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에 다니는 외손자 녀석이 며칠 전 할아비에게 아이스크림을 사러가자고 하여 큰길가로 나섰는데 묻는 게 있었다.
“할아버지, 좋은 날인가 봐요?”
“왜?”
“슬픈 날은 태극기가 아래로 이만큼 내려오거든요.”
이 녀석은 할아비가 잡았던 손을 뿌리치고는 두 팔로 그 간격을 표현하였다.
“그래? 맞아. 어떻게 알았어?”
“엄마, 아빠가 가르쳐 줬어요.”
제헌절을 앞두고 관청에서 큰길가 가로등 기둥에 내건 태극기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이 녀석은 국경일 아침에 자기 집 베란다에 아비가 태극기를 걸면 매번 꼭 할아비에게 영상통화를 걸어와 할아비도 태극기를 걸었냐고 묻고는 걸었다고 하면 증거자료를 요청한다. 그래서 꼭 창밖 태극기 쪽으로 카메라를 돌려야 한다. 그런데 다행히 제헌절에는 태극기 걸었냐는 영상전화가 오지 않았다. 아마 휴일이 아니라 어미 아비가 출근 하느라 누구도 태극기 거는 걸 건사하지 않았고 자기도 유치원엘 가니까 태극기에 대한 생각을 잊은 모양이었다. 저녁에 전화가 왔지만 유치원에서도 태극기 거는 날이라는 설명이 없었던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집에서 아침을 맞은 날은 국경일에 태극기 거는 걸 빠트린 적은 없는 걸로 기억한다. 요새는 손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걸고 있다. 그러나 난 몇 년 전부터 제헌절에는 플라스틱 원통으로 된 태극기 보관통의 뚜껑을 열지 않는다. 혹자는 ‘휴일이 아니라서 안 걸거다’라는 편견을 가질 수 있겠지만 제헌절이라는 게 우리의 독자적인 헌법이 제정되고 법치국가의 길로 들어선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면 현재 우리는 법에 대하여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법을 만드는 기관은 입법부, 즉 국회다. 세월이 흐르면서 시대에 맞는 적절한 법을 적합한 시기에 발효되도록 만드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뉴스를 보면 각종 첨단기술이 제때에 법의 뒷받침이 되지 않아 다른 나라에 국제시장 선점의 기회를 내어주는 일도 있으며 국민의 안녕을 위하여 사회적으로 시급히 해결되어야 하는 일들에 관련법이 제정되지 않아 국민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사례들도 있다. 각종 매체들은 그 성향에 따라 여가 나쁘다 야가 나쁘다 하지만 한 국민으로써 나에게는 실내체육관 둥근 지붕아래 다 똑같은 모습일 뿐이다. 내로남불이 가장 심한 곳 중의 하나가 그곳이기도 하니까. 그래도 그들은 기쁘다 제헌절 오셨네 하고 기념식을 성대히 치른다.
가끔 난 ‘우리는 법 없이 산다’는 말을 한다. 법적인 제재가 없어도 주어진 상식과 도덕과 윤리와 관례대로 타인을 배려하며 살면 그게 법 없이 사는 사회가 되겠으나 불행하게도 내가 근자에 느끼는 법 없는 사회는 법은 있으되 지키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그 법을 집행하여야 하는 행정관서도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것 같아 그 의미로 법 없는 사회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경찰이 발표하고 검찰이 발표하고 하는 거창한 것들 보다는 국민들이 얼른 느낄 수 있는 것은 기초생활과 사회기본질서에 관한 법 같은 것들이다. 사실 이런 법들은 지키면 내가 불편하고 안 지키면 남이 불편한 양날의 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법을 집행하는 행정기관이 있지만 집행은 딴 나라 이야기인지 ‘나만 좋을 대로’가 늘어가기만 한다. 법은 있으되 집행을 안 하니 남이야 어떻든 나 좋으라고 안 지키고 살아가도 그만이다.
얼마 전 내 창문에서 내려다보이는 갈 사거리 코너마다 ‘주차금지’라는 노란색 글자가 쓰였다. 그 글씨가 없어도 사거리 코너에 주차하지 못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또한 작년인가엔 사거리 코너나 건널목에 불법주차한 차들은 특별단속 한다는 발표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곳 사거리와 건널목에는 꾸준히 주차가 이루어지고 심지어는 이중주차에 양 건널목을 아주 콕 막아서고 주차하는 사례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 특별단속이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 견인한다는 팻말이 있는 그 아래도 주차하는 판에 그런 글자를 바닥에 쓴다고 불법주차를 하지 않을까? 단속권을 가지고 있는 기관에서 발표한 법대로 집행을 하고 있다면 최소한 사거리 코너나 건널목을 양쪽에서 꽉 막아버리는 행위는 줄어들 것이다. 단속이 없는데 누가 그걸 지키겠나?
국회의원을 지내신 소설가 한 분이 쓴 소설 중에 ‘장총찬’이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이 있다. 법 이전에 스스로 못된 사람들을 징벌하는 그 주인공은 그 당시 답답하던 사회상 때문에 참 인기가 많았다. 요즈음은 장총찬이와는 다른 성격의 길거리 야구방망이가 등장할 때도 있다. ‘정말 법 없이 사는구나’라고 심각하게 느껴질 때는 장총찬이와 야구방망이 어디 없을까 하는 못된 생각을 가질 때가 있다. 사람들이 지키려하지 않는 법이라도 집행기관이 온당하게 집행을 한다면 그런 생각은 줄어들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법 없이 사는데 무슨 제헌절이 있으며 태극기를 걸어야 할까? 다행이 손자 녀석은 오늘 통화에서도 제헌절 태극기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걸 물어온다면 어찌 답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길거리 태극기는 오늘도 펄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