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갑질의 공평한 사회

korman 2017. 6. 30. 12:01




갑질의 공평한 사회


공평(公平)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 첫 머리에는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고름”이라고 나와 있다. 이 단어는 우리 사회 어디에건 따라다니는 말이다. 공평한 사회를 시작으로 공평한 대우와 공평한 재판, 공평한 분배 등등. 그런데 이게 말 그대로 지켜지면 그야말로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될 테지만 실정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최근에 들어서 뉴스에 ‘갑’과 ‘을’이 많이 등장한다. 뉴스대로라면 ‘갑’이 무조건 나쁘다. 그래서 ‘갑질’이라는 말이 나왔다. 갑이나 을이나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간지(干支)의 기본이다. 그러나 간(干)을 이루는 열 개의 글자 중에 ‘갑(甲)’이 으뜸이라 하였으니 다음으로 이어지는 ‘을병정무기경신임계’에서 ‘을(乙)’은 자연적으로 2등이라 하겠다. 즉, 갑이 우두머리인 셈이니 서열상으로 을은 우두머리를 모시는 차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갑질이 없을 수가 없다. 우리는 모두 종적으로 이루어진 계열사회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다.


갑과 을은 계약서를 쓴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계약서를 쓴다하면 사는 사람은 둘 사이에 묵시적으로 ‘갑’이 되고 파는 사람은 ‘을’이라 칭하며 계약서에 자신들의 이름 대신에 스스로를 갑과 을이라는 약칭을 쓴다. 그리고 서명난에서 갑은 위에 기록되고 을은 밑에 기록된다. 그렇게 서열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종적인 계열에 숙달된 우리는 그저 갑이 위에 있고 을은 밑에 있다는 것에 익숙해져 갑이 좀 무리한 요구를 해도 을은 군대에서 명령을 준수하는 것처럼 요구를 준수하도록 훈련되어져 있고 갑은 사령관처럼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군대에서 항명을 하면 감방신세가 되듯 갑질에 대항하면 을은 서글퍼지는 것이다. 너무나 오래된 사회적 관습이다 보니 그저 당연시 생각되어 쉽게 바뀌지가 않는다.


내 경험 내에서는 우리가 좀 공평한 사회라고 알고 있는 서양의 계약서에는 갑, 을이 없었다. 우리처럼 쓰려면 그들은 약칭으로 ‘A,B'를 써야 하겠지만 그들은 그런 간단한 글자를 마다하고 대신 글자 수는 좀 많아도 상호 회사이름의 약자를 만들어 쓰던가 아니면 서로의 역할을 썼다. 즉, ’구매자‘, ’판매자’ 혹은 ‘공급자’, ‘공급받는자’ 등등. 구매자나 공급받는자는 우리의 갑이고 판매자나 공급자는 을인 셈이다. 그리고 서명난에도 위아래는 없었다. 서로 같은 줄에 나란히 기록되었다. 외교문서에 위아래가 없는 것처럼. 그렇다고 그들 사회는 완전히 공평할까? 나는 그리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우리보다는 많이 공평하고 법을 더 잘 준수한다는 것일 뿐. 우리는 갑이 상거래의 도덕성은 둘째 치더라도 법의 허점을 무수히 연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신용카드를 쓰고 있다. 전문 카드사 카드도 있지만 대부분 은행에서 발급한 카드다. 그리고 정해진 결제일에 은행에 대금을 입금한다. 여기서 결제일이라 함은 은행업무 마감시간 전을 뜻한다. 그러니 정해진 날 오후 4시 이전이라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부도 처리되고 당사자의 신용은 내려간다. 또한 부도된 기간만큼 고액의 이자를 물어야 하고 다시 카드를 쓰는데 제약을 많이 받는다. 그런데 통장잔고에서 자동으로 빠져나가는 대금은 언제일까 살펴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 은행업무가 시작되는 9시30분? 상식적으로는 그래야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카드를 쓰는 사람이 은행 마감시간을 넘기면 부도처리하면서 자기들은 업무가 시작되기 훨씬 전인 새벽 3시~4시 사이에 잽싸게 인출한다. 내가 카드를 가지고 있는 2개의 은행은 그렇다. 카드전문사는 12시 이후에 인출하였다. 공평이라는 말이 존재한다면 인출이나 입금 모두 은행 업무시간 내에 이루어져야 한다. 입금자가 부도되어 이자를 물어야 한다면 인출자도 업무시간 이전에 인출한 것에 대해서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 이게 공평하다 하지 않겠나?


갑질이 없어지려면 법집행 이전에 사회통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갑과 을사이의 인식 변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문서에서 ‘갑과 을이라 칭한다’는 글귀부터 사라지고 서명의 위아래가 없어져야 한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것이 인식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벌써 올해의 절반이 지나갔다. 덥다. 갑질이 없는 사회가 되면 을의 여름이 좀 시원해 질 텐데......


2017년 6월 30일

하늘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