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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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범종의 기원과 전래
범종의 기원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다. 인도의 간타(Ghanta)라는 타악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견해와 중국에서 은대殷代 이후 널리 제작된 고동기古銅器의 일종인 종鍾이나 탁鐸을 혼합한 형식으로부터 발전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종이 지니는 외형적 특징이 중국 고동기인 용종甬鍾과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어 이러한 고대의 용종이 불교의 전래와 함께 절에서 사용되는 불교 악기로 활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범종은 일본 나라奈良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중국 진陳나라 때(서기 575년) 만들어진 범종이다. 이와 같은 중국 6세기 범종이 당시 우리나라와 일본에까지 전래되었던 것으로 볼 때 초기의 범종은 서로 비슷한 양상을 띠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를 반영하듯 일본의 범종은 이러한 중국 초기의 범종에서 커다란 양식적 변화 없이 계승된 반면 우리나라의 범종은 전래 이후 오랜 기간이 경과되지 않아 중국이나 일본 종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독자적인 범종으로 새로운 정착과 발전을 이루어나간 것으로 믿어진다. 우리나라의 범종은 사리장엄구와 마찬가지로 삼국시대 불교전래 이후부터 제작·사용되었다고 여겨지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통일신라 8세기 이후의 작품뿐이다. 우리나라 초기의 종은 중국 종에서 기원한 것이 분명한 듯하며 이러한 중국 종 양식을 받아들이면서 새롭게 변화 발전된 모습이 바로 통일신라의 종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통일신라 725년에 만들어진 오대산 상원사 범종은 이미 한국 범종의 전형양식으로 완성을 이룬 이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상원사 종은 현존하는 범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 종의 시원적 작품이라기보다 통일신라 종으로 완전히 정착을 이룬 이후 제작된 가장 전성기의 범종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국 범종의 구조와 특징
우리나라의 범종은 통일신라 종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중국이나 일본 종과 다른 매우 독특한 형태와 의장意匠을 지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세부의 장식이 정교하고 울림소리共鳴가 웅장하여 동양 삼국의 종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으로 꼽힌다. 우선 종신의 외형은 마치 독甕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 같이 위가 좁고 배 부분鐘腹이 불룩하다가 다시 종구鐘口 쪽으로 가면서 점차 오므라든 모습이다. 종의 정상부에는 한 마리 용이 목을 구부리고 입을 벌려 마치 종을 물어 올리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으며 양다리는 각각 앞, 뒤로 뻗어 발톱으로 종의 상부인 천판天板을 힘차게 누르고 있다. 이 부분을 용뉴라 부르며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부분을 강화하면서도 장식적인 효과를 주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원래는 고래를 무서워한다는 상상의 바다짐승인 포뢰蒲牢를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용뉴의 목 뒷부분에는 우리나라 종에서만 볼 수 있는 둥근 대롱형태의 음통音筒이 솟아 있다. 이 부분에는 대체로 몇 줄의 띠를 둘러 3~4개의 마디로 나눈 뒤 그 마디마다 위아래로 솟은 연판 무늬를 새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음통은 대부분 그 내부가 비어있고 하부 쪽이 종신 내부에 관통되도록 구멍이 뚫려 있는 점이 독특하다. 따라서 음통은 종의 울림소리와 관련된 어떠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음통도 시대가 내려가면서 구멍이 막혀지거나 공명과는 관계없는 규모가 작은 종에까지 사용되어 점차 형식적인 면이 강조된 장식물로 변화되는 점을 볼 수 있다. 종의 몸체 위 아래쪽으로 상대上와 하대下라는 문양띠를 둘러 이 부분에 당초무늬, 연꽃무늬나 보상화相華무늬 등의 문양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상대 바로 아래에 붙여 네 방향에는 사다리꼴의 곽廓을 만들어 이 곽 안으로 9개씩 도합 36개의 돌출된 종 꼭지鐘乳를 장식하였다. 그 형상이 마치 연꽃이 피어나기 직전의 연꽃봉우리 모습인 연뢰형蓮形으로 표현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연뢰가 배치된 연곽蓮廓은 상대와 맞붙은 윗부분을 제외하고 그 외곽 부분에 띠를 둘러 대체로 상, 하대와 동일한 형태의 문양을 장식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한편 종신의 하대 위에는 종을 치는 자리로서 별도로 마련된 당좌撞座라는 원형 장식을 앞, 뒤면 두 곳에 도드라지게 배치하였는데, 그 위치는 대체로 종신의 1/3 부분쯤에 해당되는 가장 불룩하게 솟아오른 정점부에 해당된다. 앞, 뒷면에 반대로 배치된 두 개의 당좌와 당좌 사이에 해당되는 종신의 여백에는 악기를 연주하며 하늘에서 날아 내리는 주악천인상奏天人像이나 비천성飛天像, 또는 공양자상供養者像을 장식하는 것도 우리나라 범종의 대표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은 특히 통일신라 범종의 전형적인 양식을 설명한 것으로서 우리나라의 범종은 이러한 통일신라 범종형태를 기본으로 하여 각 시대마다 조금씩 변화되어 간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국 범종의 시대적 변천
통일신라에 만들어진 종은 도합 9점을 확인할 수 있는데,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5점 가운데 2구는 파손된 작품이고 나머지 4점은 일본에 건너가 있다. 통일신라의 범종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은 양식적 특징을 구비하고 있으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세부 문양이나 주악비천 등에 있어 약간의 변화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양식적 변화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가 종신 면에 부조된 주악상奏像의 변화라 할 수 있어 이를 중심으로 통일신라 종은 크게 전기(8세기 초 ~ 9세기 초)와 후기(9세기 전반 ~ 10세기 전반)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불교의 융성에 따라 범종의 제작도 크게 늘어났다. 고려시대의 종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종 양식에서 조금씩 변모를 이루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특징이 종의 천판과 상대가 이어지는 부분 위로 입상화문대라는 돌출장식이 새로이 첨가되는 점이다. 현존하는 자료로 미루어 그 시기는 12세기 말 정도로써 이후부터 본격적인 고려 후기 종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그리고 상대와 하대에도 당초문이나 보상화문 외에 번개무늬雷文, 국화문 등의 다양한 문양이 장식된다. 종신에는 비천이나 주악상 대신 연화좌 위에 앉은 불, 보살상 및 삼존상을 천개天蓋, 구름무늬, 악기 등과 함께 장식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한국 종의 기본 형태와 세부의장은 고려후기인 14세기 중엽부터 점차 사라지면서 서서히 중국 종의 형태와 의장을 받아들인 새로운 형식으로 정착되어 나갔다. 이러한 고려 말의 범종양식을 이어받은 조선초기의 종은 음통이 없어지고 한 마리의 용뉴는 쌍룡으로 바뀐다. 입상화문대는 소멸되며 상대 아래에는 범자문이 첨가되어 독립된 문양대로 자리 잡게 된다. 연곽은 점차 상대에서 떨어져 밑으로 내려오며 당좌가 아예 없어지거나, 있어도 그 수나 위치가 일정치 않아 종을 치는 자리로써가 아니라 무의미한 장식문양으로 전락해 버린다. 조선초기에는 왕실의 발원을 통한 국가적인 주조사업으로 이루어진 대형의 범종도 많이 제작되었는데, 흥천사종(興天寺鐘 : 1462년), 보신각종(普信閣鐘 :1468년),봉선사종(奉先寺鐘 : 1469년)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임진壬辰과 병자란丙子亂이후인 17~18세기에는 사찰마다 전쟁으로 소실된 범종을 새로이 만드는 작업이 널리 이루어짐에 따라 많은 수의 범종이 집중적으로 제작된 점을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범종은 다양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는데,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의 범종을 모방한 복고적古的 경향의 작품과 고려 말 ~ 조선 초기에 보였던 중국 종과 같은 외래형 종 그리고 중국 종과 한국전통 종 양식이 혼합된 혼합형 종이 만들어지는 등 매우 복합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양식의 혼란과 함께 주조기술이 더욱 거칠어지고 문양이 도식화되는 등 통일신라부터 꾸준히 연맥이 이어져 왔던 한국범종의 전통이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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