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의 추억 쪽빛 바다라 하였던가. 해남 땅끝마을 전망대에서 바라 본 바다는 하늘의 끝자락과 섞여 그 사이에 내려앉은 섬들의 싱그런 초록빛 자태가 없었다면 쪽빛과 하늘빛의 구분이 어디인지 모를 만큼 두 물감이 섞여 있었다. 하늘이 바다에 비친 것인가 바다가 하늘에 물든 것인가. 8월 초 한낮의 뜨거운 햇빛을 가르고 도착한 땅 끝의 언덕에서 그리 바다를 바라보며 산들바람을 맞았다. 작년 8월 초, 가까운 후배가 자기 차를 가지고 부부끼리 남쪽으로 1박 2일 드라이브나 다녀오자고 하여 나선 길이 땅끝마을이었다. 한 20여 년 전 아이들이 어렸을 때 모두 데리고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바닷물에 발을 담가 보겠다고 주차장에 차를 대고는 돌밭을 헤치며 언덕을 내려갔다 힘겹게 올라온 기억이 있는데 다시 와보니 마을 가득한 온갖 편의 시설로 인하여 예전의 모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전망대에서 바다와 하늘에 감탄하며 부두에 드나드는 보길도행 카페리를 바라보는 사이 해는 서녘으로 기울고 산자락을 타고 드리운 그늘에 가린 바다는 검푸른 빛을 해변 바위로 밀고 와 흰 포말을 만들고 있었다. 한여름 밤 일렁이는 바다에 젖어 마시는 소주 한 잔에 마음은 이미 문학소년이지만 머릿속의 원고지는 한 자도 채워지지 않고 소주잔에 절반쯤 어려진 시선은 부두 끝에서 홀로 어두움을 가르고 있는 하얀 등대로 향한다. 그리고 그 시선을 따라 어느새 몸도 그곳으로 기울어갔다. 등대 아래 가까이 다가가자 하얀 기둥에 검은 검댕으로 새겨진 누군가의 애끓는 사랑이야기가 등대 조명을 받으며 찬란하게 검은 빛을 발한다. “성영♡서희”. 모래밭에 새기면 파도에 쓸려 사랑이 끊어질까 두려워 이곳에 새겼을까 아니면 두 사람을 위한 인생의 등대가 필요하였을까. 이토록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등대를 아끼는 마음도 사랑 한켠에 자리하게 하였으면 좋았으련만. 올해도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쭉 계속되기를 바라지만 그 이야기가 또 다른 등대에 숫검댕으로 남겨지지 않기를 바란다. 보길도로 향하던 밤의 마음은 아침이 되자 청산도로 바뀐다. 바다와 맞닿은 환상의 해변도로로 차를 몰아 완도 여객터미널에 닿았다. 청산도로 향하는 배도 자동차를 싣고 가는 카페리였지만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되었다는 그곳에 차를 몰아 갈 수는 없는 일, 차는 여객터미널 주차장에 밀어 넣고 그냥 몸만 배에 실었다.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를 따라 고물과 이물을 번갈아 들고 내리던 배는 어느덧 청산도 초입 하얀 등대가 보이는 부둣가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부두 뒷골목으로 접어들자 줄지어 늘어선 음식점들이 부실한 아침을 든 뱃속에 신호를 보낸다. 번갯불로 밥해 먹었다고 해야 하나. 한국인의 숟가락 속도는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것이지만 오늘 내로 집에 돌아가겠다는 생각에 슬로시티가 무색하게 속도전을 펼쳤다. 어차피 시간상 다른 코스는 가지 못할 것. 우리는 드라마와 영화로 널리 알려진 코스를 택하여 빠른 걸음으로 발을 옮겼다. 그런데 부둣가 큰길에서부터 동네 골목길 어귀까지 제법 긴 거리였음에도 차도를 따라 일렬로 주차된 자동차들은 그 어귀를 지나쳐 끝이 보이지 않고 새로운 자동차들이 계속 그 주차행렬의 꼬리를 찾아 반대편으로 또 다른 행렬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자동차보다도 몇 배나 많은 사람들이 그 주위의 그늘을 찾아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유를 물은 즉 모두가 육지로 나가는 배편을 기다리는 중이라 하였다. 배 시간과 행렬을 보아하니 이 사람들 오늘 중으로 자동차 가지고 배에 오르기는 아예 그른듯하였다. 그야말로 슬로시티에서 내일 아침까지 천천히 기다리며 잠자는 일 밖에 없겠다. 동네 골목을 순회하고 몽돌해변을 지나 바람이 오르는 콩밭 언덕길 끝 주막이 있는 능선에 닿았다. TV에 너무 많이 소개 되었음인지 눈 돌리는 곳 마다 익숙하지 않은 곳이 없다. 예쁜 드라마 세트장이며 두어자 높이의 산책로 옆 밭을 따라 이어진 아담한 돌담과 각담 그리고 초가지붕 주막 처마 밑의 새끼를 간직한 제비집에 이르기 까지 360도 3D 파노라마로 이어지는 풍경은 슬로시티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주막집 돌담 옆 풀밭에 앉아 바다에서 올라오는 바람을 맞으며 내려다보는 바다는 점점이 하얀 양식장 부표와 어우러져 그저 한 폭의 그림이라는 말 외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 풀밭에 앉아 그 한없이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며 시인은 이 풍경을 어떤 시어로 표현할까 생각할 즈음 산책로에서 이는 흙먼지가 바람을 타고 시야를 가리며 숨쉬기를 거북하게 한다. 고개를 돌려보니 돌담 사이 느리게 느리게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뚫고 자동차가 날리는 흙먼지였다. 한 대도 겨우 갈만한 산책로에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또 한 대의 자동차로 인하여 흙먼지를 뒤집어 쓴 사람들은 돌담 바깥으로 내몰리기까지 한다. 순간 풀밭의 슬로시티는 뇌리에서 살아지고 헛웃음이 나온다. 슬로시티의 선정 기준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스팔트길을 벗어나 사람들을 헤치고 이 산책로에까지 자동차를 다니게 하는 것이 그것이었을까. 아울러 슬로시티를 감상하러 오는 사람들이라면 굳이 산책로에까지 차를 몰아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어야 할까 생각하며 서둘러 흙먼지를 빠져나왔다. 뉴스에 4월 30일까지 청산도에서 슬로걷기축제를 한다. 올해도 그 산책로에 자동차가 다니게 허하는지 모르겠지만 진정한 슬로시티라면 육지에서 들어가는 자동차는 물론이겠지만 사람들을 밀어내는 산책로의 자동차는 좀 통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세계적으로 명명되고 있는 공통어 ‘SLOW CITY'는 계속 사용이 되어야 하겠지만 아울러 그에 걸맞은 예쁜 우리이름도 함께 하였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2013년 4월 30일 하늘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