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우리 종 공부하기

종명 (鐘銘)

korman 2015. 8. 7. 21:15

 

 
범종(梵鐘)은 법고(法鼓)ㆍ목어(木魚)ㆍ금구(禁口)와 함께 그 소리에 불교의 진리를 실어 전하는 법구(法具)사물(四物)의 하나로 불교 공예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범종은 상원사종이 현존 최고의 것인데 신라시대 이후로 세부 양식과 음향에서 ‘한국종(韓國鐘)’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보이며 제작되었다.
 


 

 


[그림 1] 성덕대왕신종
 

신라 범종의 모양은 위가 좁아지는 원통형으로 어깨 부분과 아래쪽에 상대(上帶)ㆍ하대(下帶)라 불리는 문양대를 두르고 있다. 또 상대에 붙여서 네 곳에 유곽(乳廓)이라고 불리는 4각형 속에 9개의 유두(乳頭)가 있다. 그 아래 복부에는 2개의 당좌(撞座)비천상(飛天像)을 대칭으로 배치하고 있다. 종을 매다는 용뉴(龍紐)는 허리를 구부린 한 마리의 용(龍)의 모습으로 만들고 그 옆에 원통형의 용통(龍筒)을 세우고 있다. 특히 신라종의 용통은 내부를 뚫어 종신의 내면과 천판(天板)을 통하여 서로 맞뚫리게 한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몸체에 종명(鐘銘)이 새겨져 있다.

한국 종의 대표적 걸작은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국보 제29호)이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이 종은 봉덕사종, 에밀레종이라고도 하며 높이 333㎝, 구경(口徑) 227㎝이다. 현존 최대의 동종으로 제작 기술과 화려한 장식뿐 아니라 종소리에서 통일신라의 높은 공예 수준을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종은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고 신라 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려는 목적에서 경덕왕 때 주조하고자 계획하여 771년(혜공왕 7)에 완성되었다. 종신에 2구씩 마주보고 있는 비천상이 두 곳에 있으며 장문의 종명(鐘銘)이 양각되어 있다.
630자의 서(序)와 200자의 명(銘)으로 된 이 종명을 지은이는 김필오(朝散大夫 兼太子朝議郞 翰林郞 金弼奧)이고, 글씨는 김부환(翰林臺書生 大奈麻 金符晥)이 해서체로 서를, 요단(待詔 大奈麻 姚湍)이 행서체로 명을 썼다. 뛰어난 문장으로 평가되는 이 종명은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고, 종소리를 통해서 그 공덕이 널리 퍼지게 해서 국태민안(國泰民安)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발원이 담겨 있다.
서문에서는 먼저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을 깨닫게 하는 종소리의 신령스런 효용을 말하고 이어서 성덕왕의 공덕을 찬양하고 그 공덕을 종에 담아서 영원히 기리며 종소리와 더불어 나라가 평화롭고 백성들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발원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효성스런 후계자인 경덕왕이 성덕왕의 명복을 빌며 종을 주조하고자 하였으나 세상을 떠나고 태후와 그 아들인 혜공왕이 그 뜻을 이루었음을 기렸다. 종이 완성되자 그 신비로움을 서술하고 종소리와 함께 왕업이 더욱 번창하고 모든 중생이 깨달음의 길에 오르기를 기원하였다. 이어지는 사(詞)는 4자구(四字句)의 시(詩)로 종을 완성한 공덕을 기리고 마지막에 “원만하게 빈 속에 신기한 몸체가 바야흐로 성인의 자취를 드러내었다. 영원히 큰 복이 되고 항상 장중하리라” 고 다시 한번 종을 찬탄하였다. 또 주종 사업에 참여한 13인의 관직과 이름을 열거하고, 대력(大曆) 6년 신해 12월 14일이라고 완성한 날짜를 기록하였다.
 


 
[그림 2] 성덕대왕신종명문(왼쪽 위) [그림 3] 성덕대왕신종 용뉴와 음통(왼쪽 아래) [그림 4] 성덕대왕신종 비천상
 


 
성덕대왕신종과 함께 신라 범종을 대표하는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은 725년(성덕왕 24) 제작되어 현존 범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그 형태도 아름답다. 상원사 동종의 종명은 용뉴 옆의 천판(天板)에 음각되어 있는데 종에 들어간 놋쇠의 양과 절의 승려와 단월(檀越)을 기록하였다. 지방의 한 사찰에서 행해진 불사(佛事)의 실제 내용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성덕대왕신종과 상원사종 외에 몇 개의 종 파편과 명문이 전하고 있다. 그 가운데 무진사종(无盡寺鐘)은 종 표면에 명문과 함께 비천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745년 종을 주조하고 모든 단월과 일체 중생이 고(苦)를 떠나 안락을 얻기를 서원하였다. 양양의 선림원지(禪林院址)에서 출토되어 파손된 채 남아있는 선림원종은 804년(애장왕 5)년 제작되었고 종신의 내부에 이두로 된 명문이 있다. 제작연대와 승려, 시주자 등을 기록하였는데, 옛 종의 쇠를 모아
  [그림 5] 상원사동종  

 
밑천을 삼고 사방의 단월들이 권하여 이루었으며 법계 유정(有情)이 다 불도(佛道)에 이르기를 기원하였다. 청주 연지사(蓮池寺)의 종은 정유재란에 약탈당하여 일본에 있는데 833년(흥덕왕 8) 제작한 것으로 들어간 쇠와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았다.
규흥사종(竅興寺鐘)은 일본에 반출되어서 없어졌으나 명문은 남아 있다. 856년(문성왕 18) 종을 완성하고 들어간 놋쇠와 가격, 모든 이가 깨달음을 이루기를 바라는 서원과 불사에 참여한 인명을 기록해 놓았다. 송산촌 대사(松山村 大寺)의 종은 904년(효공왕 8) 완성된 것인데 당좌와 비천상 중간의 네모형 곽에 뒤집힌 자형으로 명문이 양각되어 있으며 역시 참여한 사람의 이름과 들어간 쇠의 양을 기록하였다. 이처럼 종명은 종을 주조한 시기와 들어간 놋쇠의 양, 모든 중생이 깨달음을 이루기를 바라는 발원 내용과 종을 만드는데 참여한 승려와 단월, 직접 제작한 장인의 이름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종명은 통일신라시대 절에서 이루어진 불사의 구체적 내용과 함께 승관제(僧官制)에 대하여 살펴보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아울러 이두가 쓰여 있기도 하여 이두 연구에도 중요하다.
 


 

 
범종과 그 소리가 상징하는 의미는 성덕대왕신종명의 서에 잘 밝혀져 있다. “지극한 도(道)는 형상의 바깥을 포함하므로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가 없으며, 큰 소리는 천지 사이에 진동하므로 들어도 그 울림을 들을 수 없다. 이 때문에 가설(假說)을 열어서 삼승(三乘)의 심오한 가르침을 관찰하게 하고 신령스런 종을 내걸어서 일승(一乘)의 원만한 소리(圓音)를 깨닫게 한다”
 


 
※주제어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금구(禁口), 법구(法具) 사물(四物), 한국종(韓國鐘), 문양대, 유곽(乳廓), 유두(乳頭), 당좌(撞座), 비천상(飛天像), 용뉴(龍紐), 용통(龍筒),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국보 제29호), 봉덕사종, 에밀레종,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무진사종(无盡寺鐘), 선림원종, 청주 연지사(蓮池寺)의 종, 규흥사종(竅興寺鐘), 송산촌 대사(松山村 大寺)의 종, 승관제(僧官制)

 

 

출처 : 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 2015년 8월 7일 현재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research&No=3&Num=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