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
어제저녁 TV에 ‘초등학생의 잔혹시’라는 것이 뉴스거리로 나왔다. 학원에 가기 싫은 초등학교 여자아이가 엄마에 대한 마음을 표현한 동시라는데 방송에서는 거의 대부분을 모자이크 처리하여 무슨 내용인지 몰랐으나 아침 인터넷에 나온 전편을 읽으니 이게 과연 동시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잔인하다 못하여 천지간의 공포를 다 느끼게 하는 표현들이다. 더 한심한 것은 어떤 어른이 이 시에 어울리는 삽화를 그려 넣었다는 것이 글과 버금가는 잔인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이런 작품을 그 초등학생 부모와 출판사 그리고 발행인 까지도 출판에 모두 동의하였다는 것이다. 말썽이 일자 출판사에서는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게재하고 시집을 모두 거두어 드린다고 한다. 이를 두고 ‘예술의 일부로 볼 수 없나’ 혹은 ‘뭐가 문제냐’하는 반응을 보이는 일부 네티즌도 있다고 한다. 옹호하는 이유를 물으면 ‘표현의 자유’라는 가림막을 내 세울 것이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를 떠나 어른인들 어찌 그런 표현을 쓸 것이며 하물며 초등학생의 표현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다. 어머니가 이름 있는 시인이라는데 아이가 재능을 표출할 표현에 대한 적절한 가르침은 없었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는 시위 도중에 어떤 청년이 태극기를 불태우는 행위를 한 적이 있었다. 공공장소나 군중들 앞에서 자국의 국기를 불태우는 행위는 그 어느 국가에서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행위를 이해하는 국민도 별로 없을 것이다. 다른 나라도 그렇겠지만 우리나라에는 국기 훼손에 대한 법이 있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법 이전에 자국의 국기를 시위의 일부로 불태우는 행위는 그 시위가 아무리 국민의 지지를 받는다고 하여도 있을 수 없는 행위이다. 그 청년이 시위에 참여하여 일종의 군중심리로 그런 행위를 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행위에 대한 네티즌들의 댓글을 볼라치면 대다수는 비난하는 글들이지만 개중에는 그것도 ‘표현의 자유’로 봐 주어야 한다는 것도 있다. 시위주체에서는 그 청년은 시위대 소속이 아니라 하였고 경찰에서는 수사를 하겠다 하였는데 아직 어떤 영문인지 들은바 없다. 가끔 특수목적의 시위에서 의사표출로 다른 나라의 국기를 태우는 행위는 시위 당사국 국민들에 의하여 분노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겠지만 자국기를 태우는 행위도 어떤 목적을 위한 표현의 자유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젓지 않을 수가 없다.
자유라는 것은 중요하다는 것을 떠나 인간이 누구에게서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적으로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자유의 사전적 의미 이전에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써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범주가 있다. 자율과 상식이 자유 앞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유를 통제하여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지 못할 경우 이를 방종이라 부른다. 그런데도 그 범주를 벗어난 자유 때문에 법이라는 것이 있어 사람들은 온전한 자유를 영위하지 못하고 있다. 방종을 자유로 착각함으로써 스스로 통제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표현의 자유라는 것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편적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 져야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아무리 좋은 의미의 표현이라 할지라도 외면당하게 된다. 자유라는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가 표현의 자유라는 테두리에 속한다면 지나가는 사람의 뺨을 치고도 행위예술에 대한 표현의 자유였으니 법으로 통제하지 말라 할 것이다.
극장용 에로영화가 유행하던 시절에 도 넘는 베드신이 예술인가 외설인가 하는 문제가 사회적으로 거론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다. 유명배우가 베드신을 하면 예술이고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가 하면 외설이라 했다. 상영극장이 중앙에 있으면 예술이고 변두리에 있으면 외설이라 했다. 베드신이 많이 나오면 외설이고 적게 나오면 예술이라 했다. 그런데 이를 위 두 경우에서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 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면 예술과 외설의 차이는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아무리 예술적인 표현의 자유도 살아가는 범주에 맞춰지지 못하고 자율적이지 못하면 자유를 상실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포르노영화를 예술적 표현의 자유라 이야기하지 않는 것처럼.
‘표현의 자유’, 좋은 말이기는 한데 자유에 앞서 표현하는 사람들과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자율적 범주가 꼭 필요한 것이라 생각된다.
2015년 5월 7일
하늘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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