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4층이 없어요
벌써 4월이다. 4월이 시작돼도 요즈음은 좀 덜한 것 같은데 4월 1일은 만우절이라고 하여 각종 거짓말을 하여도 용서가 되는 날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가짜뉴스를 흘리고 다녔다. 그 중에서 가장 나쁜 거짓말이었던 경찰이나 소방관서에 거짓 신고하던 버릇은, 정말 그 버르장머리 없는 행위는, 법의 뒷받침으로 해서 이제는 거의 없어진 듯하다. 만우절이라는 것 자체를 모르는 젊은 층도 많이 있는 듯하고 그걸 아는 사람들도 지금은 그저 그런 게 있었다는 것만을 기억할 뿐 거짓말 한 마디쯤 하고 하루를 시작하던 유행은 이젠 추억의 한 자락으로만 남겨진 느낌이다. 요새 만우절이라고 가짜뉴스를 흘렸더라도 예전처럼 너그럽게 받아주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2003년에 누군가가 ‘빌 게이츠’가 죽었다고 한 거짓말은 세계의 주가를 요동치게 하였다는데 지금 그런 거짓말을 하였다가는 전 세계로부터 손해배상 소송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또한 잊혀 가는 느낌이지만 4월만 되면 ‘잔인한 달’이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미국계 영국인 'T.S. 엘리엇'이라는 시인이 썼다는 ‘황무지(The Waste Land)'라는 시의 한 구절이라고 하는데 난 그가 왜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했는지 참 궁금하다. 라일락이 피어나고 봄비가 생기 없는 뿌리를 깨운다고 하면서 잔인한 달이라니, 그는 봄의 꽃들과 나무의 뿌리에서 돋아나는 새순으로 인하여 겨울의 동토가 부서지고 녹아내리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일까? 아무리 위대한 시인의 역설적 표현이었을 것이라 이해하기엔 나의 이 문학적인 무식이 그 잔인한 문구를 이해하는 데 영 도움이 되질 못한다. 인터넷을 뒤져 그 시의 해설을 찾았다. 그런데 그냥 시로 기억하는 게 나에게는 더 나았을 것 같았다. 해설을 읽었더니 더 혼란이 오고 시 보다 해설이 더 난해하게 느껴졌다. 이 복잡해지는 뇌를 재우기 위해서는 아마도 해설의 해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너무나 빨리 다가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할아비 사는 층의 숫자를 누르던 손녀가 “할아버지 왜 4층은 없어요?”라고 물었다. “우리 아파트에도 없는데 여기도 없네”하고 혼잣말을 덧붙였다. 순간 ‘역시 4라는 숫자가 잔인한 모양이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4라는 숫자 대신에 영어 F라고 적은 데가 4층이야”라고 일러 주었더니 “왜 그렇게 썼어요?”라고 또 묻어왔다. 자 이걸 어찌 설명해 주어야 할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4라는 숫자를 싫어하기 때문에 그렇게 썼단다.” 그리 대답하고 나서 “왜 4를 싫어하는데요?”로 이어지는 계속되는 질문에 그 아이 나이엔 24시간을 설명하여도 이해가 되지 않을 ‘사(死)’를 설명하다 정말 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에 없는 4자 때문에 8살 손녀와 인생을 이야기 하는 하루가 되고 말았다. 이래서 4월은 4자로 인한 잔인한 달인가 보다.
4는 우리나라 사람들뿐만 아니고 중국인들도 싫어한다고 한다. 중국의 엘리베이터에도 우리처럼 F로 표시되어 있는지 살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역시 그 발음 때문이라는데, 인터넷 중국어사전에서 四와 死의 발음을 들어보니 장단과 높낮이 및 강세에는 차이가 있으나 그 발음은 같았다. 우리가 두 자 모두 ‘사’라고 읽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렇다고 엘리베이터에서 4를 없애다니 이건 좀 이해가 안 간다. 모든 공용주택이나 빌딩에 4층을 두지 않은 것도 아니고 4층에 거주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누가 물으면 4층에 산다는 대답도 하면서 엘리베이터 숫자판에만 4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건물을 이용하는 거주자나 일반인들의 보편적 생각을 반영하였다기 보다는 건축주나 건설사의 건물에 대한 안녕을 바라는 일종의 미신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4월에 내가 느끼는 것은 따뜻함과 부드러움이다. 창가에 놔두었던 화분의 소사나무 가지에서 새잎이 돋아 조그맣게 벌어지고 있다. 나무가지가 받는 따뜻함에 돋아나는 새싹의 부드러움이 4월이 아닌가 한다. 오늘 이 글을 쓰는 날은 4가 두 개 겹쳐진 날이다. 돋아나온 새잎을 보면서 이제 엘리베이터의 F가 4로 고쳐져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2018년 4월 4일
하늘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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