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의 창으로 석양을 보았다. 천둥과 번개와 바람과 비 그리고 이것들이 지나간 뒤 창문을 열었다. 큰 비바람이 미세먼지마저 걸러 가버린 후 살랑거리는 미풍이 풋내 나는 공기를 방으로 밀어 넣었다. 검었던 하늘이 걷히고 열어놓은 동창으로 석양이 들어왔다. 먼 산 밑의 아파트 서쪽창문들이 모두 붉은빛을 머금었다. 동쪽의 창으로 저녁노을을 바라보았다. 서쪽으로 보아야만 저녁노을이 아님을 이 저녁에 알았다. 냉장고에서 빨간 뚜껑의 초록색 병을 꺼냈다. 한 잔에 추억이 돋아나고 두 잔에 님이 그립다. 곁에 있어도 그리운 게 님이라 하였던가 옆에 있는데 왜 그리울까? 시인의 마음에 님은 다른 곳에 있었겠지. 혼술 두 잔에 마누라에 그 흉내를 냈다. 병을 다 비우고 TV를 보다 마누라 잔소리를 들었다. “끄더끄덕 졸지 말고 방에 들어가 주무세요.“ 그래도 TV를 보면서 조는 게 더 좋다. 그게 꿀잠이다. 내 블로그에 시애틀 글 친구가 댓글을 달았다. 암 진단을 받았다했다. 먼저 수술 받은 내 마누라 이야기를 물었다. 시애틀에 비가 많이 온다는데 내 마누라가 그랬던 것처럼 그 친구의 가슴에도 비가 내렸겠구나. 시애틀 유니온 호수 그 수상가옥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기분이 어떠냐고 문학적으로 묻고 싶었는데 묻지 못했다. 저녁노을을 동쪽으로 전하던 아파트 스카이라인 실루엣 위로 노란 달이 솟았다. 그 달에 아직 투병중인 마누라의 완쾌와 시애틀 친구의 마음속 고통이 살아지기를 빌었다. 아무리 바라봐도 노안에 시력이 떨어졌는지 계수나무와 토끼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악간 옆구리가 들어간 둥근 달은 중천으로 향하고 있다. 이제 침대로 가야겠다. 2017년 5월 13일 하늘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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