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하늘빛 베레모의 세월

korman 2010. 3. 16. 19:59

 

 

 

하늘빛 베레모의 세월

 

토요일 새벽

여명의 빛도 아직은 이른 시각

그러나 어두움에도

잠들 줄 모르는 사람들은

그 새벽에 홀로 소음을 만들어

콘크리트 속 도시민의 선잠을 깨웠다.

 

몸은 잠자리를 벗어났으되

아직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뇌세포를 깨우기 위하여

분쇄된 원두의 향을 길게 들이마시고는

추출기가 엮어내는 또 다른 소음으로

여명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불빛도 없이 새벽에 커피한잔을 들고

무슨 생각으로

큰아이가 쓰던 그러나

지금은 빈 방에 놓여있는

오래된 장의 문을 열었을까. 그리고

큰아이의 옷이 떠나간 그곳

아직 어두움속에 열어놓은

장 밑바닥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한 쌍의 베레모.

하늘빛 고리와 하얀 방울이 아직 새것 같은

그건 40년 전의 추억, 그것이 거기 놓여있었다.

1970년에 시작된 추억이.

 

그런걸 주마등이라 했던가.

내게는 추억,

베레모에게는 역사가 된 세월이

커피 향에 섞이며

한 순간에 스쳐 지나고

시간은 문득 어제 저녁 친구가 보내온 채팅 메모에 와 멈추었다.

체력을 못 믿으니 아침에 동네 뒷산에나 오르겠다던 나를

관악산 순한 코스로 넘어 막걸리 한잔 하자고

굳이 회유하려던 친구.

그가 내 세월을 같이한 게 베레모보다 길거늘.

 

지난 세월

이 파란 베레모를 머리에 얹고

찌그러진 막걸리 주전자 두드려대며

홍도야 울지 말라고 외쳐댄 게

몇 번인가.

지금세월

막걸리 집에 아직 홍도가 있을까만

관악산 연주대를 넘으면 막걸리가 기다린다했으니

베레모의 추억으로 오늘 친구들과 관악산 마당바위에서

커피는 한잔씩 해야 하지 않을까.

여명을 바라보다 빈 장 바닥에 놓인 하늘빛 그것을 집어 들며

커피 한 사발을 더 끓여 보온병에 넣었다.

 

베레모 보다 오래된 친구들

베레모의 모양과 하늘빛은

처음과 같은데

지하철역에 모인 다섯 친구의

처음 모습은

빛바랜 흑백사진첩에만 남았다.

세월을 이기려 분칠을 좀 하긴 하였지만

연주암과 연주대도 그곳에 그 모습인데

가쁜 숨을 고르며 내려 본 속세에는

홍도가 놀던 막걸리집 대신에

갖가지 빛깔의 콘크리트 벽이 우후죽순처럼 자랐다.

   

친구 회유대로 순한 길은 아니었지만

바위를 기고 얼음길을 미끄러지며

산등 넘어

마주한 막걸리 사발

우리말을 잘 못 알아 듣는

조선족 주모가

주전자 대신 날라다 주는

플라스틱 병 막걸리와 김치두부에

홍도는 없었지만

베레모의 세월을 넘어선 친구들과의 시간은

또 다른 추억 부르고 있었다.

 

 

2010년 3월 열 나흗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