 하려고

하루 종일 뭔가를 계속 중얼중얼 거리네요.

키가 책상 높이보다 조금 크다보니

콩콩거리며 뛰어다니는 것이

책상 모서리에라도 부딪칠까 조마조마합니다.

요 녀석 애비가 뛰어 다닐 때

어머니께서 늘 염려하시던 게 생각납니다.

저도 딱 그리 되어가고 있네요.

책상 같은 곳에 놓아 둔 잡동사니들을

끄집어내는 요 녀석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 사진틀을 좀 깊숙한 곳에 치워 두었습니다.

너무 섭섭해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어머니께서 늘 유모차에 태우고

공원으로 산책 나가셨던 어머니 손녀는

작년 봄에 시집을 갔습니다.

이제 한 일 년쯤 지나면

어머니 외증손주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어머니께서 밥해 먹인 제 친구들 중에서

얼굴이 허여멀겋게 잘 생겼다고 늘 말씀하시던 친구 있죠?

그 친구는 지금 뉴질랜드라는 먼 나라에 살고

그 친구 어머니께서는 중국에 큰아들과 사시는데

얼마 전 중국의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큰 손주 작은 손주 모두 에게서

증손주를 보시고 이집 저집 증손주 살피신다고

바쁘게 다니시는 통에 친구와 전화통화가 잘 안된다고 합니다.

부모님 고향이 황해도라 김치 맛이 비슷하다고 한 친구 있죠?

그 친구 어머니도 작년에 손주들 모두 결혼시켜서

곧 증손주 보실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저와 같이 몇 년 만 더 이곳에 계셨다면

막내 아들이 안겨드리는 증손주 안아 보셨을 텐데

가끔 손주 얼굴 쳐다보면서 가슴이 찡 할 때가 있습니다.

불효자식이 꼭 부모님 먼 곳으로 가신 다음에

어쩌구저쩌구 한다는데

저도 그런 자식인 모양입니다.

 

어머니께서 손주들이 TV 만화영화에 정신이 나가 있으면

그만 보라는 것을 늘 뒀다가 보라고 말씀하셨고

아이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매번 저에게 할머니께서는 만화영화를

어디에 뒀다가 보라고 하시는 거냐고 되묻곤 하였습니다.

이제 세월이 좋아 어머니 말씀대로

모든 TV 프로그램을 뒀다가 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컴퓨터 인터넷 즐겨찾기에는

뽀로로라는 만화영화만 계속 늘어가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여기 계실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지만

요 녀석은 제 무릎에 앉아서

계속 보고 또 보고 같은 것을 반복해 봅니다.

그리고 저는 매번 하품을 하면서도

그걸 들어주고 있습니다.

요 녀석 어미는 하루에 서너 편만 보여주라고 하는데

어머니께서 손주들에게 이기신 바 없듯이

저도 결국 요 녀석 어미의 말은 무시하고 맙니다.

그래도 오래 보여주는 게 좋은 건 아니라서

가끔씩 손녀에게 이겨보려고 애는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달 전에는 손녀 하나가 더 생겼습니다.

작은 손주가 너무 빨리 생겼다고요?

그래서 어머니 며느리가 요새는 좀 바쁘고

어머니께 자식 놈이 늙었다는 말을 하는 게 송구하지만

저는 갑자기 많이 늙어버린 느낌이 듭니다.

 

어제 저녁에 해를 넘기면서

어머니 손주며느리, 손주사위, 그리고 증손주들까지 함께

집에서 어머니 며느리가 마련한 음식으로

조촐히 저녁을 같이 먹었습니다.

황희정승께서 세상에서 가장 좋은 모임은

부인과 자식과 손주가 함께하는 식사시간이라고 하셨다는데

제가 연말에 그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머니께서 계셨다면 더 좋은 모임이 되었을 텐데요.

그리고 어머니께서 이곳에 계실 때

술 먹는 것을 싫어 하셨는데

그래도 어머니 아들과 손주와 손주사위가 모이면

가끔 소주 몇 병씩 마십니다.

그러면서 아이들과 세상살이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하는 일에 대해서도 제 경험을 좀 전수해 줄게 있거든요.

그래서 어제도 조금 마셨습니다.

이런 건 어머니께서 이해해 주십시오.

 

어머니도 아시지만

저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오랜 세월동안

아버지와 떨어져 계셨는데

이제 두 분이 오순도순 잘 계시지요?

계신 곳에서 이곳 보시면서

어머니 증손주들 잘 자라게 보살펴 주십시오.

환갑이 넘어 철이 들어가고 있는지

새해 첫날 문득

어머니께 손주 이야기 하고 싶어

편지 드렸습니다.

환갑이 넘어서 어머니가 그립다는 말하기가

좀 쑥스럽지만

손주를 볼 때마다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올 한해도 아버지 옆에서 편안히 계십시오.

 

2012년 새해 첫날

막내아들이 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