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우리 종 공부하기

유구한 역사를 담고 있는 종 - 시대별 특징

korman 2006. 11. 19. 11:36
유구한 역사 담고 있는 종 - 시대별 종의 특징

 

 

 

종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시대별로 만들어진 종 또한 독특한 특징과 개성을 지니고 있다. 섬세한 문양과 맑고 깊게 울리는 소리는 모두 조상들의 땀과 혼이 이룬 결정체이다.

 

신라시대

한국 범종의 조형(祖形)이며 대표되는 신라 범종의 각부를 종신, 용뉴, 용통(음관), 상대 문양, 유곽의 문양, 하대 문양 그리고 비천상의 형상과 당좌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표적인 종

[유기명(有記銘) 범종]
- 상원사 범종 (725年)
- 일본 국부팔번궁사(國府八幡宮社)소장 범종
- 봉덕사 성덕대왕 신종 (771年)
- 선림원 범종 (일명 월정사 범종이라고도 하나 6.25동란때 소실되어 현재 파편 일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음.)
- 상궁신사(常宮神社) 범종 (재일본)
- 우좌팔번궁(宇佐八幡宮社) 범종 (재일본)

[무기명(無記銘) 범종]
- 청주박물관 소장 신라 범종 (청주 출토)
-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실상사 파종
- 일본 광명사(光明社) 소장 신라 범종
- 일본 주길신사(住吉神社) 소장 신라 범종
- 일본 운수사(雲樹社) 소장 신라 범종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불교는 신라시대와 같이 호국불교로서 왕실은 물론, 일반국민에게까지 널리 확산되었으니, 범종을 주성하는 일도 성행하였다.
고려왕조가 지속되는 동안 신라의 양식을 계승하였던 고려시대 초기의 범종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양식적으로나 각부의 수볍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12세기 초 몽고에 병란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에는 북방 요의 연호를 사용하던 때로 신라종의 전통을 이어오던 시기이다.
후기에는 다른 나라의 연호대신 독자적인 '간지'로써 기명을 나타내었는데, 고려예술의 각 부분이 치졸화되고 평민화되어가는 쇠퇴기에 들어서는 기기로 범종 또한 신라종과는 달리 외소하였다.

고려의 동종은 전기에는 신라시대의 형태를 본받아서 대체적으로 상대위에 입상화문이 없으나 후기에 들어서면서 상대에 입상화문이 나타나고 종의 규모도 왜소하여지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종으로는 전기에는 천흥사동종, 청녕4년명동종, 용주사동종 등이 있고 후기에는 정풍2년 명동종, 내소사동종, 탑산사동종, 죽장사기축명동종 등이 있다.

고려 전기의 종
고려전기 의 종은 900년대부터 1150년대까지로 구분하는데 이 때에 속하는 범종은 성거산 천흥사 범종(통화 28년명, 1010년)을 비롯하여 10구에 달한다.

[천흥사 범종]
천흥사 동종은 고려시대 동종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종이다. 신라 범종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양식의 출현을 보여주어 주목된다.

용뉴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있다. 용뉴의 형태는 신라 종과 닮았으나 용의 머리가 쳐들려진 점과 여의주를 물고 있는 점은 고려시대에 새로 나타난 형식이다. 음통 표면 역시 신라 종처럼 5단으로 구획되어 꽃무늬 장식을 하였다.

종의 맨위인 천판주연(天板周緣)에는 신라 종에서 볼 수 있는 연판대(蓮瓣帶)를 돌렸다. 상대(上帶)와 하대(下帶)는 연주문대(蓮珠文帶)속에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이 새겨져 있다.
네 군데의 유곽(乳廓)은 보상화문대로 장식되어 있다. 유곽 안에는 아홉개의 유두(乳頭)가 배치되어 있다. 종복(鐘腹)분에는 각각 두 개의 당좌(撞座)와 비천(飛天)을 장식하였다. 종의 몸통에는 넓은 공간을 남겼다.

이렇게 당좌와 비천을 장식하고, 넓은 공간을 남기는 것은 신라 이래의 특징이다. 곽 밑 한 곳에 위패형(位牌形)을 만들어 명문(銘文)을 새겨 놓았다.
명문은 고려 현종 1년인 1010년에 종을 제작하였음을 알려준다.
위패형은 고려시대 범종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이어서 주목된다.

고려 후기의 종
고려후기의 종은 1150년부터 1392년 고려가 멸망할 때 까지의 것으로 '내소사(來蘇寺) 범종'을 비롯하여 국내에 현존하는 것으로는 대략 64점에 이르고 있다.

[내소사 범종]
이 종은 고려 고종 9년(1222)에 청림사 종으로 제작되었으나 조선 철종 원년(1850) 내소사에 옮겨진 것으로 전형적인 고려후기 종이다.

사실적인 종뉴 아래의 종신에는 이중여의두문의 입상화문대와 화련한 모란당초문의 상·하대가 있고, 당초문의 유곽 아래에는 4개의 중판연화문< 重瓣蓮華紋 >이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매우 균형있는 모습이다.

또한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양각된 삼존상< 三尊像 >이 있는데, 두 뺨이 볼록한 선정인< 禪定印 >의 본존은 연화좌< 蓮華座 > 위에 앉아 있고, 좌·우협시상< 左右脇侍像 >은 입상< 立像 >이다. 이들 위에는 운미< 雲尾 >가 길게 솟아 있고, 그 위에는 장식을 흩날리는 보개< 寶蓋 >가 있어 한층 장엄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처럼 내소사 종은 종신형< 鐘身形 >은 신라 종형< 鐘形 >을 따르나 고려 후기 종의 특징인 입상 화문대를 갖추고 있으며, 표면의 묘사수법은 정교하고 사실적이다.
고려 후기 종 가운데 뛰어난 작품이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고려말기에 있어서 불교 그 자체의 쇠퇴와 요승들의 출현으로 말미암은 부패상이 나타난 지배계급에 의하여 제계의 표적이 되었으며, 새로운 교화이념으로 유교가 숭상됨에 따라 신라와 고려를 통하여 800여년이나 국교적인 위치를 차지하던 불교가 유교로 되체되었다.
따라서 자연히 불교미술의 쇠퇴를 가져오게 되었다.
조선시대는 임진왜란을 중심으로하여 전기와 후기로 나누고 있다.

전기는 고려시대의 여운을 엿볼 수 있는 시기로 그 유래를 보이고 있다. 규모도 거대한데, 이것은 당시 불교를 보호한 왕실과의 관계서 중성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흥선사동종, 봉선사대종, 낙산사동종, 해인사홍치4녀명동종 등이다.

후기에는 고려의 여운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전란으로 인하여 오랜 전통이 단절되고 조형미술은 전반에 걸쳐 새로운 방향을 찾게되었다고 한다.
후기의 범종은 100구가 넘게 남아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전시대를 통하여 가장 많은 수 이다.
후기의 범종들은 대개가 주성연기가 있어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데 모두 청나라의 연호(강희.건륭)를 사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광사숭정 7년 명동종, 직지사순치 15년명동종, 통도사강희25년명동종, 범어서웅정 6년명동종, 영국사건륭26년명동종 등이 있다.

조선 전기의 종
조선전기는 전대인 고려시대의 여운을 엿볼 수 있는 시기로서 고려적인 조성양식과 수법을 다소나마 간직한 작품이 출현할 수 있었던 여건을 갖추고 있어서 오늘날 실제로 그 유례를 보이고 있다.

[보신각종]
이 종(鐘)은 조선(朝鮮) 세조(世祖) 14년(1468)에 주조(鑄造)되어 원각사(圓覺寺)에 있다가 절이 폐사(廢寺)된 후 남대문(南大門)에 옮겨지고 다시 선조(宣祖) 30년(1597)에 명례동현(明禮洞峴)(현 명동성당 부근)에 옮겨지고, 그후 광해군(光海君) 11년(1619)에 현재의 자리에 옮겨져 파루(罷漏-오전 4시)에 33번, 인정(人定-오후 10시)에 28번 울려 도성< 都城 >의 문을 여닫고 하루의 시간을 알리는 데 쓰였다.

높이 3.18m, 지름 2.28m, 무게 19.66톤인이 종의 양식은 쌍두(雙頭) 일신(一身)의 용뉴(龍紐)로 되어 있고 종신복(鐘身腹)에는 3조(三條)의 굵은 띠를 돌리고 있다.
또한 종구(鐘口)에는 윗쪽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2조의 띠를 돌리고 있어 이것이 하대(下帶) 역할을 하는 문양대로 되어 있다.

그리고 종의 몸체에는 "성화 4년 월 일…"라는 장문(長文)의 명문(銘文)이 새겨 있어 주조년대가 확실한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以前)의 범종이다.

종각(鐘閣)은 태조(太祖) 4년(1395)에 창건된 이래 네 차례의 소실(燒失)과 여덟 차례에 걸쳐 중건(重建)이 있었고 고종(高宗) 32년(1895)에 '보신각'이란 사액(賜額)을 내린 데서 보신각이라 불리어졌다.
현재의 종각은 서울특별시가 1979년 8월에 동서 5칸, 남북 4칸의 중층누각(重層樓閣)으로 세웠다

조선 후기의 종
조선 후기의 범종은 1600년경 이후부터로 이떄에는 본래의 한국 범종의 형태나 양식을 상실한 중국 범종의 모방 형식을 거의 따르고 있는 변질적인 형태가 되었다.   
다시말하면 완전히 본래의 전통 양식이나 형태를 상실한 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중국 범종의 본래 양식과도 차이가 있는 또 다른 혼합 형태의 범종이 나타나고 있다.

[화계사 강희 22년명 범종]
서울 도봉구 수유동 화계사의 종각에 있는 1683년의 종이다. 종구(鐘口)가 벌어진 형태로, 전통 양식이나 중국 범종의 약식과도 차이가 있는 종이다.
하대는 가는 두 줄의 엽띠를 하단에 둘러서 아랫띠를 만들었다.
띠 안에는 사실적인 연꽃을 배치하여 문양대로 만들었는데 다소 평면적인 느낌이다.

정상부에는 쌍룡을 배치하여 용뉴를 만들었고, 천판은 아무런 문양 없이 어깨로 완만히 이러짐을 보여준다.

상대에는 범자(梵字)를 2줄로 배치하여 장식하였다.
그 바로 아래에 있는 유곽은 조선시대 후기에 보이는 일반 형태의 유곽이다. 유곽대는 도식화된 식물문으로 채우고 9개의 유두는 6잎의 꽃받침 위에 둥근 꽅잎을 새기고 그 속에 유두를 배치 하였다.

 

출처 : 문화부  What's on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