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인천에는 어찌 생각하면 한국 근대회의 유산이라 보이면서도 현 위치에서 생각하면 흉물중의 하나인 거대한 곡물 사일로가 있다. 지금은 도크를 통해야만 배들이 들어올 수 있는 내항에 접한 대형 콘크리트탱크(사일로라 부른다)로 인근에 있는 밀가루 공장 등에서 사용하는 수입곡물을 보관하던 곡물보관창고인 셈이다. 아파트와 비교하면 22층 높이라 하는데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콘크리트구조물 16개가 나란히 붙어 서있다. 곡물을 사용하는 공장이 아직도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으니 지금도 이 사일로는 사용된다고 하겠지만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도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어 그 나이가 환갑은 족히 넘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사실 이 사일로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공식적안 자료를 찾지 못하다보니 그리 생각한건 아닌지 모르겠다. 인천 개항장 해설사라는 분이 올 4월에 블로그에 올린 글에 40년 되었다 씌어 있으니 최소 그 나이는 되었을 테고 그 세월동안 몸은 점점 쇠퇴하여 흉물스럽게 변해온 것이다.
최근 이 흉물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도시와 항구의 미관을 살리기 위하여 그 위에 벽화라는 거대한 옷을 입힌 것이 그것이다. 집에서 멀지 않아 종종 찾아가는 월미도 공원에 인접해 있어 늘 보아왔던 그 늙은 콘크리트 구조물이 여러 사람들의 노고로 어느 날 도서관 서고에 꽂혀있는 16권의 거대한 책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테마는 “한 소년이 곡물과 함께 책 안으로 들어가 순수한 유년 시절을 지나 역경을 통해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장면을 표현했다.”고 하였다. 그림을 보면 벽의 옆으로 한 소년이 들어가고 반대편으로는 어른이 되어 추수한 곡물을 한 다발 들고 나오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추수된 곡식을 통하여 아이의 성공을 그려낸 것이리라. 그리고 이 벽화는 세계 최대 벽화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것은 물론이고 지난달까지 국제적으로 유명한 디자인상 같은 것을 여럿 수상하였다고 한다.
자칫 도시와 항구의 미관을 해칠 수 있는 낡은 콘크리트 인공구조물이 멋진 작품으로 재탄생하여 국내 다른 지역이나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그 명물이 속한 도시에 살고 있는 나에게도 기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난 이 작품을 보면서 작품을 평할 수 있는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그런 위치에 있지는 못하지만 단순히 눈에 띄는 대로 좀 섭섭함이 생겼다는 것을 숨길 수는 없다. 나란히 잘 꽂혀진 16권의 책 속에 한글이 적혀진 우리나라 책은 한 권도 없다는 것이고 책 속으로 꿈을 안고 들어가는 소년은 우리나라 아이와 비슷한 모습 같지만 성공을 하고 곡물을 한아름 안고 책에서 나오는 성인의 모습은 우리나라 사람의 통상적인 생김새보다는 서양인에 가깝게 보인다는 것 때문이다. 기네스북을 비롯하여 국제적 응모에 모든 작품은 서양식이여야 한다는 규정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벽화 속에 한글화 된 우리 책이 한 권쯤은 있어도 좋았을 것이고 장성한 아이가 우리나라 아이 였어도 좋았을 것 아니겠나 생각해 본다.
나야 보이고 생각나는 대로 평을 하였지만 작가의 내용적인 깊은 뜻은 달리 있을 수 있다. 디자인 면에서 서양책 속에 한글 책이 안 어울린다든지, 정말 그렇다면 단 또 “그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꼬집을 테지만 인천항이 국제항이고 그 내항에도 많은 대형 외국 화물선뿐만이 아니라 국제여객선 까지 정박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어찌 되었건 벽화 속에 서양과 우리문화가 어울리는 내용을 넣을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평소 대한민국의 제일 큰 관문인 인천공항이 대한민국의 문화적인 이름이나 역사적인 이름을 갖지 못하고 왜 지역 이름을 가져야 했을까 그리고 한국에 진입하는 첫 관문인 공항 고속도로 요금소나 인천대교 요금소 같은 것은 이곳이 한국임을 알리는 멋진 한국식 건축물임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나에게 벽화 속 우리 책이 없는 서고와 성공한 서양인의 모습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약간은 낯선 느낌을 가져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