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우리 종 공부하기

일본의 한국종 - 후쿠이현(福井縣) 조구진자(常宮神社 소장 (진주 연지사 신라범종)

korman 2006. 11. 17. 00:32
(140106 현재)
 
 
일본이 약탈한 연지사 범종


 

 

제목 : 연지사 종  원본보기
설명 : 통일신라 연지사에 있었던 동종. 높이 111㎝. 일본의 국보. 명문을 통해 833년에 제작된 종임을 알 수 있으나 연지사의 소재지는 미상이다. 일본에 전해진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범종이다.
출처 : Copyrigh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일본 후쿠이현(福井縣) 常宮神社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동종. 높이 111㎝, 입지름 66㎝. 일본의 국보. 용뉴(龍鈕)는 수직으로 향하여 종정(鐘頂)에 붙이고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이다. 용통(甬筒)은 3단으로 구성되어 유좌형식(乳座形式)의 연화장식이 둘러지고 연판(蓮瓣)도 다소 형식적으로 둘러지고 있다.

 

상하대에는 같은 크기의 방곽(方廓)을 구획하여 그 내부에 파도무늬를 조밀하게 새겨 두른 해파문(海波文)이 장식되어 있고, 그 위아래에는 삼각형상의 무늬대가 있다. 유곽대(乳廓帶)도 역시 같은 크기의 방곽 안에 격자무늬형식으로 구성되어 보상화문(寶相花文)을 배치함으로써 연속무늬를 이루고 있다.

 

유곽 안에는 9개의 유두(乳頭)가 연화좌(蓮花座) 위에 연봉형으로 표현되었다. 종신 하단에는 2개의 당좌(撞座)와 2구의 비천상(飛天像)이 유곽과 엇갈리게 배치되고 있다. 당좌는 자방(子房) 중심에 성광상(星光狀)의 8판중엽화문을 배치하고 그 화문 둘레에 8개의 연자(蓮子)를 표현하였다.

 

그 둘레에는 역시 끝이 뾰족한 모양의 8엽중판연화가 형성되었다. 비천상은 신라종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유려하게 조식되었는데 보화형(寶花形) 구름 위에 천의자락을 날리며 무릎을 꿇고 주악하는 모습이다.

 

명문은 유곽 사이의 상대에 가깝게 가로 15.6㎝, 세로 8.3㎝의 자리를 설치하여서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그 내용으로 보아 833년(흥덕왕 8)에 제작된 종임을 알 수 있으나 연지사의 소재지는 미상이다. 이 종은 일본에 전해진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범종이다.

 

≪참고문헌≫ 韓國鐘硏究(廉永夏,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4)
≪참고문헌≫ 朝鮮鐘(坪井良平, 角川書店, 1974)
≪참고문헌≫ 日本所在の韓國梵鐘(崔應天, 奈良國立博物館, 1993)

 

출처 : 네이트백과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B&i=266655&v=44

 

140106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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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보 연지사종(鐘)은 원래 진주 금산면에 있었다"김수업 진주문화연구소 이사장, 16일 진주이야기 강연에서 새로운 견해 밝혀

 

'일본 국보'가 된 연지사종이 있던 자리는 과연 진주의 어디였는가? 연지사종은 언제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갔는가?

김수업 진주문화연구소 이사장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견해를 펼쳐 눈길을 끈다.

16일 저녁 가좌동에 위치한 ‘문화공간 더 공감’에서는 (사)진주문화연구소가 주최한 ‘김수업 선생님과 함께하는 진주 이야기’ 강연이 열려 “연지사와 청주 주치, 그 밖에…”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이날 강연자로 나선 김수업 진주문화연구소 이사장은 지금까지 나온 연구와는 다른 견해를 제시하여 청중의 이목을 끌었다.

 
▲ 김수업 진주문화연구소 이사장이 16일 저녁 '문화공간 더 공감'에서 청주연지사종이 어느 곳에 있었는지 연구한 내용을 강연하였다.

김 이사장은 먼저 통일신라 청주(菁州; 옛 진주)의 주치(州治; 행정구역인 ‘주’의 중심지)가 금산·대곡일대였을 것이므로 그 부분에 연지사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이사장은 강연을 통해 통일신라시대 청주의 주치에 대해서 “시내 지역이 아니라 큰 배가 드나들 수 있어 수로 이용에 용이한 금산·대곡면 지역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곳에 수도인 경주로 가는 물자를 실을 창고는 물론 대부분의 거주지도 밀집해 있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추가적인 증거로 그는 “청주의 청(菁)은 ‘무’를 뜻하는데, 대곡이 질 좋은 무가 많이 나는 지역으로 유명하기도 했다"며 “무엇보다 진주의 뒤벼리라는 지명 자체가 지금까지 오래도록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전통 있는 중심지가 촉석성(진주성)이 아니라 뒤벼리를 배후에 두고 있는 지역이었다고 볼 만하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연지사종의 크기로 볼 때 사찰의 규모가 제법 컸을 것이므로 주치가 멀지 않았을 것이고 구전되어 온 금호못에 관한 청룡전설을 고려하면 금산면에 연지사가 있었을 것이라고 학자로서 "직감적으로 느꼈다”고도 말했다.

▲ 진주의 흥미로운 역사와 일본에 약탈당한 연지사종에 관한 관심으로 많은 이들이 긴 강연시간 내내 자리를 함께 했다.

청룡전설이란 황룡과의 싸움에서 패한 청룡이 떨어져 파란 물이 차있는 금호못을 만들었다는 금산면의 전설로, 김 이사장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김헌창의 난’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김 이사장은 청룡전설을 두고 “이는 왕이 될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청주에서 특히 공을 들였던 김헌창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자 그를 따르던 민심이 만들어낸 전설”이며 “신라 중앙정부는 이러한 청주 민심을 달래기 위해 종을 제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같은 이유로 '금산면이 연지사종의 제자리일 것'이라는 본인의 주장을 강조했다.

또한 김 이사장은 일본 죠구신사(조쿠진자; 常宮神社)에 있는 연지사종은 흔히 알려진 대로 임진왜란 때 (국가 간 전면전의) ‘전리품’으로서 그들이 취득한 것이 아니라 고려 후기부터 들끓었던 ‘도적떼’ 왜구에 의해 약탈당했다며 환수의 당위성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김 이사장은 “국제법상 국가 간 전투에서 전리품으로 무엇을 가져간다면 취득이 인정된다는 것이 일본 측의 계산에 있어 주장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하며 “임진왜란을 중년이 되어 온전히 다 겪어 보낸 성여신(1546~1632) 쓴 《진양지》에 그 보물에 관한 기록이 없을 리 없다”고 말했다.

그는 “고려 때 마산 합포를 통해 상륙하여 거창에 거주지를 구성할 만큼 많이 들어왔던 왜구들은 곡식과 보물에 대단히 탐욕적이었다”며 “이 좋은 종을 빼먹었을 리 없다”고 확신했다.

강연 마무리에서 김 이사장은 “죽기 전에 꼭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꺼낸 이야기들”이었다며 “아직 정확하게 찾지 못한 부분은 여러분이 공부하여 확인해 달라”고 청중에게 당부하기도 했다.

강연과 질의 후 연지사종 환수위원회 대표는 “당혹스럽다 할 만큼 새로운 연구결과에 놀랍고, 또한 폭넓고 깊이 있는 연구에 감사드린다”고 하면서도 “진주에서 연구하는 학자들 간의 통일된 견해가 나와 일본과의 교섭에 집중하는 데 힘을 실어주길 바란다”고 김수업 이사장을 포함하여 함께 자리한 지역역사 연구자들에게 부탁했다.

이날 강연은 사랑방과 같은 분위기에서 진주의 참 역사와 문화를 알고 깨치는 분위기였지만 폭넓은 사료를 바탕으로 연구한 성과가 분위기를 압도하였고 강연자에 이어 마이크를 잡은 청중의 발언까지 모두 학술연구회를 방불케 했다.

 
▲ 연지사종 환수위원회 대표 “진주에서 연구하는 학자들 간의 통일된 견해가 나와 일본과의 교섭에 집중하는 데 힘을 실어주길 바란다”

연지사종은 일본 후쿠이현에 위치한 죠구신사가 소장하고 있는데, 통일신라시대 흥덕왕 8년(서기 833년)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에밀레종으로 잘 알려진 성덕대왕신종과 상원사종에 이어 3대 범종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종의 단면에는 만든 시기와 본래 있던 위치가 적혀 있어 틀림없는 우리 문화유산이지만 일본에서는 이 ‘조선종’을 국보(제78호)로 삼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에서는 2008년 진주지역민을 중심으로 ‘연지사종 복원 국민행동(현 연지사종 환수위원회)’ 발족하고 이후 연지사종을 약탈당한 문화재로 보고 그 환수 운동을 벌이고 있다.


최연준 기자  talker@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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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준 기자l승인2015.12.17l수정2015.12.17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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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사 종, 진주가 낳고 진주가 품었던 '보물'

종 명문에 옛 지명 '청주' 새겨져…연지사 관련 문헌 기록 아직 못 찾아

김종현 기자 kimjh@idomin.com 2010년 12월 06일 월요일
 경주의 불국사처럼 진주를 상징할만한 유물이자 진주사람들의 염원을 담아 만든 진주 연지사종. 하지만, 400년 전 일본에 포로처럼 끌려가 고향에서는 잊힌 존재가 됐다. 일본에서는 국보로 지정해놓고는 개인 신사 창고에 가둬놓고 있다. 이에 연지사종을 환수하려는 움직임이 2년 전부터 진주에서 일고 있다. 환수를 위한 시민단체가 결성돼 학술 조사 등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본보는 진주 연지사종 환수 국민행동이 마련한 임진왜란 당시 연지사종의 약탈 경로를 따라가는 제3차 역사기행에 동행, 취재했다. 연지사종이 어떤 종인지, 어떤 경로를 통해 일본에 약탈당했는지, 어떤 상태로 보관돼 있는지 등을 알아보고 궁극적으로 우리나라로 환수하는 방법을 생각해본다.

◇연지사종이란?

연지사종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은 두 가지다. 과연 진주의 종이 맞느냐, 일본 국보인데 환수가 되느냐다. 기자도 이런 의구심이 들었고 "과연 진주 종이 맞는가"라는 질문을 연지사종과 관련한 연구를 하는 박용국(경상대 경남문화연구원 HK 연구교수) 교수에게 던졌다. 박 교수는 단호하게 "정말 맞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절에 새겨 있는 명문에 주목하고 있다. 명문은 종의 제작과 관련한 기록이다. 명문은 118자로 돼 있다. 첫 머리는 '태화 7년 3월일 청주 연지사(太和七年三月日菁州蓮池寺)'로 시작한다. '태화 7년'은 중국 당(唐)나라 문종(文宗)의 연호(年號-우리나라에서 연대를 쓸 때 주로 중국 황제의 연호를 기준을 삼아 사용했다)로 문종 7년을 말한다. 통일신라에 적용시키면 흥덕왕 8년으로, 833년이다. 청주는 진주의 옛 지명이다. 당시 전국을 9주로 나누었고 그중에서 진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청주로 분류됐다. 박 교수는 청주는 진주가 확실한 만큼 연지사종도 진주에서 만들어진 종이라고 주장한다.

또 나머지 명문에는 종에 들어간 동(銅)의 양이나 제작에 참여한 스님들, 관련 관리들, 종을 주조한 장인의 이름 등이 차례대로 나온다. 특히 명문에는 시주 기록이 있다. 스님과 더불어 향에 거주하는 촌주 이하 상층부를 구성했던 지방민이 주축이 돼서 만든 사실도 기록해 놓고 있다. 즉 진주의 지배 계층과 향민들이 집단적으로 시주에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지금으로 표현하면 지역민들의 성금으로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다른 절이 주로 경주의 왕족이나 중앙관리 중심으로 시주가 이루어진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연지사는 어디에?

연지사가 어디에 있었을까. 그 해답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진주의 어느 지역에 있는 절에 시납된 것으로 박용국 교수는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문헌상으로 연지사가 언제, 어디서 창건되고 폐사됐는지 정확히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터조차 알 수 없다. 다만, 진주에 있던 대사지(大寺池)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 교수는 사명(절 이름)만 놓고 보면 우선 '연지'와 관련성을 추정하고 있다. 연지사라는 절은 우선 연 련(蓮), 못 지(池), 절 사(寺), 즉 연못과 관련이 있는 절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따라서 연지사는 연꽃이 가득한 절이라는 해석이다. 바꾸어 말하면 '연지'라는 지명에서 연지사의 지명이 나왔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1632년에 진양지에 나오는 사찰과 암자를 검토한 결과 연지사는 나오지 않는다. 여말선초의 기록을 봐도 연지사는 나오지 않는다. 대사라는 말은 나온다. 대부분 범종을 만드는 것이 절을 창건한 직후 만드는 것으로 볼 때 연지사는 833년 이전에 창건됐으며 고려 중기 이전에 없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그래서 이후에는 큰 절 옆에 있는 연못이라는 뜻의 대사지(大寺池)라는 말만 남아 전해졌다고 보는 것이다. 즉 연지사는 대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대사지의 위치는 진주성의 북쪽으로, 옛 동아염직에서부터 중앙초등학교와 교육지원청(옛 배영초등학교) 일부를 포함한 앞쪽 일대를 거쳐 동쪽으로 옛 중앙로터리 북쪽 편에 이르는 해자를 지칭한다.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몇 개의 못이 있어 해자의 역할을 했지만 이후 확장한다.

장소를 두고 학자들 간에 견해차가 있다. 박용국 교수는 대사지의 북쪽 편 중앙리에 있었다고 본다. 가장 유력한 곳으로 교육지원청과 동북쪽 일원으로 보고 있다. 경상대 역사교육학과 김준형 교수는 옛 의료원의 서북쪽 방면으로 보고 있다. 조수현 경상 문화재연구재단 학예실장은 객사가 있던 롯데 인벤스 아파트 자리로 보고 있다. 조 실장은 교육지원청 터와 롯데인벤스 터의 발굴조사를 한 결과 그렇게 추정하고 있다. 롯데 인벤스 터에서 사지의 회랑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역사 기행에 동행했던 현담스님(경주 휴정사)도 가람의 배치 등을 추정해 조 실장과 같은 주장을 했다. 이런 다양한 해석은 오는 18일 열릴 연지사 종 학술대회에서 격렬한 토론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연지사종은 어떤 가치가 있나?

연지사종은 일본에 남아 있는 50여 점의 한국 범종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의 국보로 지정됐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 종의 가치가 얼마만큼인지를 짐작게 한다.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국보 29호 성덕대왕신종, 국보 36호로 지정된 평창 상원사종과 함께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종으로 꼽힌다.

진주는 임진왜란 당시 가장 큰 저항을 한 동시에 피해를 본 곳이다. 왜적들의 앞길을 막아 호남의 곡창지대를 지켜냈지만 계사년에 일본이 전력을 집중해 복수전을 펼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7만 민관군의 순국과 동시에 700년 동안 진주사람들 곁에서 맑은 울림을 전하던 연지사종을 잃는 아픔도 겪었다. 지역민의 정성으로 만든 연지사종은 760년 동안 아름다운 종각에 매달려 왜구들의 노략질을 꾸짖고 겨레를 지키는 몫을 다했다. 하지만, 약탈당하는 신세가 됐고 허울뿐인 국보라는 이름을 걸치고 있다. 더욱이 조구진자는 우리나라를 침략할 때 무사귀환을 비는 곳이라 연지사종으로서는 400년 동안이나 치욕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다. 400년을 기다린 연지사종의 애끊는 심정을 더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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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7일, 연지사종을 만나는 날이 밝았다. 현담 스님은 새벽 3시에 일어나 삭발을 하고 예불을 드렸다. 다른 일행도 연지사종을 직접 본다는 생각에 잠을 설친 모습이 역력했다. 역사기행단 일행은 호텔을 나서면서 숙연한 분위기였다.

화창하던 날씨는 고속도로에 들어서면서 흐려지다가 쓰루가(敦賀) 시에 들어서자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학의 날개처럼 펼쳐진 안개 낀 쓰루가 만을 따라 해안도로를 달리니 신사가 나타났다. 바닷가와 바로 접해 있었다. 웅장한 도리이 위에 '조구진자(常宮神社)'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도리이 바로 앞에는 '국보 조선종(國寶 朝鮮鐘)'이라고 새긴 큰 바위가 일행을 맞았다. 조선으로부터 종을 가져왔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큼지막하게 새겨놓았다. 평성 17년, 즉 2005년에 제작된 것이었다. 쓰루가 시 유일의 국보이니 자랑할 만도 하겠지만 꺼림칙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신사에 들어서자 웅장한 신사 본당이 보였다. 신사는 3개의 기단으로 구성됐는데 제일 위에 본당이 있고, 2번째 기단에 오르니 사무실이 있고,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밋밋한 창고가 시야에 들어왔다. 

조구진자 작은 창고에 초라하게 보관…유두 떨어지고 용뉴 등 부식 심해


흰 벽면에 '국보 신라종'이라는 자그마한 현판이 있고, 입간판도 보여 연지사종이 안에 있음을 짐작게 했다.

붉게 물든 단풍과 제일 높은 곳에 화려하게 자리 잡은 신궁의 위풍당당한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게 연지사종은 밋밋한 창고에 초라한 모습으로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이중으로 된 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독을 엎어놓은 듯한 전형적인 신라의 종이 고향 사람들을 맞았다. 고국에서 760년을 보내고 타향에서 400년 이상을 보낸 기구한 운명의 종은 조용히 얼굴을 보여주었다. 일행은 '와'하고 탄성을 쏟아냈다. 400년을 기다린 고국의 사람들, 그것도 진주사람들이 찾아와서인지 방긋 웃으면서 일행을 안아주는 듯했다.

가늘게 내리던 비는 창고문이 열리면서 빗줄기가 거세졌다.

한 일행은 "진주사람들을 본 종이 흘린 감격의 눈물"이라는 해석을 했다. 과연 감격의 눈물일까? 400여 년 동안 타향에 발이 묶인 한의 눈물이 아닐까? 돌아가고 싶어서 발버둥치는 고통스러운 눈물이 아닐까?

무표정한 관리인은 문을 열면서 "종만 찍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 함께 나와야 한다. 종은 치지 않는다"는 주의사항부터 말했다. 조희래 연지사종 환수 국민행동 사무총장을 몇 번 봐서인지 크게 경계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한 평 반 남짓한 창고는 4~5명이 겨우 들어갈 공간밖에 안 됐다. 10명이 넘는 일행이 한꺼번에 들이닥치고, 카메라 플래시가 곳곳에서 터지자 관리인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속내를 보여주기 싫었던지 관리인의 귓불이 붉어졌다.


일본에서 3년간 외교관으로 근무했던 김경임(여) 전 튀니지 대사가 유창한 일본어로 이것저것 자세하게 물어보자 관리인도 표정이 풀리면서 종 위에 있는 설명문과 종의 유래를 아는 대로 설명했다. 타종을 해선 안 된다던 관리인은 종을 쳐주는 정성을 보였다. 1m 남짓한 막대기로 종을 치자 '덩~'하고 울렸지만 예상보다는 소리가 좋지 못했다. 신라 3대 범종의 울림이라고 하기에는 기대에 못 미쳤다. 종을 매달지 않고 바닥에 내려놓은 상태라 공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담 스님이 종을 그렇게 쳐서는 안 된다고 항의하면서 순간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스님이 "그렇게 치는 게 아니다. 내가 한번 쳐보겠다"고 종을 치는 막대기를 잡으려고 하자 관리인은 끝내 주지 않았다. 스님은 "종을 치기 전에 울림을 주어야 한다. 갑자기 치면 종이 깨진다. 종과 맞닿은 받침대를 먼저 울려서 종에 공명을 주어 자는 종을 깨워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더는 종을 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도 큰 인심을 썼다는 표정이었다.

관리인은 녹음한 종소리를 들려주었지만 역시 웅장한 맛은 나지 않았다.

안내를 맡았던 일본인 다이도우 씨는 "종에 금이 섞여 있어서 광채가 난다"고 자랑했다.

4번째로 종을 찾은 조희래 사무총장은 "2년 동안 달라진 게 많다. 좌대도 보강했고 고장 난 창고의 문고리도 교체됐다. 관람료를 받는다고 적혀 있는 것이 새롭다. 무엇보다 종이 살아나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곁에 있던 현담 스님(경주 휴정사 주지)도 "종을 자주 접하면 생기가 돌게 된다. 종에서 빛이 난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라고 받아쳤다.

종을 차마 만지지 못하고 눈으로만 보던 최연장자인 이길영 회장(진주시 사회복지사협회)은 "나라를 지키던 신라 범종이 왜장에게 끌려와 그 나라의 국보가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했다.

조수현 경상문화재연구재단 학예실장은 부식에 초점을 맞추었다. "용뉴의 부식이 심하고 유두도 떨어져 나가고 있다. 부식이 전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종이 1000년의 세월을 견뎠다면 부식은 각오해야 한다. 보존을 위한 각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눈으로 보기에도 부식은 심각했다. 일본인들이 소원을 빌면서 쓴 것으로 보이는 붓글씨가 종의 몸체 여기저기에서 보였다. 일본 국보로 대접을 받고 있지만 더는 부처님의 자비를 베풀 수 없는 검버섯이 덕지덕지 핀 늙은이가 되고 있었다.

종은 청아한 진리의 소리로 지옥에 있는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 울지 못하는 종은 박제된 종에 불과하다. 더는 치지 못하는 장식품으로 전락한 종, 이제는 고향으로 가서 여생을 마무리할 때가 왔다는 생각을 했다.

창고의 문이 닫히고 참배를 마친 일행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버스를 타던 현담 스님은 "마음을 놓고 왔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쾅'하고 창고문이 닫히는데 사랑하는 임을 감옥에 두고 오는 느낌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조정식 진주바르게살기협의회 부회장은 "가슴이 아프다. 울리지 못하는 종을 이제는 진주로 모셔야 할 때가 됐다"고 밝혔다.

일행이 참배를 하고 신사 밖으로 빠져나오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비가 그쳤다.

이 기사는 본사 해외동행취재 심의위원회 결과, 진주 '연지사종 환수 국민행동'의 임진왜란 당시 연지사종 약탈 경로를 조사하는 일본 역사 기행이 공익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판단, 김종현 기자가 동행해 단독으로 취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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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경로, 도요토미 조선 침략·약탈의 뼈아픈 상징

삼한정벌론 진구황후 모신 조구진자에 봉납…이중 굴욕진주-김해-부산-대마도-나고야성 거쳐 쓰루가로 이동

김종현 기자 kimjh@idomin.com 2010년 12월 07일 화요일

 

연지사종의 약탈 경로를 따라가는 역사 기행은 진주성에서 시작했다. 연지사가 있었던 곳이자 임진왜란의 격전지였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25일 역사 기행단은 진주성에 모여 사천의 선진리성으로 향했다. 고미술협회 감사인 조완제 씨는 "진주와 사천 등지의 많은 문화재가 왜구들에 의해 약탈당했으며 특히 임진왜란 때 극심하게 일어났다"고 밝히고 "만약 해로를 이용해 문화재를 실어날랐다면 사천만의 가산이나 중선포, 선진리 등의 포구를 이용했을 것"이란 주장을 했다.

조수현 경상문화재연구재단 학예실장은 "해로보다는 육로와 수로를 이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적이 위험이 큰 해로보다는 병력이 진주로 이동했던 길을 이용해 돌아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남강을 이용해 포로와 약탈물을 실어날랐을 것이란 주장이다. 참가자 대부분이 조 실장 의견에 동의했다.

그럼 연지사종이 어떤 경로를 따라 일본의 항구 도시인 쓰루가(敦賀) 시의 조구진자(常宮神社)에 옮겨졌을까. 현재 정확한 사실은 몇 가지다. 먼저 일본 조구진자에 종이 있다는 것과 그 종이 통일신라시대 청주(진주)에서 833년 주조됐다는 것,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신 오타니에게 시켜 조구진자에 이 종을 봉납했다는 것 등이다. 나머지 과정은 어쩔 수 없이 역사적인 자료로 퍼즐 맞추기를 해야 한다.

과연 누가 약탈하고 어디로 옮겨갔을까? 그 물음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경상대 권오현 교수(역사교육학과)의 도움을 받아 의문점을 풀어본다. 이와 관련한 논문 발표는 오는 18일 열리는 연지사종 관련 학술 발표회에서 권 교수가 자세하게 근거를 들어 설명할 것이다.

약탈 시기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가장 유력한 것이 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繼)의 약탈설이다. 이것은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한 오타니가 승리 후에 약탈,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설이다. 오타니는 임란 때 주로 선박과 물자조달을 담당했다.

조구진자에 설치된 안내판에 연지사종이 봉납된 경위를 주제로 설명하고 있다. '게이초 2년(1597년) 쓰루가 영주 오타니 요시츠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당 신사에 봉납했다고 전해지지만 이설(다른 설)도 있다'고 돼 있다.

조구진자의 소개에 따르면 '연지사종은 임진왜란 때 출병했던 도요토미의 책사 오타니가 노획해 1593년 교토 근처 군항인 쓰루가항 근처 조구진자에 봉납한 것으로 돼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선조실록에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한 후 인근의 지역을 약탈하고 포로로 잡은 남녀와 복물(卜物)을 싣고 김해로 향해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진주성이 함락된 후 문화재가 약탈당하거나 불탔고 여기에서 보이는 복물로 연지사종도 포함됐다는 주장이다. 오타니가 조선을 드나들 때 부산포를 이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럼 김해에서는 어떻게 갔을까. 오타니 일행은 부산에 가서 배를 타고 대마도를 거쳐 이키섬, 그리고 나고야로 돌아갔을 것이란 주장이 유력하다. 후쿠오카 가라츠시 나고야(名護屋)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였다. 한글로는 관광지로 유명한 아이치현 나고야(名古屋)와 같지만 연지사종이 실려간 곳은 후쿠오카 나고야다.

나고야에 도착한 연지사종이 언제까지 머물렀는지는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1593년에서 1597년 사이에 나고야에서 쓰루가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동로는 동해 쪽의 해상로를 통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동해 쪽의 해상로를 통해 쓰루가에서 나고야성으로 물건을 빈번히 실어나른 기록이 등장한다고 권오현 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권 교수는 "1597년 2월에 도요토미가 오타니에게 명령을 내려 연지사종을 봉납했다는 사료가 있다"고 밝혔다.

왜 조구진자에 안치했을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권 교수는 몇 가지 주장을 한다. 쓰루가가 옛날부터 조선과 통하는 무역항이며 조선을 침략할 때 물자조달 기지였다. 특히 조구진자는 한반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다.

조구진자는 한반도에서 양잠기술을 전해준 인물을 제사지내고 있으며 쓰루가라는 지명도 한반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오타니가 조선에서 가져온 연지사종을 쓰루가의 조구진자에 봉납한 것은 그곳이 한반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결과로 보인다는 것이다. 아울러 한반도에 출병해 항복을 받아냈다는 삼한정벌론의 당사자인 진구황후가 이 신사에 모셔져 있다는 사실도 감안됐을 것이란 주장도 하고 있다.

권 교수는 "전리품으로 일본으로 간 연지사종은 도요토미의 침략과 약탈의 상징이다. 그런 연지사종이 삼한정벌의 상징인 진구황후를 제사지내는 조구진자에 안치된 것은 이중의 굴욕"이라고 주장했다.

김문길 교수(부산외대)는 숨겨진 얘기도 소개하고 있다.

도요토미가 임란이 끝나고 명나라와 강화조약이 이루어지지 않자 재침략했는데 이때 오타니가 군사를 집결시키고 출전식을 올리면서 연지사종을 타종하고 외쳤다는 것이다.

또 메이지 천왕은 태자가 병에 걸렸을 때 연지사종을 참배함으로써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전한다는 것.

아울러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는 '중추 대보름날 밤 쓰루가에 묵으니 뜻밖에 비가 내려 가을 달은 간 곳 없고 종소리만 은은히 파도와 같이 들리네'라는 노래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밝혔다. 일본인으로서는 승전을 위한 기도처나 위안의 대상이 됐을지 몰라도 연지사종으로서는 수백 년 동안 타향에서 수모를 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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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연지사종 진주로 되돌아와야 한다
경남도민일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 때 포로처럼 끌려가 1952년 일본의 신 국보 제78호로 지정된 연지사종. 약탈 문화재 반환이 이슈로 떠오르는 가운데 도내 진주에서도 '연지사종 환수 국민행동'을 중심으로 연지사종을 환수하기 위한 시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연지사종은 높이 111cm, 입지름 66cm로 통일신라시대인 흥덕왕 8년(서기 833년)에 만들어져 진주 연지사에서 보관하였는데, 임란 때 일본이 약탈해가 신 국보로 지정할 만큼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다. 일본에 있는 종 가운데 제작연대가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종으로 알려진 연지사종은 그 크기만 보더라도 통일신라시대 종 가운데 성덕대왕신종, 상원사 종에 이어 세 번째로 크며, 일본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종으로는 가장 크다. 용통이나 무늬도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형식으로 섬세하게 주조되어 있는데, 종에 새겨진 파도무늬는 종에서는 처음 보이는 문양이라는 점에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렇게 문화재 가치가 높은 연지사종을 일본은 조선 침략의 전리품으로 가져가 삼한정벌론의 상징인 진구황후를 제사지내는 쓰루가 시의 조구진자라는 신사에 안치하고 일반에게는 공개하기조차 꺼리고 있으니 실로 연지사종의 이중 굴욕이 아닐 수 없다.

연지사종 환수에 대한 의미가 큰 만큼이나 '연지사종 환수 국민행동'의 움직임도 발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지난달 말 신라시대 옛 진주 도심지에 있던 연지사 터를 찾기 위한 본격 현장·학술조사 활동을 펼친 데 이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일본으로 가져간 진주 연지사 종의 약탈 경로를 조사했다. 특히 내년 개최 예정인 '연지사종 환수를 위한 한ㆍ일 교류대회'의 준비모임을 갖고 참석자들로부터 '적극적으로 활동하겠다'는 응답을 받아냈다.

연지사종은 진주시민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진 명실공히 진주가 낳고 품었던 진주의 보물이다. 진주는 임진왜란 당시 가장 격렬하게 왜구에게 맞서다 7만 민관군의 순국과 함께 연지사종까지 잃었다. 그후로 400년 동안이나 일본의 쓰루가 시 조구진자 신사에서 치욕스런 나날을 보낸 연지사종을 이번에는 반드시 되돌려받아야 한다. 진주성 전투에서 무참히 쓰러져간 민관군의 넋들을 연지사종의 맑은 울림으로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134㎝ 높이에 빼어난 비천상 조각

연지사 종의 전체적인 모습은 독을 엎어놓은 것과 비슷하다.

전체 높이는 133.9㎝다. 음통이 22.8㎝, 종신의 높이가 111.1㎝이며, 입 지름이 66.3㎝, 종 두께가 6.2㎝로 현존하는 일본 내 한국 종 가운데 가장 크다.

종의 꼭대기에는 용이 여의주를 문 모양의 용뉴와 함께 음통이 붙어 있으며, 상판에는 상대와 사다리꼴의 유곽(乳廓)이 있다. 무게는 360㎏ 정도다.

하단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 2개와 2구의 비천상(飛天像)을 조각했다. 비천상은 구름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천의를 날리며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됐다. 상대와 유곽 사이에는 '태화…'로 시작하는 명문이 남아 있다.

 

연지사종 왜 일본국보 됐나

뛰어난 예술성 인증 보존 상태는 나빠

김종현 기자 kimjh@idomin.com 2010년 12월 07일 화요일
  

연지사종은 1917년 미술공예 갑종 4등으로 국보로 지정된다. 갑종 4등이란 예술성이 뛰어나 갑종을 받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낮은 4등급 판정을 받았다. 그 이유는 불분명하다. 보관 상태가 좋지 못한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현재 연지사종은 유두 부분은 12개가 남아 있고 24개가 파손됐다. 몸체에 녹슨 부분이나 낙서가 남아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일본에서 급히 국보 지정을 서두르다 보니 제대로 된 조사가 되지 못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일본은 1950년 문화재보호법을 만들면서 신 국보라는 이름으로 국보 지정을 다시 하게 된다. 연지사종도 1952년 신 국보 제78호로 지정된다.

조구진자 내 연지사종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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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남도민일보 (2010년 입력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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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왜군이 약탈한 연지사종 환수 본격 나선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약탈해 간 연지사종. 현재 일본 한 신사에 보관돼 있다.

 

연지사종환수국민행동 제공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함락 이후 왜군이 빼앗아간 국보급 동종(銅鐘)을 제자리에 갖다놓으려는 민간운동이 활발한 가운데 한일 문화재 전문가와 대학교수, 시민 사회단체 관계자 등이 한자리에 앉는다. 양측이 토론을 통해 신뢰를 회복하고 발전적인 관계를 모색하기 위해서다. 환수 대상은 연지사종(蓮池寺鐘)이다. 일본 국보 78호로 지정된 이 종은 후쿠이(福井) 현 쓰루가(敦賀) 시 조쿠(常宮)신사에 보관돼 있다.

○ 반환 분위기 조성 첫걸음

‘연지사종 환수 국민행동’(공동대표 최문석)은 “17∼19일 진주 동방호텔과 진주교육지원청 등지에서 연지사종에 관한 조사활동과 학문적 근거를 토대로 ‘한일 문화재교류대회’를 개최한다”고 12일 밝혔다. 특별강연과 문화공연은 17일 오후 6시 반 동방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진행된다.


대회에는 한국에서 김경임 중원대 석좌교수(전 튀니지대사)와 이은식 창녕교육지원청 장학사(전 경남도문화재전문위원),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종로역사박물관장), 곽동해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 등이 참석한다.

일본에서는 다이도 마사아키(大道正明) 쓰루가 시 자원봉사단장, 이양수 재일 한국·조선 문화재반환문제 연락회의 간사, 이가라시 아키라(五十嵐彰)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대 교수, 강건영 재일 오사카(大阪) 한인의사회장(범종연구가), 모리모토 가쓰오(森本和男) 지바(千葉) 현 교육진흥재단 상임연구원, 이소령 일본 고려박물관 이사 등이 자리를 함께한다.

이들은 곽동해 교수의 ‘아시아권역 범종의 가치비교’라는 특강에 이어 △문화재 교류활동과 시민단체의 과제 △연지사종 보존관리 및 공동대응 방안 △연지사종 환수를 위한 한일 역할과 대책을 토론하고 평가회도 갖는다. 연지사종 환수 국민행동 조희래 시민대표는 “이번 대회는 호혜적 교류활동과 상회 신뢰회복을 바탕으로 시작하는 우리 문화재 찾기 운동의 하나”라며 “약탈문화재를 국보로 지정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일본 반환운동 단체와 연대해 연지사종 반환분위기를 조성하고 역사바로세우기로 이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국민행동은 앞으로 매년 교류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 “천년 범종을 우리 품으로”

2008년 초부터 활동에 들어가 이듬해 1월 진주에서 출범한 ‘연지사종 환수 국민행동’에는 공동대표단 23명과 운영이사회 15명, 자문위원 20명, 발기인 110명, 일반회원 및 서명자 1300명이 힘을 보태고 있다. 연지사종은 통일신라시대인 흥덕왕 8년(서기 833년)에 만들어져 진주의 옛 시가지에 있던 연지사에 시납(施納)된 것으로 전해진다. 9세기 신라 범종의 기본적인 양식을 갖췄다. 높이 111cm, 입(주둥이) 지름 66cm로 현존 신라 범종 가운데 세 번째로 규모가 크다. 통일신라 3대 범종은 상원사종과 봉덕사종, 그리고 연지사종이다.

국민행동은 그동안 소식지 발간과 환수 염원시 발표, ‘연지사종의 외유’ ‘연지사 터와 연지사종을 찾아서’라는 책과 홍보물을 펴냈다. 내년에는 연지사종 환수요구서를 공식 문서로 만들어 일본에 전달할 계획이다. 국민행동 관계자는 “국보급 문화유산이 일본에 방치돼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연지사종 환수운동을 통해 민족 자긍심을 되찾고 임진왜란 당시 민관이 한마음으로 왜적에 맞섰던 진주성 호국정신도 회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정훈 기자 manman@donga.com

 출처 : 동아일보 111213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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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사 종의 중요성과 의의
명문 통해 당시 시대상 알아볼 수 있는 사료
 
  2008년 07월 03일 (목) 17:10:40 차성진  webmaster@jinjunews.com  
 
연지사 종의 중요성과 의의
통일신라 종 변천 기준이 되는 역사적 작품
명문 통해 당시 시대상 알아볼 수 있는 사료
진주에 연지사가 있었다는 사실도 종 통해 알아

연지사 종은 겨우 7개 남아 있는 통일신라 종으로서의 희소성의 가치 뿐  아니라 한국 범종 연구에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범종에 기록된 833년이라는 제작 년대를 통해 통일신라 9세기 전반 범종의 양상을 규명하는 가장 확실한 편년자료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양식적으로 보아도 이 연지사종에 앞서 제작된 804년의 선림원지(禪林院址) 종, 그리고 실상사(實相寺) 종까지는 아직 상원사종 이후 종신에 부조되는 주악상이 2구 1조로 유지되어 왔으나 연지사 종을 처음으로 1구의 단독주악상(單獨奏樂像)으로 변모되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연지사종은 통일신라 종의 양식적 변천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인 부조 주악상의 변화를 구분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기준 작이라 할 수 있다. 이 후에 제작되는 고묘우지 종, 운천동 출토 종은 상궁신사 종처럼 1구씩의 단독 주악상이 앞뒤로 배치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나아가 10세기 초에 제작된 우사진구 종(904년)에 이르러서는 1구 1조의 주악상이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아울러 범종의 양식상 웅건한 8~9세기 초 용뉴의 모습과 달리 마치 괴수처럼 변모된 형식화가 처음 진행되었고 특히 천판이나 종신 내부가 아닌 별도의 명문구를 종신 한쪽에 잘 보이는 곳에 배치하고 있는 점도 두드러진 특징으로 자리 잡는다. 이제 종명은 일정한 규격 내에 행을 맞추어 문자를 배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 외에도 연지사 종이 지닌 중요성은 바로 명문의 분석을 통해 본 당시의 사료적 가치에 있다. 우선 명문의 첫머리에 보이는 시납사원을 통해 833년에 연지사라는 절이 진주에 소재한 사실을 파악할 수 있고 지금은 사라진 연지사의 소재를 규명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 정도의 거종을 달 수 있다는 점은 당시 연지사의 사세 뿐 아니라 말미에 보이는 황룡사에 주석한 각명화상의 기록을 통해 연지사가 지닌 불교계에서의 위치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특히 연지사 종에 있는 명문에는 이전 시기의 종과는 다른 시주의 기록이 보인다. 그 순서는 승려+촌주 및 촌의 유력자+장인으로 되어있다. 즉 이 종은 사찰에 속한 스님과 더불어 향에 거주하던 촌주 이하 상층부를 구성하던 지방민이 주축이 되어 만든 사실을 통해 향의 지역집단이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전 시기의 종 명문을 보게 되면 주로 왕경인(王京人)을 중심으로 개인적인 시주가 주류를 이룬 것에 반해 이 연지사종은 향의 지배계층과 향민들이 집단적으로 시주로 참여한 점이 주목된다.

다른 범종과 마찬가지로 주조 장인으로 기록된 ‘성박사’ ‘안해애대사’, ‘애인대사’라는 인명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들은 그 직함으로 미루어 지방에 소속된 장인일 가능성이 많다.

또한 이 종의 명문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합입금’이라고 하는 소요된 중량 외에 ‘고금’과 ‘가입금’의 표현이다. 이것은 이 종을 주조할 때 전에 사용하던 청동기물이나 종을 다시 용해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때의 중량을 ‘고금’, 새로 추가된 분량을 ‘가입금’으로 표기하고 이 두 중량을 합친 양과 실제 종의 무게가 차이가 나게 됨에 따라 원래의 양각명을 고치고, 새로이 ‘칠백십삼정’으로 음각한 흥미로운 사실을 볼 수 있다. 당시 범종 주조에 있어 다양한 면모를 밝혀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기록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이 종에는 통일신라 이두식 표현은 물론이고 당시 관직명과 승직, 나아가 9세기 진주지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지방직의 활동 등 당시의 지방 행정 체제나 사회 제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 자료의 역할도 한다.

특히 이 종은 일본에 남아있는 50여점의 한국 범종 가운데 1953년 유일하게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다. 일본에서조차 이 범종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범종의 보존 상태는 그다지 양호하지 않으며 많은 부분의 부식과 녹으로 손상이 심한 편이다.

또한 종신의 여러 부분에 일본에서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묵서명(墨書銘)이 어지럽게 기록된 점을 볼 수 있어 더욱 안타깝게 여겨진다. 언제인지 몰라도 고국을 떠나 일본으로 옮겨간 진주의 연지사종은 이렇게 원래의 조성 목적과 의미를 상실한 채 조구신사라는 또 다른 종교 단체의 보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오랜 세월 잃어버린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이 범종 외에도 일본에 남아있는 많은 수의 우리 범종은 이처럼 사찰 뿐 아니라 신사의 가장 대표적인 소장품으로 자리 잡아 일본인들과 함께 동고동락해 오고 있다. 이들 일본에 있는 한국 범종이야말로 우리나라 범종 연구의 공백을 충실히 채울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자 잃어버린 우리의 문화유산이란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출처 : 진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