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보름 음식에 잘못 걸린 전화

korman 2019. 2. 21. 20:40






보름 음식에 잘못 걸린 전화


정월 대보름달이 하루 모자라게 뜨는 작은보름날 저녁, 아홉 가지 나물은 다 하지 않더라도 보름이 섭섭해 하니 그래도 몇 가지는 볶아보자고 물에 불리던 나물을 건지고 있던 집사람이 택배를 빼면 평소에 울릴 일 별로 없는 초인종이 울려대자 “다 저녁시간에 누구야?” 하면서 현관문을 열더니만 방에서 컴퓨터에 정신 쏟고 있던 나를 불렀다.


문밖에는 3층에 사시는 팔순이 넘으신 할머니께서 서 계셨다. “할머니 웬 일이세요?”하고 우리 내외가 묻자 가슴을 쓸어내리시며 그 투박한 강원도 사투리로 “ 난 또 큰 일 당한 줄 알았지. 무사하니 다행이네” 하셨다. 무슨 말씀인지 몰라 재차 묻자 “아무 일 없으니 됐네. 내 집에 내려갔다가 다시 올게요.” 하고는 승강기의 내림 단추를 누르셨다.


조금 후 다시 초인종을 누르신 할머니의 손에는 큰 그릇이 들려있었다. 찹쌀에 밤 대추 등을 섞어 지은 오곡밥과 당신께서 손수 장만하셨다는 강원도식 아홉 가지 나물이 거기에 하나 가득 담겨 있었다. “보름 음식은 초저녁에 이렇게 나눠먹어야 하는 겨” 라고 하시며 그릇을 전하고는 곧바로 내려가시려는 할머니를 집 안으로 모시고 감사의 말과 녹차 한 잔을 대접하며 아까 하신 말씀에 대하여 재차 여쭈었다.


보름 음식을 다 만들어 놓고 우리집에도 좀 나눠줘야겠다고 생각하시고는 그냥 올라오시려다가 그래도 전화는 걸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고 하였다. 그러자 전화를 받은 남자에게서 “지금 상중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잘못 걸었나보다 하고 번호를 다시 눌렀는데 또 같은 대답이었다는 것이다. “아니 어제도 만났는데 전화로 두 번씩이나 그런 대답을 들으니 혹 수술한 데가 갑자기 잘못되어 큰일 당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철렁하여 뛰어 올라왔었지. 지금도 가슴이 떨리네” 하셨다. 아마 잘못 누르신 같은 번호를 두 번 누르신 모양이었다. 집사람이 얼른 “감사합니다. 저 이제 오래 살게 되었네요.”라고 답해 드리자 “그러게 말입니다”라 하면서 얼굴이 환해 지셨다.


할머니댁에는 90이 훨씬 넘으신 할아버지와 그 할머니 두 분이 사신다. 두 분 다 허리가 좀 굽으셔서 외출시에는 노인용 유모차를 이용하시곤 하지만 아직 건강하신 편이다. 그래도 나이 많은 노인들이라 한 10여일 뵙지 못하면 난 할머니께 전화를 해 안부를 묻는다. 내가 왜 전화를 하는지 할머니가 눈치를 채시고는 늘 안부를 챙겨 주어서 고맙다는 말씀을 잊지 않으신다. 그런 인연으로 할머니께서 당신이 만드신 보름 음식을 전하려 하였는데 잘못 거신 전화 때문에 본의 아니게 노인네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해 드린 모양새가 되었다.


가져오신 음식을 우리 그릇에 옮겨 담고 극구 괜찮다고 하시는 할머니께 그릇을 집사람이 깨끗이 닦아 식용유 한 병을 담아 함께 드리고는 “정월에 고소하게 지내세요” 하고 인사를 드렸다. 현관문을 나서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집사람에게 “어머니 생각이 나네” 하였더니 “그럼 둘째 누님네나 갑시다”라는 말이 돌아왔다. 사실 할머니의 나이는 내 어머니뻘은 되지 못한다. 집사람 이야기는 내 둘째 누님과 같을 거라 하는데 어머니를 그리는데 그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손주를 셋이나 두고 첫 손녀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니 나도 확실한 할아버지 대열에서 이탈할 수는 없지만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이 나이에도 조그마한 거 하나에 어머니가 그리워질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 누님은 어머니 같은 존재가 된다. 어머니의 손맛이 누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작은보름에 숨겨졌던 보름달이 보름날 저녁엔 하늘을 훤히 밝혔다. 누님손을 빌려 어머니가 만드신 수수부꾸미를 먹으며 저곳에 아직 계수나무와 토끼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8년 2월 20일

하늘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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