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우리 종 공부하기

제 나이를 잃어버린 종

korman 2015. 8. 6. 18:39

 

* 2010년 10월 7일 문화유산TV 전문가 칼럼에 입력된 글.

 

제 나이를 잃어버린 종<br>-국보 용주사종의 비애-<br>고려(11세기),국보 120호,높이 144cm,구경 87cm<br>수원 용주사 소장

 

 불과 얼마 전 한 신문사의 문화재 칼럼에는 국보 용주사종을 다룬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다. 오랜 기간 문화재 현장에 종사한 실무 경험과 해박한 지식을 지닌 전문가의 글로서 손색이 없는 연재물이지만 이번 용주사 종의 경우는 가장 중요한 제작 연대가 왜곡된 채 전달되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문화재의 가치를 파악하려면 외형 뿐 아니라 같은 시기의 유물을 비교하여 형식과 양식의 분석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미술사의 연구 방법론이 왜 중요한 것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용주사 종이 해방 이후 국보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144cm를 지닌 비교적 큰 외형과 완전한 보존 상태 등도 고려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몸체에 지닌 통일신라 명문에 있었다. 우선 여기에 기록된 명문을 살펴보면 ’成皇山葛陽寺 梵鍾一口釋般 若鑄成二萬五 千斤 今上十六年九 月日沙門 廉居’로서, ’성황산 갈양사 범종으로서 이만 오천 근을 들여 금상 16년 모월 모일에 사문 염거가 발원하였다’는 어쩌면 범종의 명문으로는 매우 간결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용주사 종 명문, 854년(추보)


여기서 말하는 금상 16년은 범종의 다른 쪽 몸체에 기록된 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 16년으로서 854년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일단 명문을 통해보면 이 종은 통일신라 854년에 염거스님이 갈양사를 창건하고 그 때 이 종도 함께 주조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 명문은 후대, 그것도 그리 오래 전이 아닌 20세기 초에 추보된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 종을 발원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염거화상(廉巨和尙)이 죽은 해를 밝힐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자료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강원도 원주에 있었던 염거화상 승탑은 우리나라 승탑 가운데 가장 오랜 예로 주목받을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이 안에서 발견된 탑지(가로 17.2cm×세로 28.8cm)에 있다. 그 명문의 내용 중에서 ’會昌四秊歲次甲子季---廉巨和尙塔去釋迦牟尼佛, 入涅槃一千八百四秊矣’라는 구절을 통해 염거화상이 844년에 입적한 것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염겨화상탑 높이 1.7m,국보 104호(왼),염거화상탑지(844년) 가로 17.2cm,세로 28.8cm


이러한 염거화상 탑지의 내용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염거화상이 죽은 지 10년이 지나서 종을 발원하여 만들었다는 웃지 못 할 결과가 나온다. 그러나 양식적으로 가장 확실한 통일신라의 승탑과 그 안에서 발견된 탑지의 내용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분명 용주사 종의 명문이 왜곡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 어째서 이런 명문을 종 표면에 새기게 된 것일까? 그 의문은 용주사가 있던 자리가 원래 통일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갈양사(葛陽寺)의 옛 터로 알려져 있지만 남아있는 기록은 조선시대 1790년 정조(正祖)가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圓)의 능사(陵寺)로 건립하였다는 내용뿐이다.


정조의 능행, 김홍도의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을 통해 용주사는 나름대로 조선 후기에는 꽤 큰 사세를 떨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용주사는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는지 분명치 않지만 어용 사찰로 전락되기에 이르렀고 사격을 높여 교구 본사가 되기 위한 노력은 결국 갈양사라는 기록을 무명의 고려 범종에 새겨 넣는 역사의 왜곡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즉 갈양사에 관련된 초창의 역사를 제대로 찾을 수 없었던 용주사가 그 사격을 높이고자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올려 창건한 것처럼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설사 이 종의 명문이 원래 없다고 치더라고 과연 용주사 종이 통일신라 종 양식을 구비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으로 이 종은 오히려 통일신라 종의 전형 양식을 구비한 가장 전형적인 고려 전기 종으로서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될 수 있다.


통일신라 종의 양식적 특징과 용주사 종을 비교하면 우선 종신(鐘身)의 경우 상원사종에 비해 홀쭉해져 세장한 느낌이다. 목을 구부려 천판을 물고 있으나 용뉴의 입 안으로는 보주가 표현되었고 앞, 뒷발로 천판을 누른 통일신라 종과 달리 왼발을 위로 들었다. 용뉴 뒤에 붙은 굵은 음통 부분은 마디를 이루며 서로 맞닿은 앙, 복련문이 아니라 위로부터 원형문과 반원권문, 당초문을 차례로 시문한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특히 천판 위로는 용뉴 주위를 돌아가며 용뉴와 음통을 별도로 주조할 때 생긴 주물 접합선이 한단 높게 돌출되어 있음도 주목된다.

 

용주사 종 용뉴와 음통


상대와 하대는 서로 다른 문양으로 장식되었는데, 반원권을 번갈아가며 배치한 상대와 달리 하대에는 유려한 줄기로 굴곡진 연당초문이 시문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종이 통일신라종과 다른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바로 종신 상부 면에 불, 보살의 삼존상(三尊像)과 비천상을 번갈아 가면서 새긴 점과 4개로 늘어난 당좌에서 찾을 수 있다. 즉 통일신라 종의 비천상은 833년의 연지사(蓮池寺) 종까지는 2구 1조의 주악상(奏樂像)을, 그리고 이후 통일신라 말까지는 1구의 주악상을 앞, 뒤로 배치하게 되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 양식적 특징이 되고 있다.


고려 초기 963년에 만들어진 조우렌지(照蓮寺) 종을 시작으로 고려 종은 이제 주악상에서 몸을 옆으로 뉘어 나는 비행비천상(飛行飛天像)으로 바뀌게 되며 1058년의 청녕4년명 종에서부터 다시 불, 보살상으로 변화되는 양식적 변천을 보인다.

삼존상(왼),비천상(오)


따라서 용주사종에 보이는 불, 보살상의 삼존과 비천상이 함께 나오는 것은 고려 초기의 과도기적 양상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당좌는 원형의 연화문 주위를 고사리형의 당초문으로 두른 약간은 도식화된 형태로서 통일신라 종에 비해 아래쪽으로 치우친 하대 바로 위에 배치되었다. 특히 1058년에 제작된 청녕4년명 종에서 처음 등장하고 있는 4개의 당좌를 구비하고 있는 점에서 용주사 종은 절대로 통일신라 종이 될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통일신라의 명문 기록은 성덕대왕 신종을 제외하고 종신 표면에 이처럼 음각시킨 예는 결코 볼 수 없다. 설사 종에 명문을 새기라도 그 아름다움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용뉴의 천판(天板) 부분(상원사 종), 종 몸체 내부(선림원지 종), 또는 별도의 명문곽(銘文廓)을 만들어 한쪽에 배치한 당시 장인들의 배려와 겸손을 결코 경외시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우리나라 종 가운데 이 용주사 종처럼 처음부터 명문을 새기지 않은 예도 그리 흔치 않다. 그러나 원래부터 명문이 없다는 것이 불행이 되었는지 용주사 종은 결국 후대에 왜곡된 명문을 조작할 수 있었던 빌미를 제공해 주고 말았다. 이 용주사 종은 명문이 없더라도 단정한 외형과 정교한 문양, 주조기술 면에서 보더라도 당대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오히려 본래 그 가치가 높은 종에 명문을 왜곡시킴으로서 의미를 추락시킨 커다란 우를 범하고 만 것이다.


최근 들어와 명문이 없는 범종에다 가격을 높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명문을 새기는 경우는 간혹 볼 수 있지만 이 용주사 종은 사찰에서 이루어진 문화재 훼손의 최초 사례인 점에서 씁쓸하기까지 하다. 문화재에 끌을 이용하여 손상시키는 것도 모자라 아예 나이를 올려 버린 이 심각한 역사의 왜곡이 근대 우리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용주사 종의 잃어버린 나이를 다시 우리 손으로 되돌려 주어야 할 때이다.

 

최응천

 

글 사진 = 최응천 /현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동국대학교와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구주대학에서 ’한국 범음구(梵音具)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입사하여 학예연구사, 학예연구관을 거쳐 2002년 초대 국립춘천박물관장과 전시팀장, 아시아부장, 미술부장을 역임한 뒤 현재는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와 동 대학 박물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2005년부터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과 2009년부터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면서 『불교미술대전』,『갑사와 동학사』,『금속공예』 등의 저서와 「일본에 있는 한국 범종의 종합적 고찰」, 「미륵사지 출토 금동 수각향로의 조형과 편년」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출처 : 문화유산채널 2015년 8월 6일 현재

 http://www.k-heritage.tv/hp/hpContents/story/view.do?contentsSeq=696&categoryTyp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