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빛 베레모의 세월
토요일 새벽
여명의 빛도 아직은 이른 시각
그러나 어두움에도
잠들 줄 모르는 사람들은
그 새벽에 홀로 소음을 만들어
콘크리트 속 도시민의 선잠을 깨웠다.
몸은 잠자리를 벗어났으되
아직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뇌세포를 깨우기 위하여
분쇄된 원두의 향을 길게 들이마시고는
추출기가 엮어내는 또 다른 소음으로
여명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불빛도 없이 새벽에 커피한잔을 들고
무슨 생각으로
큰아이가 쓰던 그러나
지금은 빈 방에 놓여있는
오래된 장의 문을 열었을까. 그리고
큰아이의 옷이 떠나간 그곳
아직 어두움속에 열어놓은
장 밑바닥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한 쌍의 베레모.
하늘빛 고리와 하얀 방울이 아직 새것 같은
그건 40년 전의 추억, 그것이 거기 놓여있었다.
1970년에 시작된 추억이.
그런걸 주마등이라 했던가.
내게는 추억,
베레모에게는 역사가 된 세월이
커피 향에 섞이며
한 순간에 스쳐 지나고
시간은 문득 어제 저녁 친구가 보내온 채팅 메모에 와 멈추었다.
체력을 못 믿으니 아침에 동네 뒷산에나 오르겠다던 나를
관악산 순한 코스로 넘어 막걸리 한잔 하자고
굳이 회유하려던 친구.
그가 내 세월을 같이한 게 베레모보다 길거늘.
지난 세월
이 파란 베레모를 머리에 얹고
찌그러진 막걸리 주전자 두드려대며
홍도야 울지 말라고 외쳐댄 게
몇 번인가.
지금세월
막걸리 집에 아직 홍도가 있을까만
관악산 연주대를 넘으면 막걸리가 기다린다했으니
베레모의 추억으로 오늘 친구들과 관악산 마당바위에서
커피는 한잔씩 해야 하지 않을까.
여명을 바라보다 빈 장 바닥에 놓인 하늘빛 그것을 집어 들며
커피 한 사발을 더 끓여 보온병에 넣었다.
베레모 보다 오래된 친구들
베레모의 모양과 하늘빛은
처음과 같은데
지하철역에 모인 다섯 친구의
처음 모습은
빛바랜 흑백사진첩에만 남았다.
세월을 이기려 분칠을 좀 하긴 하였지만
연주암과 연주대도 그곳에 그 모습인데
가쁜 숨을 고르며 내려 본 속세에는
홍도가 놀던 막걸리집 대신에
갖가지 빛깔의 콘크리트 벽이 우후죽순처럼 자랐다.
친구 회유대로 순한 길은 아니었지만
바위를 기고 얼음길을 미끄러지며
산등 넘어
마주한 막걸리 사발
우리말을 잘 못 알아 듣는
조선족 주모가
주전자 대신 날라다 주는
플라스틱 병 막걸리와 김치두부에
홍도는 없었지만
베레모의 세월을 넘어선 친구들과의 시간은
또 다른 추억 부르고 있었다.
2010년 3월 열 나흗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