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초여름밤에 울리는 한겨울의 세레나데

korman 2015. 6. 23. 18:54

 

 

 

 

 

초여름밤에 울리는 한겨울의 세레나데

 

언제까지 그 소리를 들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계절이 겨울로 접어들고 짧은 해를 밀어낸 어둠이 골목으로 접어들면 어귀에 켜놓은 60촉짜리 백열등 하나가 전부였던 골목의 고요함을 뚫고 늘 한결 같이 들리던 리드미컬한 외침이 있었다.

“메↗밀↪묵→사려↝↺찹↗쌀↪떡↺↷”

 

영화에도 이 장면은 심심치 않게 등장하던 단골 소재였다. 양 귀에 검은 고무줄로 연결된 토끼털로 만든, 그러나 시린 귀를 데워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귀마개를 하고 학생모를 쓴 소년이 성악가의 미음보다도 더 멋진 고음으로 그 소리를 외치며 희미한 백열등이 비추는 골목으로 접어들면 늦게까지 공부하던 부유한집의 한 여학생이 골목 쪽으로 난 자기방 창문을 열어 찹쌀떡을 주문하고 소년은 손가락 몇 개는 밖으로 나와 있는 실장갑을 낀 손으로 떡을 건네는 모습이 클로즈업 된다. 한옥의 창문은 밖으로 쉬이 닿을 수 있는 낮은 높이로 이들은 그 창문을 통하여 가끔씩 대화도 나누고 소년이 돌아가는 뒤편으로는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카메라 앵글은 눈 내리는 가로등으로 옮겨진다. 소녀는 겨울 내내 직접짠 목도리나 장갑을 소년에게 선물하고 새봄에 소년에게 인사를 나눌 틈도 없이 이사를 가 버린다. 소년은 소녀가 건넨 선물만을 간직하며 장성하고 이들은 나중에 우연한 기회에 성공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되지만 그러나 그 만남이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계절이 바뀜과 동시에 어김없이 등장하던 이 정겨운 목소리는 도시가 발전하면서 공동주택이 늘고 골목이 많이 없어진 게 원인이었는지 아니면 생활환경이 급속도로 바뀌면서 한밤의 군것질거리가 다양화되고 또 어디에고 손만 뻗으면 각종 주전부리들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시설들이 늘어나면서 그 모습이 살아져갔는지 그 원인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흐름을 타며 희미한 골목의 정적을 깨던 그 소리는 늘 뇌리에 남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기억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곤 한다. 도시가 변하면서 한밤의 각종 소음들도 늘어나 아무리 목소리가 큰 사람이라도 그 소음에 대처하기가 어려워 살아져간 추억의 소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한여름으로 뛰어가는 계절에 깊은 겨울의 소나타 같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바로 어젯밤에 들린, 리듬도 그 때와 다를 바 없는 그 외침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도시의 어느 곳에서도, 비록 오래된 골목이 있는 동네라 하더라도, 그 추억의 소리가 다시 들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 지난겨울 눈 내리던 밤에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었는데 분명 어제 밤엔 세월이 지나도 뇌리에서 살아지지 않을 그 소리가 한참동안이나 들렸었다. 창문을 열고 밖으로 고개를 삐쭉 내밀어 보았지만 어느 이면도로변에서의 외침인지 아니면 건물과 건물의 부딪침으로 내 창문을 뚫고 들어온 소리였는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점차 멀어지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난 한동안 영화의 한 장면을 떠 올렸다.

 

오늘밤에 또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손가락 하나면 온갖 한밤의 군것질거리가 벼락 치는 시간보다도 짧은 순간에 집으로 배달되는 지금 세상에 리듬도 예전의 그것처럼 정확한 그 외침이 얼마동안 이어질지 괜한 걱정이 된다. 어제가 하지였다고 한다. 배달에 익숙한 지금의 세대들은 그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하지에 듣는 “메밀묵 사려 찹쌀떡” 소리는 한여름 밤의 세레나데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지금 듣는 이 하지의 목소리가 올 겨울 동지까지 쭉 이어지기 바란다.

 

2015년 6월 23일

하늘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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