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아날로그의 시간을 버렸다.

korman 2014. 4. 28. 15:19

 

 

 

아날로그의 시간을 버렸다.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이렇게 내리는 비는 마음을 가라앉게 한다.

이런 날 아침에는 진한 블랙커피,

그리고 저녁에는 막걸리가 생각난다.

그래서 아침 커피를 마셨다.

지난 세월을 정리하고 앞을 생각하기 좋은 날이다.

오늘 무얼 정리하고 무얼 생각할까!

누구와 막걸리를 마셔야 하나?

 

그래서 버렸다. 엘피판을 버렸다.

요란하지도 않은 밖의 빗소리가

휘어진 엘피판에서 나는 잡음처럼 들리는데

조영남의 딜라일라도 버렸고 이동원의 향수도 버렸다.

비틀즈의 예스터데이도, 존덴버의 선샤인온마이숄더도,

파바로티와 도밍고도,

그리고 베사메무쵸와 클래식소품도

모두 버렸다.

비닐봉지에 넣어 필요하신 분 가져가라는 쪽지와 함께

아파트 분리수거하는 곳에 가져다 놓았다.

 

엘피플레이어가 망가지고

씨디와 인터넷에 밀려 방치당하고

바늘조차 살 곳이 마땅치 않다는 마음 속 게으름으로 하여

그도 벌써 가전제품 수거함에 넣어진지 오래거늘

엘피판에는 왜 그리 미련이 남았었는지.

아마도 지나온 아날로그 세월의 끝자락을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겠지.

지나쳐 온 많은 날들의 미련을 담고 있는 그 엘피판은

중고등학교 시절 용돈의 전부였고

대학시절 동아리 주말다방의 디제이였다.

 

가끔씩

회현동 지하상가를 지날 때면

그곳에 놓여진, 종이케이스마저 벗겨진,

그러나 사지도 않을 엘피판의 나신을 넘기며

얼마 남지 않은 아날로그의 시간을 놓지 않겠다고

공연히 발걸음을 세웠던

그 비어가는 시간의 이야기는

디지털이 되어 다시 내 곁에 남았다.

 

오늘 이 비가 추적거리는 날

엘피판을 버리는 마음은

섭섭함을 넘어

살아온 아날로그 인생의 절반을 버린 것 같이 허하다.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향수를 들으며

엘피판의 바늘 긁히는 소리를 같이하는

막걸집은 어디에 없을까

손가락은 컴퓨터 자판으로 간다.

 

2014년 4월 28일

하늘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