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모두가 내 탓이거늘

korman 2017. 4. 8. 17:07






두가 내 탓이거늘


한 15년 정도 흘러갔을까? LA지역으로 기억되는데 미국의 한 한국 가정에서 불이 났다. 엄마가 직장에 나간 틈에 어린 아이 혼자 있는 집에서 난 불이라 아이는 그 화재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경찰은 엄마를 조사하였고 엄마는 아이를 잃은 슬픔에 경찰이 보고 있음에도 “내 탓이요, 내가 죽였어”라고 한탄을 하였다고 한다. 한국 엄마의 순 한국식 한탄이었다. 그런데 그게 문화적인 차이로 미국 경찰에게는 엄마가 아이를 죽였다고 자백한 경우가 되어 고초를 겪고 이 문화적인 차이를 미국 경찰과 재판정에 납득시키는 데 매우 어려움을 겪었다는 뉴스를 접하였었는데 그 후 그녀가 어떤 판결을 받았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처럼 한국 부모들의 대부분은 자기 자식이 잘못 되면 자신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1990년도로 나왔다. 당시 한 종교단체에서 ‘내 탓이오’운동을 벌렸었다. 뒤따라오는 자동차에 탄 사람들이나 길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자신의 자동차 뒷유리에 ‘내 탓이오’라고 쓰인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것이었다. 모든 잘못된 일들이 남의 탓이 아니라 내가 잘못해서 그리 된 것이라는 사회적 캠페인이었다. 나도 자신들의 종교와는 관계없이 참 좋은 사회운동을 벌리고 있다고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 종교를 믿고 계신 절친한 분이 내게도 스티커를 건넸지만 난 차 유리에 붙이지는 않았다. 대신 그 분에게 차 안 운전대 앞에 스티커를 붙이라고 말씀드렸다. 왜냐고 묻기에 “차 안에 붙여야 내가 매일 보면서 다 내 탓이구나 생각하지 차 뒤에 붙이고 다니면 뒤에 오는 사람에게 당신 탓이요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대통령이 탄핵되고 관련자들이 줄소환되어 조사를 받거나 벌을 받고 있다. 그들은 경찰과 검찰에 하나같이 대통령 탓만 하였다. 몇몇 기업인 말고는 모두가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한 행동 모두가 내 탓은 없었다. 재직시에는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 받는 사람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자기 생각은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국민의 공복이라는 말은 그들의 혓바닥 위에서만 놀았는지 그저 대통령이 하라고 하면 무조건 행하는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쳇말로 ‘예스 맨’일 뿐이었다. 조선시대에도 늘 “지당하시옵니다 전하”만 외치던 중신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무어라 불린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아니되옵니다”하다가 스스로 낙향을 하거나 잘못되면 죽임도 당하였다. 지금은 설사 반대를 한들 그 직에서 물러나는 일 밖에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포도청을 생각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저 국민들 보다는 그들의 권력이 더 중하여 스스로 ‘예스 맨’이 되었다. 그러니 내 탓이 있을 리가 없다.


미국의 한국엄마는 자식의 죽음을 모두 자기 탓으로 돌렸다. 문화적인 이해의 차이로 고초를 겪으면서도 자기 탓으로 돌렸다. 외부에서는 그가 짐승만도 못하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그들의 우두머리를 어버이라 부른다. 친부모 위에 그가 존재하며 모든 인민을 그가 돌보고 보듬어준다고 한다. 비록 북한식 표현이 아니라도 대통령은 국가와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나라와 국민이 잘못되었다면 그건 어버이의 심정으로 ‘내 탓이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탄핵의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 심정은 아닌 듯하다. 혹 국민들에게 “나를 뽑은 건 국민들이니 내 탓은 아니고 국민들의 탓이다”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며칠 전 중소기업에서는 학교,과,토플 등 따지지 않으니 오기만 해 달라고 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사람이 없어 일을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없어 취직이 안 된다고 한다. 그럼 누구 탓일까? 불법이라 할지라도 외국인 노동자들은 왜 우리 땅에 그리 많이 와 있을까? 쉽건 어렵건 돈이 작건 많건 그들이 하는 일도 모두가 우리의 일자리는 틀림이 없는데. 누구나 일류기업이나 대기업에 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두가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무리 큰 회사라도 모두를 포용할 수는 없다. 일자리가 없는 것인지 내가 부족한 것인지를 따지면 달걀과 닭의 관계는 아닌 듯싶다. 누구의 탓인지는 본인들이 더 잘 알테니까.


오늘 뒷유리에 ‘귀한 내 새끼 차 안에 있다’라는 문구와 조롱하는 듯한 그림이 함께 있는 스티커를 붙인 차를 보았다. 누구보고 어쩌라는 뜻인가? ‘귀한 내 새끼 잘못되면 당신 탓이니 당신이 책임지라’고 조롱하는 것인가? 부모의 탓은 없는 자식에 대한 무책임의 극치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잘못되는 것 모두는 남의 탓이라 하기 이전에 우선은 내 탓이 아닌가 생각해 봐야 하거늘 과거와 같은 운동이 다시 필요한 세상이 아니라 할 수 없게 되었다.


2017년 4월 8일

하늘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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