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고려의 종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건통7년명종

korman 2018. 3. 19. 13:52

천북관세음사종(川北觀世音寺鐘)

(건통7년명종)

사진출처 : https://www.nishiaraidaishi.or.jp/info/treasure05.html

문화재명 : 천북관세음사종(川北觀世音寺鐘)

시대 : 고려연대1107년(예종2년)

유형 : 종명·금구명

크기 : 높이 약 47.7cm, 입지름 약 57cm

소재지 : (일본)도쿄(東京)국립박물관

서체 : 미상찬자/각자/서자미상 / 미상 / 미상

 

개관

높이 47.7cm에 불과한 소종이지만, 12세기 초 범종의 양식적 특징을 규명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보주를 물고 있는 용뉴(龍?)와 당초문으로 간략화시킨 음통(音筒)에서 후기 범종의 초기적 양식을 볼 수 있다. 상대와 하대는 동일한 크기이면서 같은 용범(鎔范)에 의한 모란당초문을 유려하게 장식하였으며, 상대 아래 붙은 4개의 연곽대에도 동일한 양식의 모란당초문이 시문되었다. 연곽 안에는 8엽의 화문좌(花紋座) 위에 표현된 연뢰를 9개가 아닌 4개로 간략화시킨 점이 독특한데, 연뢰가 4개만이 표현된 것이 이 종이 유일하다. 연곽 아래 종신의 중단쯤에 합장한 단독의보살좌상이 앞뒤로 높게 부조되었고, 보살상 좌우로는 천의를 날리며 무릎을 끊은 공양상이 각 1구씩 장식되어 있다. 이 보살상을 사이에 두고 종신 한쪽면 연곽 바로 아래에는 연주문대로 구획한 방형의 명문곽을 만들어 7행의 음각명을 새워 놓았다. 명문에는 사찰의 명칭(川北觀世音寺), 참여한 인물, 종의 무게, 제작연대(乾統七年丁亥:1107년) 등이 기록되었다. 제작연대가 확실하여 12세기초 범종의 양식적 특징을 규명해 볼 수 있는 좋은 편년자료로 4개의 연뢰만을 지닌 독특한 의장과 함께 세부장식이 정교한 수작으로 꼽힌다.

 

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유산 연구지시포털 2023년 1월 12일 현재

https://portal.nrich.go.kr/kor/ksmUsrView.do?menuIdx=584&ksm_idx=3177#link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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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건통7년명종

 

 

 

 

 

 

 

 

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소 2000년간 고려범종-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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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20> 건통7년명 

범종한국범종 특징 벗어난 유일한 사례 ‘주목’

 

9개씩 표현된 연뢰와 달라

일반 종에 비해 검은 색조

소형화된 고려 범종 특징도

12세기 양식 규명 중요자료

 

이 종은 원래 키다자와(北澤國男)라는 개인이 소장하였던 작품이었으나 지금은 도쿄(東京) 박물관에 기증되어 현재는 동양관(東洋館) 한국실에 전시되어 있다. 건통7년(乾統7年)인 1107년에 제작된 것이란 명문을 지니고 있어 도쿄박물관에 있는 한국 종 가운데 가장 연대가 앞선 작품이다. 

 

앞서 소개한 바 있는 태안7년 장생사(長生寺) 종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소형화되는 고려시대 범종의 특징을 여실히 구비하여 그 총고가 47.7cm에 불과하다. 특히 이 종은 한국 범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인 연곽 안에 연뢰가 9개씩 표현되는 양식적 특징에서 벗어나 4개씩의 연뢰가 표현된 유일한 예로서 주목된다. 

 

이밖에도 이 종이 지닌 특징을 살펴보면 용뉴의 입은 천판에서 약간 떨어져 입 안에 보주를 물고 있으나 앞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으며 입의 가장자리로는 뭉툭한 송곳니와 길게 뻗은 갈기가 묘사되었다. 목은 기타의 종에 비해 가늘고, 음통 역시 세장하여 이 곳에는 간략한 당초문과 함께 날개(焰翼)와 같은 장식을 부조로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이러한 음통에 표현되는 날개 장식은 이후 제작된 고려 범종에 널리 사용된 점에서 그 시원적 모습이라 추측된다. 음통에 붙은 왼쪽 발은 비늘까지 세세히 묘사되어 뒤로 뻗쳐 있고, 오른쪽 발은 위로 든 채 작은 보주(寶珠)를 움켜쥔 모습이다. 

 

이 용뉴(龍)와 음통 주위를 돌아가며 원형의 주물(鑄物) 자국이 돌출되어 있어 용뉴 부분을 종신과 별도로 밀납으로 조각하여 주조함으로써 이러한 주물 자국이 확연히 남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천판의 외곽으로는 21엽의 복판복엽(複瓣複葉) 연화문(蓮花文)을 둥글게 돌아가며 촘촘하게 배치하였다. 이러한 독립 문양대는 입상화문대(立狀花文帶)가 표현되는 12세기 후반까지의 고려 전기 범종에서 널리 찾아볼 수 있는 형식이다. 

 

소종의 경우 그 예가 드문 편이지만 이 종은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을 정교히 표현함으로써 세부까지 정성을 들여 제작한 수작임을 입증해 준다. 상대와 하대는 유려한 모란 당초문을 장식하였는데, 동일한 크기이면서 거의 같은 형태란 점에서 동일한 문양판(文樣板)을 반복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하대 부분은 상·하단 모두 연주문(連珠文) 띠를 두른 반면, 상대에는 하단에만 장식된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상대 아래의 사방에 배치된 방형 연곽대(蓮廓帶)에도 동일한 형식의 모란당초문이 시문되어 있으나 보다 간략하고 연주문대의 표현은 생략되었다. 

 

연곽 안으로는 8엽으로 구성된 화문좌(花文座) 위에 납작하게 표현된 4개의 연뢰(蓮)를 장식하였다. 우리나라 종은 통일신라 상원사종(上院寺鐘)을 시작으로 종의 크기와 관계없이 한 연곽 안에 반드시 9개씩의 연뢰를 표현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으로서 중국이나 일본 종과 달리 연뢰의 수효에 대해서는 엄격한 규칙성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4개로 표현된 연뢰는 이 종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예로서 종의 크기에 비례하여 간략화 시킨 현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후 제작된 이보다 더 작은 종에서도 9개씩의 연뢰가 표현된 점에서 그 의미에 대해서는 검토가 필요할 것 같다. 

 

연곽 아래 종신의 중단쯤 앞, 뒤 방향으로는 연화좌 위에 앉아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합장(合掌)한 모습을 한 단독의 보살좌상(菩薩坐像)이 표현되었다.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갖추고 머리 위로는 삼산형(三山形)의 보관(寶冠)을 썼으며 그 주위에 화려한 영락이 흘려내려 어깨에까지 이르고 있다. 

 

얼굴은 둥글면서도 팽팽히 살이 올랐고 입에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다. 양 어깨에 걸친 얇은 천의(天衣) 아래로 신체의 굴곡이 잘 묘사되었고, 삼도(三道) 밑에는 목걸이와 어깨, 팔목 부분에 팔찌까지 장식되어 매우 화려하게 꾸며졌다. 더욱이 다른 곳의 장식 문양에 비해 이 부분만을 양감 있는 고부조(高浮彫)로 표현하여 보다 사실적으로 묘사한 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 보살상 좌·우편으로는 몸을 왼쪽으로 돌린 채 무릎을 꿇고 천의를 날리는 공양상(供養像)이 각 1구씩 장식되어 있고 그 하단에는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2개의 비운문(飛雲文)이 표현되었다. 이 보살상을 사이에 두고 종신 한쪽 면 연곽 바로 아래로 방형의 명문구(銘文區)를 두어 7행 57자의 음각 명문을 새겼다. 

 

이러한 방형의 명문구는 천흥사종(天興寺鐘: 1010), 청녕4년명종(淸寧四年銘鐘:1058)에 보이는 위패형(位牌形) 명문구(銘文區)를 단순화시킨 모습으로서 그 외곽에만 연주문대(連珠文帶)를 둘러 구획하였다. 내부에 새겨진 명문은 앞서 11세기 범종에 보였던 유려한 필치와 달리 조금 투박한 글씨체로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판독된다. 

 

‘천북관세음사주법홍동, 량랑숭인도부호장동정, 적량주사수영명찬창, 사녕성장사국진대장○, 선등역성수천장지, 원이금종오십근, 건통칠년정해이월십구일(川北觀世音寺主法弘棟, 梁郞崇引道副戶長同正, 迪良州史守英明贊倉, 史寗成長士國眞大匠○, 先等亦聖壽天長之, 愿以金鍾五十斤, 乾統七年丁亥二月十九日)’ 

 

앞줄의 시납사원인 천북관음사(川北觀世音寺)의 소재는 명확치 않으며 절의 주지는(寺主)는 법홍(法弘)이고 동량(棟梁)은 낭숭(郎崇)이라는 인명과 주조(鑄造)에 관계된 부호장동정(副戶長同正), 양주사(良州史), 창사(倉史), 녕성장사(寗成長士)의 직급과 관직명이 기록되었다. 그리고 국진(國眞)은 인명이며 제작자는 ‘대장(大匠)’의 직위를 지닌 ‘○선(○先)’ 등이 성수천장(聖壽天長)을 발원하여 건통 7년인 고려 예종(睿宗) 2년인 1107년 2월19일에 50근의 중량을 들여 금종(金鍾)을 조성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명문구 바로 아래 하대와의 작은 공간에는 원형의 당좌(撞座)가 앞· 뒤 두 곳에 배치되었다. 1+8개의 연과(蓮顆)를 지닌 자방(子房)을 중심으로 팔엽 복판(八葉複瓣)의 연화문과 그 외곽을 연주문의 원권(圓圈)으로 두룬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도식적인 느낌이지만 입체감이 잘 살아있어 당시 와당(瓦當)의 문양을 연상케 한다. 비록 작은 크기의 소종이지만 12세기 초 범종의 양식적 특징을 규명해 볼 수 있는 중요한 편년 자료로서 가치가 높아 현재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일반적인 종에 비해 검은 색조를 띠고 있음은 주조 당시 주석(朱錫)의 함량이 많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여음(餘音)

 

범종의 명문에 기록된 ‘입중오십근(入重五十斤)’이란 중량을 파악하고자 실제 이 종의 무게를 달아본 츠보이 료헤이(坪井良平)에 의하면 그 무게가 29.625㎏으로 보고된 바 있다. 이 무게를 환산해 보면 당시의 1근(斤)은 약 0.5925㎏이라는 수치가 나온다. 그러나 근래 리움미술관 소장 경선사 금고(景禪寺 金鼓: 1214년)에 기록된 30근의 중량을 달아본 결과 15kg으로서 여기에서는 1근은 그보다 작은 약 0.5kg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1근의 무게도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리 쓰였음을 알 수 있어 앞으로 많은 자료를 비교 검토한다면 고려시대 중량 단위가 보다 명확히 밝혀질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불교신문3349호/2017년11월29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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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건통7년명종 (고려범종)

 

 

 

 

 

 

제작연도 1107
사조 불교미술
종류 범종
기법 청동
크기 높이 47.7 cm
소장처 동경국립박물관

 

이 종은 원래 일본의 한 개인 소장가의 소장품이었으나 지금은 동경박물관의 동양관 한국실에 전시되어 있다. 총 높이 47.7cm의 소종으로서 기타의 종에 비해 전체적으로 검은 색조를 띠고 있음은 주조 당시 주석()의 함량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용뉴의 입은 천판에서 약간 떨어져 입안에 보주를 물고 있으며 목은 기타의 종에 비해 매우 가늘게 묘사되었다. 세장한 음통에는 간략한 당초문과 함께 날개장식〔염익()〕이 별도의 조각이 아닌 부조로 되어 있음이 독특하다. 이 종에서는 특히 음통에 붙은 오른쪽 발을 위로 든 채 작은 보주를 움켜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고려 전기 종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이다.

천판의 외곽으로는 21개의 중판복엽()의 연화문을 방사선상으로 촘촘하게 배치하였다. 상대와 하대는 동일한 크기이면서 동범에 의한 모란당초문을 유려하게 장식하였으나 하대 부분은 상 · 하단 모두 연주문 띠를 두른 반면 상대에는 하단에만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상대 아래 붙은 4개의 방형유곽대에도 동일한 형식의 모란당초문이 보다 간략해진 형태로 시문 되었다. 유곽 안으로는 납작한 화문좌 형태의 8엽연화문 종유를 9개씩이 아닌 4개로 단축 표현하였는데, 종유가 4개만이 표현된 것은 이 종이 유일한 예이다.

유곽 아래의 종신 중단쯤의 앞 · 뒤로는 연화좌 위에 앉아 두 손을 모아 합장한 모습을 지닌 단독의 보살좌상이 고부조 되었다. 이 보살상은 두광과 신광을 지니고 머리 위로는 삼산형의 보관과 그 주위에 화려한 영락이 흘러내려 어깨에까지 이르고 있다. 얼굴은 둥글면서도 팽팽히 살이 올라 입에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으며 양어깨에 걸친 얇은 천의 아래로 신체의 굴곡이 잘 묘사되었다. 이 보살상 좌 · 우편으로는 몸을 왼쪽으로 돌린 채 무릎을 꿇고 천의를 날리는 공양상이 각 1구씩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그 하단에는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2개의 비운문()이 표현되어 있다.

한편, 이 공양자상을 사이에 두고 종신 한쪽 면 유곽 바로 아래에는 연주문대로 구획한 방형의 명문구를 만들어 이 안에 7행 57자의 음각명을 매우 서투른 필치로 새겨놓았다. 기록된 내용은 「천북관세음사주법홍동, 양랑숭인도부호장동정, 적량주사수영명찬창, 사녕성장토국진대장□, 선등역성수천장지, 원이금종오십근, 건통칠년정해이월십구일(□, )」 으로서 천복관세음사의 소재는 불명하며 건통 7년은 요의 말년에 해당하는 고려 예종 2년인 1107년에 해당한다. 특히 명문에 보이는 입중50근의 중량은 이 종의 실지 무게를 조사한 바로는 29.625kg이 되어 이 무게를 환산해 볼 때 1근은 약 0.5925kg에 근사한 수치가 나와 고려시대 중량연구에 참고되고 있다.

명문구 바로 아래 하대와의 공간에는 원형의 당좌가 앞, 뒤 두 곳에 배치되었는데 1+8개의 연과를 지닌 자방을 중심으로 8엽복판의 연화문과 그 외곽을 연주문의 원권으로 둘렀다. 이 종은 12세기 초 범종의 양식적 특징을 규명해 볼 수 있는 편년자료로서 4개의 종유만을 지닌 독특한 의장과 함께 세부장식이 정교한 수작으로 꼽힌다.

[네이버 지식백과] 건통7년명종 [乾統七年銘鐘, Buddhist Bell with Inscription of 1107 Year]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75936&mobile&cid=46705&categoryId=46705 2015년 5뤟 8일 현재

 

 

 

 

시대 고려
성격 범종
소장처 일본 동경국립박물관
제작시기·일시 1107년(예종 2)
재질 주석()
크기(높이, 길이, 두께, 너비) 총고 47.7㎝

관리자

일본 동경국립박물관



 

 

 

 

 

 

 

 

 

 

 

 
[정의]
고려시대의 종.
[내용]
1107년(예종 2) 제작. 총고 47.7cm. 일본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다른 종에 비하여 전체적으로 검은 색조를 띠고 있음은 주석(朱錫)의 함량이 많기 때문으로 보인다. 용뉴(龍鈕 : 종의 꼭지부분 장식)의 입은 천판(天板)에서 약간 떨어져 보주를 물고 있으며, 목은 다른 종에 비해 매우 가늘게 묘사되었다.
세장한 음통(音筒 : 음관)에는 간략한 당초문과 함께 날개장식[焰翼]이 별도의 조각이 아닌 부조로 되어 있음이 독특하다.
이 종에서는 특히 음통에 붙은 오른쪽 발을 위로 든 채 작은 보주를 움켜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고려 전기의 종과 뚜렷히 구별되는 특징이 되고 있다. 천판의 외곽으로는 21개의 중판복엽(重瓣複葉)의 연화문을 방사선상으로 촘촘하게 배치하였다.
상대(上帶)와 하대(下帶)는 동일한 크기이면서 동범에 의한 모란당초문을 유려하게 장식하였으나 하대 부분은 상하 부분 모두 연주문띠를 두른 반면, 상대에는 아래에만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상대 아래 붙은 4개의 방형 유곽대에도 동일한 형식의 모란당초문이 보다 간략해진 형태로 시문되었다.
유곽(乳廓) 안으로는 납작한 화문좌(花文座) 형태의 8엽 연화문 종유(鐘乳)를 9개씩이 아닌 4개로 단축 표현하였는데, 종유가 4개만 표현된 것은 이 종이 유일한 예이다.
유곽 아래의 종신 중단쯤의 앞뒤로는 연화좌 위에 앉아 두 손을 모아 합장한 모습을 지닌 단독의 보살좌상이 고부조(高浮彫)되었다.
이 보살상은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지니고 삼산형(三山形)의 보관을 썼으며 그 주위에 화려한 영락이 흘러내려 어깨에까지 이르고 있다. 얼굴은 둥글면서도 팽팽히 살이 올라 입에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으며, 양 어깨에 걸친 얇은 천의(天衣) 아래로 신체의 굴곡이 잘 묘사되었다.
이 보살상 좌우편으로는 몸을 왼쪽으로 돌린 채 무릎을 꿇고 천의를 날리는 공양상(供養像)이 각 1구씩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그 하단에는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2개의 비운문(飛雲文)이 표현되어 있다.
한편 이 공양자상을 사이에 두고 종신 한쪽면 유곽 바로 아래에는 연주문대(蓮珠文帶)로 구획한 방형의 명문구(銘文區)를 만들어 이 안에 7행 57자의 음각명을 매우 서투른 필치로 새겨 놓았다.
기록된 내용은 ‘川北觀世音寺主法弘棟 梁郞崇引道副戶長同正 迪良州史守英明贊倉 史寗成長士國眞大匠□ 先等亦聖壽天長之 愿以金鍾五十斤 乾統七年丁亥二月十九日(천북관세음사주법홍동 양랑숭인도부호장동정 적량주사수영명찬창 사녕성장사국진대장□ 선등역성수천장지 원이금종50근 건통7년정해2월19일)’이다.
천북관세음사’의 소재는 알 수 없으나 건통7년은 요의 말년인 고려 예종 2년인 1107년에 해당된다. 특히 명문에 보이는 50근의 중량은, 이 종의 실제 무게를 조사한 바로는 29.625kg이 되어, 이 무게를 환산해 볼 때 1근은 약 0.5925kg에 근사한 수치가 나와 고려시대의 중량 연구에 참고가 되고 있다.
명문구 바로 아래 하대와의 공간에는 원형의 당좌가 앞뒤 두 곳에 배치되었는데 1+8개의 연과(蓮顆)를 지닌 자방(子房)을 중심으로 8엽복판의 연화문을 장식하고 그 외곽을 연주문의 원권(圓圈)으로 둘렀다.
이 종은 12세기 초 범종의 양식적 특징을 규명해 볼 수 있는 편년자료로서 4개의 종유만을 지닌 독특한 의장과 함께 세부장식이 정교한 수작으로 꼽힌다.
 
[참고문헌]
  • 『朝鮮鐘』(坪井良平, 角川書店, 1974)
  • 「일본에 있는 한국문화재 9」(최응천, 『박물관신문』 247호, 국립중앙박물관, 1992)

출처 : 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66161&cid=46657&categoryId=46657

         2015년 5월 8일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