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금속으로 주조한 타악기. 악종(樂鐘) · 시종(時鐘) · 경종(警鐘) · 범종(梵鐘)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한국민족문화의 소산으로서 종이라 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범종을 말한다. 범종은 법고(法鼓) · 운판(雲板) · 목어(木魚) 등과 함께 사찰사물(寺刹四物) 중의 하나로 중생을 제도하는 의식법구(儀式法具)이다.
원래 고대 인도에서 시간을 알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범종은 부처님의 진리나 자비를 담아 온 누리에 퍼지게 함으로써 중생을 교화하고 그들을 불세계(佛世界)로 인도하는 매개체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범종은 중국종이 철종(鐵鐘)인데 비해 모두 청동(靑銅)으로 주조하였기 때문에 동종(銅鐘)으로 불리며, 그 규모나 각 부분의 조각 및 문양으로 보아 불교공예품 뿐 아니라 한국금속공예 전반에 걸쳐 가장 대표적인 금속공예품이다. 범종은 일반적으로 종각(鐘閣)에 현수(懸垂)하며, 중형이나 소형의 종일 경우 대웅전(大雄殿)에 현가(懸架)를 설치해 매달기도 한다.
2. 한국종의 구조
한국 범종의 기원은 중국 주대(周代)에 성행했던 악기의 일종일 고동기(古銅器) 중의 하나인 용종(甬鐘)을 모방하여 형태가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즉 용종의 현수하는 부분인 포뢰가 종뉴(鐘뉴)로 발전하고 정부(鉦部)는 종신(鐘身)으로, 표면의 36개 매(枚)는 36종유(鐘乳)로, 수(隧)는 당좌(撞座)로 발전하였다. 이같이 중국이나 일본의 종에 비해 가장 고식(古式)의 양식과 특수한 구조를 갖추고 있어서 ‘한국종(韓國鐘)’이라는 학명(學名)으로 통용되고 있다.
한국종의 특수한 구조를 살펴보면, 종뉴 아래 항아리를 엎어놓은 듯한 종신이 연결된 상태인데, 종뉴는 용뉴(龍뉴)인 한마리의 용(單龍)이 종소리와 관련된 음통(音筒)을 휘감고 있는 형태이다. 종신은 정부(頂部)로부터 벌어지며 내려오던 외곽선이 종복(鐘腹) 부분에서부터 서서히 구연부(口緣部)를 향해 오므라드는 선형(線形)을 그리고 있다. 종신의 맨 위에는 상대(上帶)가, 아래에는 구연부에 붙어서 하(下帶)가 배치되었으며, 이 상 · 하대에는 문양이 시문된다. 상대에는 4곳에 사다리꼴 유곽(乳廓)이 붙어 있으며, 이 유곽 안에는 종유가 3개씩 3줄(9개)로 돌출되어 모두 36개의 종유가 있다. 유곽과 유곽 사이의 아랫부분인 종복에는 비천상(飛天像)이나 불 · 보살상이 당좌와 교대로 배치된다. 이러한 종의 각 부분에 시문되는 문양으로는 주로 연화문(蓮花文) · 연화당초문(蓮花唐草文) · 보상화문(寶相花文) ·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 · 초문(草文) · 범자문(梵字文) · 운문(雲文) 등이 있다.
또한 제작기법은 밀납(蜜蠟)으로 성형한 후에 2∼3개의 주형틀을 상 · 하로 짜맞추어 열을 가해서 밀납을 녹여 없애고 그 빈 공간에 쇳물인 용탕(溶湯)을 부어넣는 밀납주조방식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쌍룡(雙龍)으로 된 종뉴아래 띠장식으로 구획되어지고 능형(稜形)의 구연부를 가진 종신이 연결된 중국종과는 구조적인 차이가 있다. 이렇듯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는 한국종은 음통과 오므라든 종신형이 종소리를 웅장하고 여운이 오래 남도록 유지해주므로 법음(法音)을 전파해주는 좋은 매체로서 불심(佛心)을 다해 제작되어 왔던 것이다.
한편, 다른 미술품에 비해 거의가 명문(銘文)이 있어서 범종 자체의 양식측정이나 당시의 불교계나 사원경제상황, 주종장인(鑄鐘匠人)들의 세계를 연구하는 데 절대적인 자료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불교미술품의 편년설정에 기준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종의 각 부분에 시문된 문양이나 고부조(高浮彫)된 비천상 · 불보살상 · 용뉴 등은 문양사와 조각사 연구에 좋은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점이 그러하다.
이러한 한국종은 삼국시대 불교의 전래 이후 만들어졌을 것이 분명하나, 《삼국유사》같은 문헌에서만 단편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을 뿐 구체적인 유물자료가 남아있지 않고, 현재로서는 통일신라시대 종인 상원사종(上院寺鐘, 725)이 가장 이른 작품으로 남아 있다.
3. 통일신라시대
한국범종의 전형적인 양식과 형태는 이 시기에 주조된 상원사종과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771)에서 그 규범을 찾아볼 수 있으므로,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의 범종의 형식 및 양식변천을 고찰함에 있어서 이들이 기준이 된다.
이때의 종들은 문헌에만 남아 있는 황룡사종(皇龍寺鐘, 754)과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성덕대왕신종처럼 호국불교의 상징처럼 제작된 거종(巨鐘)들을 위시해 대개가 크기가 큰 편에 속한다. 현재 국내 외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 종들은 10여구를 넘지 못하는데, 국내에는 상원사종 · 성덕대왕신종 · 청주운천동출토동종(9세기후반, 국립공주박물관) · 선림원지종(禪林院址鐘, 804, 1951년 소실) · 실상사파종(實相寺破鐘, 9세기중반, 동국대학교박물관)이 있고, 일본에 운수사종(雲樹寺鐘, 8세기) · 상궁신사종(常宮神社鐘, 833) · 광명사종(光明寺鐘, 9세기) · 우좌신궁종(宇佐神宮鐘, 904) 등이 보존되어 있다.
이들 신라범종의 형태와 각부의 표현수법을 종합하여 세밀히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사실성이 농후한 종뉴 아래 항아리를 엎어놓은 듯한 종신이 연결되었는데, 종뉴의 용의 얼굴이나 자세 등에서 조각성이 잘 살려져 있으며, 음통은 앙련(仰連)과 복련(覆連)이 서로 어울려 2, 3개의 마디를 형성하였다.
종신은 종복 아래부분이 볼륨감과 팽창감이 감돌며,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종신 상대에는 반원권(半圓圈)문양을 시문한 것이 많고, 성덕대왕신종과 실상사파종처럼 보상당초문이 장식된 예도 있다. 상대에 연결된 유곽은 유곽대(乳廓帶)문양을 상대문양처럼 반원권문양을 주로 사용하였고, 그 외에도 보상당초문 · 천인상 · 천부상(天部像) · 화문(花文) 등을 시문한 것도 있다. 하대는 대부분이 상대나 유곽의 문양과 같은 반원권문양을 주문양으로 사용하고, 보상당초문과 파상문(波狀文)을 장식하기도 했다. 또한 이 주문양대(主文樣帶)의 내부에 주악상(奏樂像) · 연화문 · 당초문 · 운문 등을 조식하였다.
당좌는 일반적으로 2개의 원형당좌를 종복 아래부분에 배치하였는데,형태는 연주문대(蓮珠文帶) 안에 연화나 보상화가 있으며, 이 꽃들은 자방까지 갖추었다. 신라종의 주요 장식인 비천상은 구름 위에서 무릎을 꿇거나 앉아서, 또는 결가부좌한 상태로 천의(天衣)자락을 흩날리며 생(笙) · 공후(공후) · 요고(腰鼓) 등의 악기를 주악하거나, 합장하고 공양하는 자세가 생동감있게 조각되었다.
이같은 통일신라종은 전성기였던 8세기에 비해서 9세기 들어서는 다소 양식적인 쇠퇴를 보인다. 즉 8세기의 종들은 종신이 매우 안정감이 있고 팽팽한 기운마저 느낄 수 있으며, 사실적인 용뉴나 생동감이 풍부한 세부문양표현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9세기 이후의 종들은 종신의 팽창감이 줄어들고 용뉴도 작아지며 각부의 문양도 난숙한 사실성이 적어졌음을 지적해 낼 수 있다.
한편, 신라종의 의의는 첫째 한국범종의 규범이 된다는 점과, 둘째 용뉴나 비천상 등은 조각성이 뛰어난 사실적인 고부조(高浮彫)여서, 당시 조각양식을 대변해 주고 있음과 동시에 절대적인 편년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 셋째 종의 주조기법은 한국주조발달사(韓國鑄造發達史)를 파악케 해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라는 점을 들 수 있겠다.
4.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불교는 통일신라시대와 같이 호국불교로서 왕실은 물론 일반전체에 널리 확산되었고, 밀교(密敎)의 유행에 따라 의식(儀式)이 성행하였다. 때문에 범종을 주성하는 일도 빈번하였으므로 오늘날 남아있는 범종의 수량 역시 많다. 고려시대는 무신란을 중심으로 12세기 중엽까지를 전기라 하고 그 이후를 후기라 하는데, 전기는 북방 요(遼)의 연호를 사용하던 때로 공예미술이 괄목할만한 발전을 보였었고, 후기는 독자적인 ‘간지(干支)’로써 기명을 나타냈으며, 고려예술의 각 부분이 치졸화되고 평민화되어 가던 때였다.
범종 또한 전기에는 신라종의 전통을 계승하여 위풍스러운 모습과 안정감 · 조각성이 남아 있었으나, 후기에 들어서는 크기가 왜소해지면서 중종(中鐘) · 소종(小鐘)이 많아지며, 종신의 견부(肩部)에 입상화문대(立狀花文帶)가 장식된다. 이러한 고려시대 범종은 그 유례가 많지만,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전기에 속하는 주길신사종(住吉神社鐘, 10C) · 용주사종(龍珠寺鐘, 고려초) · 천흥사종(天興寺鐘, 1010) · 원성사종(圓城寺鐘, 1032) · 청녕4년명종(淸寧四年銘鐘, 1058) · 건통7년명종(乾統七年銘鐘, 1107) 등이 있고, 후기에 속하는 종으로 내소사종(來蘇寺鐘, 1222) · 지하해신사종(志賀海神社鐘, 13C) · 탑산사종(塔山寺鐘) · 죽장사기축명종(竹丈寺己丑銘鐘, 1229) · 봉은사종(奉恩寺鐘. 1392)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을 토대로 고려시대 범종양식을 살펴보면, 전기까지는 비록 전대(前代)에 비해 규모가 작아졌으나, 종구(鐘口)와 종신(鐘身)의 비율이 신라종의 비율을 답습했다. 종뉴는 조각성이 감퇴되어 용의 몸이 S자형으로 현수의 기능이 강조되고, 음통도 원통처럼 저부조(低浮彫)로 장식되었다. 종신에는 비천상 외에도 불보살상과 천왕상이 등장하는데, 천개를 갖춘 불상과 춤추는 천녀상 · 공작명왕상, 수대(綏帶)로 장식된 악기들이 하늘에서 흩날리는 모양 등에서 장식성이 농후해졌다는 점을 느낄 수 있고, 더욱 위패(位牌)의 설정은 의식성(儀式性)을 감지케 한다. 종정(鐘頂)의 천판(天板) 테두리에는 화려한 연판(連辦)을 눕혀서 장식하였고, 상대 · 하대 · 유곽대에는 신라종과 마찬가지로 당초문 · 보상화문 · 반원권문을 시문하였으나 전대에 비해 저부조된 양상이다. 후기의 종들은 밀교의 성행과 재료의 부족으로 인해 크기가 30∼50㎝정도로 급속히 왜소해지고, 견부(肩部)에 산형(山形)의 입상화문대가 장식된다. 종신의 균형감이 깨어지고, 각 세부의 문양은 조잡해졌으며, 구름위에 앉은 보살좌상이 많아진다. 주조기법 역시 치졸해져 종신표면이 거칠어졌다.
이같이 고려시대 범종은 범종을 제외한 기타 금속제 불구인 정병(淨甁) · 향완(香완) · 금고(金鼓) · 금강령(金剛鈴) · 금강저(金剛杵) · 당간(撞杆) 등과 일상용품인 동경(銅鏡)이 통일신라시대에 비해 괄목할만한 발전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양식적인 퇴보를 보였다. 한편, 고려말 원의 장인(匠人)들에 의해 만들어진 연복사종(演福寺鐘, 1346)은 고려종과는 전혀 다른 쌍룡의 종뉴, 종복의 굵은 띠장식과 구획지은 종신, 팔능형의 구연부, 파도문과 팔괘장식, 범문(梵文)의 시문 등 중국종 양식을 따른 것이었는데, 이 종은 조선초기의 종 형식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5. 조선시대
억불숭유정책을 정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는 불교미술의 퇴보를 가져와 주종횟수도 줄어들었으나, 초기의 태조 · 세조의 귀의에 의해 약간의 작품들이 제작되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전쟁의 피해복구로 인한 대대적인 불사(佛事)의 성행으로 많은 종이 제작된다. 또한 중국종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범종형식이 출현하기도 한다. 이 시기 범종의 편년은 종의 형식과 주성예(鑄成例)로 보아 1400∼1500년경의 1기, 1500∼1600년경의 2기, 1600∼1800년경의 3기, 1800년경 이후의 4기로 뚜렷이 구분할 수 있는데, 이것을 다시 전기(1 · 2기)와 후기(3 · 4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조선전기
조선 전기의 범종들은 대체로 규모가 거대한데, 이것은 불교를 보호한 왕실과의 관계에서 주성되었기 때문이다.
1) 제1기
1기에 제작된 종으로는 왕실에서 주성한 흥천사종(興天寺鐘, 1462) · 봉선사종(奉先寺鐘, 1469) · 낙산사종(洛山寺鐘, 1469) · 보신각종(普信閣鐘, 1468) · 수종사종(水鍾寺鐘, 1469) · 해인사대적광전종(海印寺大寂光殿鐘, 1491) · 원통사종(圓通寺鐘, 조선초, 일본 대마도 원통사) 등이 있는데, 이들 중 해인사대적광전종과 수종사종을 제외하고 모두 1.5m∼2.8m에 이르는 큰 규모의 종들이다. 이들 1기의 종들의 양식적 특성은 고려말의 연복사종의 영향을 받아 중국종의 특징인 음통없는 쌍룡의 종뉴와 종복에 둘러진 띠장식(彫線帶)이 가미된다. 즉 한국종의 고유한 특징인 음통이 사라지고 쌍두일신(雙頭一身)의 용의 몸체로 종을 현수할 수 있게 했으며, 장방형(長方形)의 종신은 정부가 포탄처럼 둥글고 안으로 오므라들지 않는 수직선형의 외형선을 갖고 있다. 이 종신에는 가운데 굵은 띠장식이 가해졌으며, 상 · 하대가 특별히 마련되지 않고, 견부(肩部)에 상대처럼 복련대가 둘러졌다. 하대 또한 구연부와 떨어져 약간 윗쪽으로 문양대가 형성되었으며, 이 문양대 밑에는 약간 두드러져 무문대(無文帶)를 이루고 있다. 4개의 유곽은 위의 상대에서 분리되어 완전한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는데, 유두는 통일신라 · 고려종처럼 돌기형[⊃]이 아닌 반원형[)]을 보이고 있다. 이 4유곽과 교대로 4구(軀)의 합장한 보살입상이 등장하였는데, 이처럼 보살입상이 배치되는 것은 조선 초기에 처음 등장하는 특징으로 이후 줄곧 지속된다. 또 보살입상 주위에는 범자가 양각되어 고려 때보다도 더욱 범자의 유행을 볼 수 있다. 당좌는 따로 마련되지 않아 종신의 하단부 아무곳이나 타종한다. 명문은 종신 하단부에 새겨져 주종관계자료를 전해주고 있는데, 감역(監役) 아래 주성장(鑄成匠) · 조각장(彫刻匠) · 로야장(爐冶匠) · 각자(刻字) · 화원(畵員) 등으로 세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1기 종들에 시문된 장식문양으로는 연화문과 당초문 그리고 이 시기에 새로 등장한 파도문을 들 수 있는데, 대체로 공예의장화된 양상을 띈다.
2) 제2기
2기의 종들은 1기와는 달리 대부분이 사찰단위로 제작되었으며, 전통적인 신라 · 고려종 양식을 따라 음통과 입상화문대가 있는 항아리형 종신을 가지고 있다. 이 시기에 속하는 종으로는 백련사종(白蓮寺鐘, 1569) · 광흥사만력원년명종(廣興寺萬歷元年銘鐘, 1573) · 용천사종(龍泉寺鐘, 안정사 소장) · 석남사종(石南寺鐘, 1580 ,소재불명) · 태안사종(泰安寺鐘, 1581) · 갑사종(甲寺鐘, 1584)이 있는데, 크기는 60∼130㎝ 정도이다. 이들은 원통형의 음통을 단룡(單龍)이 휘감은 종뉴 아래 항아리를 엎은 듯한 종신이 연결된 형태로 구연부가 약간 오므라든 편이다. 종신의 견부에는 입상화문대가 둘러져 있고, 복련이나 보상화문으로 장식된 상대 아래 범자문대가 또다시 1줄 배치되었다. 이에 붙어서 사다리꼴의 4윤곽이 마련되었는데, 당초문으로 장식된 유곽대 안에 있는 종유는 1기처럼 반원형을 보이고 있다. 이 윤곽과 교대로 배치된 보살상들은 대개 관음보살상으로 추정되나, 갑사종처럼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석장을 쥔 지장보살상도 있다. 당좌는 종복 아랫부분에 비치되었다. 그 아래의 하대는 구연부에서 약간 윗쪽으로 2줄로 띠장식을 마련해 그 속에 연화당초문을 배치했기 때문에 띠장식의 존재유무가 얼른 눈에 띄지 않고 마치 하대장식처럼 보인다. 대체로 이 시기에 속하는 종들은 전통을 재현한 것들로서, 1기보다는 종의 규모는 작아졌으나 비교적 안정감이 있고 세부문양도 정교하고 생동감이 있는 편이다. 한편 갑사종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만력11년(선조 16, 1583)에 북도의 오랑캐가 난을 일으켜 하삼도(下三道) 각 사찰의 큰 종을 모아 우리나라 군사들의 병기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어, 갑사종 이전까지의 많은 종들이 녹여졌음을 시사해주고 있어 주목된다.
(2) 조선후기
이러한 전기 종들에 비해 임진왜란 이후에 등장하는 후기 종들은 압도적으로 많고, 오늘날 각 사찰에 남아 있는 종들은 대개가 영 · 정조시대(淸 康熙∼乾隆期)에 제작된 작품들이어서 풍성했던 당시의 불교문화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후기는 잇따른 전쟁으로 인한 사찰의 피해복구에 따라 활발한 주성이 이루어졌으므로 명실상부한 한국종의 새로운 부흥기라 할 수 있다. 또한 사찰단위로 종을 자유롭게 만들었던 때이니만큼 임진란 이전까지 축적되었던 모든 형식을 취한 다양한 종들이 한꺼번에 출현하므로 한국종의 흐름이 한눈에 파악된다. 즉 신라 · 고려 · 조선전기의 특징들이 모두 혼합되어 새로운 종형을 이루며, 조선 초기의 외래적 요소가 이제는 토착화되어 한국종의 한 부분이 되어 버렸다. 이같은 조선 후기의 종들은 거의가 명문이 있으므로, 당시의 불교미술품의 연대설정에 기준이 될 수 있음과 동시에 불교미술양식을 엿볼 수 있다는 데 그 의의가 있으며, 또한 당시 사회와 사원경제, 공업의 발달상황 및 분업화와 장인들의 활동 등을 시사해주는 좋은 자료이다.
현재 100여점 이상 남아 있는 후기의 종들은 크기 · 형태 · 색감 등이 일정치 않고 실로 다양하여 엄격히 구분하기가 곤란하지만, 대체로 종형과 세부에서 드러나는 형식에 따라 3종류로 분류된다. 첫째는 신라 · 고려시대 종들에서 보여지는 한국적인 특색을 많이 갖춘 것, 둘째는 조선 초기 종에서 보이는 외래적 요소인 띠장식을 갖춘 것, 셋째는 17세기 말에 출현하여 18세기에 주로 보이는 도식적(圖式的)인 종들로서 전남 경남지역에서 활동했던 주종장인가계(鑄鐘匠人家系)인 김씨일가의 작품들이다. 이들은 좀더 세분하면 다시 음통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누어질 수 있으며, 이 3가지 유형은 후기(3기 · 4기)의 두 시기동안 양식적인 차이만 드러낼 뿐 조선말까지 지속되는 유형들이다.
1) 제1유형
먼저 제1유형은 임란 직후에 대두되는 유형으로서 2기 종들에서 보이는 형식을 모두 갖추고 있어, 신라 · 고려종의 부분적 형식을 계승하고 1기의 종형식을 약간 가미시킨 혼합형이지만, 다른 유형에 비해 한국적인 특색을 가장 많이 갖춘 형식이다. 즉 대개의 종들이 고유한 음통을 갖고 있으며, 종신형은 항아리를 엎어놓은 듯한 형태로서 정부는 거의 수평에 가까운 납작한 곡선을 취하고 있는데, 그 외형선은 견부에서 벌어지며 내려오다 종복부터는 안으로 오므라드는 선형(線形)을 취하고 있다. 견부에 입상화문대가 장식되는 종도 있고, 상대는 원문범자형태로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이 1줄로 장식되거나, 파지옥진언(破地獄眞言)까지 합해 2줄로 장식되기도 한다. 하대는 거의가 구연부에 붙어있으며, 연화당초문이 주로 시문되었다. 유곽은 17세기말까지는 화문(花文)과 초문(草文)이 장식된 사다리꼴로서 상대에 붙어있다가 18세기부터는 기하문의 정사각형으로서 상대에서 분리되어 종복에 위치한다. 이 유곽 사이에 위치한 보살상은 연화가지를 쥐거나 합장한 채 구름 위에 서있는 모습이다. 명문은 종복에 명문판으로 조각조각 나열되어 있다. 이와 같은 전통형의 범주에 속하는 종들은 삼막사종(三幕寺鐘, 1625)을 선두로 17세기 후반에 많이 제작되었고, 18세기에 이르러 다소 변모된 모습을 보이다가 18세기 후반부터는 조성이 별로 없는 편인데, 이들을 세밀히 살펴보면 한 그룹(group)으로 묶여지는 비슷한 부류가 있음을 지적해 낼 수 있다. 즉 병자호란 이전의 종들, 17세기 후반의 종들, 18세기초의 종들로서, 이들은 종신형이 비슷할 뿐 아니라 세부묘사에 같은 문양판을 이용하였으므로 하나의 계열을 형성하는데, 이는 주종장인들이 문양판을 가지고 다니며 기술과 함께 세습했기 때문이다. 먼저 병자호란 이전의 종으로는 삼막사종 · 쌍계사종(雙磎寺鐘, 1635) · 무량사종(無量寺鐘, 1636) 등을 꼽을 수 있고,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후반의 종으로는 청룡사종(靑龍寺鐘, 1673) · 통도사종(通度寺鐘, 1686) · 능가사종(楞伽寺鐘, 1698) 등이 대표적이며, 18세기 전반의 종으로는 화엄사종루종(華嚴寺鐘樓鐘, 1711) · 송광사종(松廣寺鐘, 1716)을 들 수 있겠다.
2) 제2유형
제2유형은 17세기초 현등사종(縣燈寺鐘, 1619)에 처음 보이기 시작하는데, 외래양(外來樣)인 띠장식이 도입된 유형으로서 조선 후기 종의 상당수가 이에 속한다. 이 형식은 조선 초기(1기)종의 형식을 계승하고, 재래식과 혼합하여 토착화시킨 것으로 마치 종을 결박하고 있는 듯, 종신을 가로질러서 몇개의 띠장식이 시문된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 제2유형은 대체로 저부조를 보이며, 종신과 구연부의 비율이 일정치 않다. 예컨대 장방형에 가까운 것, 정방형에 가까운 것 등이 있는데, 전자는 대종(大鐘)에서 많이 보이며, 후자는 중종(中鐘)이 많다. 음통은 없는 것이 많으며, 쌍룡 또는 단룡의 종뉴 아래의 종신은 그 정부가 곡선형이고, 종신형은 수직형 · 전통형 · 벨형(bell형) 등 다양한 형태이다. 이러한 종신에는 보통 1∼4개 정도의 띠장식이 횡(橫)으로 둘러졌는데, 종신 중앙에 띠장식대(굵은 선을 중심으로 上 · 下에 가는 線이 있는 3줄의 線)로 표현한 것, 구연부의 약간 윗쪽에 1줄을 두른 것, 상대를 표시하듯 범자밑에 1줄을 두른 방식이 서로 혼합되어서 다양하게 혼용되었다. 원문범자의 상대와 도안화된 초화문 · 기하문으로 장식된 유곽, 합장보살입상, 양각판에 쓰여진 명문 등의 배치방식은 다른 유형의 종들과 같으나, 하대는 거의가 없는 편이다. 이 제2유형에 속하는 종들 중 보광사종(普光寺鐘, 1634) · 직지사종(直指寺鐘,1658) · 강화동종(江華銅鐘, 1711) · 범어사종(梵魚寺鐘, 1728) · 다솔사종(多率寺鐘, 1770) · 대흥사종루종(大興寺鐘樓鐘), 1772) 등을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겠다.
3) 제3유형
제3유형은 밋밋한 도식형으로서 17세기말 실상사종(實相寺鐘, 1694)에서 처음 보이는 형태인데, 18세기 이후에 많이 출현하며, 전라도지역과 경상남도 해안지역에서 주로 보이는 종들이다. 겨우 타종(打鐘)의 기능만 강조되어 종의 형태만 갖추었을 뿐, 장식적인 면은 거의 없는 편이다. 이 종들은 전체적으로 양감(量感)이 없어 표면이 밋밋하고 각 부분의 비율이 맞지 않아 균형미가 적고, 볼록한 정부와 오므라들지 않고 수직으로 내려온 외형선형의 종신을 가진 종들이다. 종신에는 1개의 선으로 종정(鐘頂)과 신부(身部)를 구분하였으며, 통례적인 상 · 하대가 따로 마련되지 않고, 단지 범자를 상대의 자리에 띄엄띄엄 배열하였을 뿐이다. 보살상과 도식화된 유곽은 종복에 배치되었는데, 종유는 기하학적인 원문(圓文) 가운데에 낮은 반원형으로 돌출시켰다. 이 부류에 속하는 종들은 선암사종루종(仙巖寺鐘樓鐘, 1700) · 도림사종(道林寺鐘, 1706) · 화엄사구층암종(華嚴寺九層庵鐘, 1728) · 옥천사대웅전종(玉泉寺大雄殿鐘, 1782) 등이 그 대표적이다.
이상과 같은 3기의 종들은 17세기에는 비교적 생동감 있는 사실적인 표현양식을 보이나, 18세기부터는 쇠퇴현상으로 흘러 기하학적인 표현의 도식화된 양상을 띤 종들을 볼 수 있다. 즉 전체적으로 양감이 부족하고 균형을 잃어 안정감이 결핍된 듯하며, 종신의 공간감도 적어졌다. 표면은 거친 느낌을 주는 선으로써 낮게 양각되었는데, 짧고 굵은 선으로 기하학적으로 시문되었다.
그러나 4기인 조선 말기에는 18세기 종들보다도 더욱 치졸해지고 단지 종이라는 기능만 있을 뿐, 불구로서의 의미라든가 금속공예품으로서의 가치는 찾아볼 수 없고, 그나마도 주성횟수가 급격히 줄어 남아있는 작품도 적다. 이때의 종들 중 비교적 양호한 것으로는 한산사종(寒山寺鐘) · 해인사종루종(海印寺鐘樓鐘) · 동화사종(桐華寺鐘) 등이 있다. 한편 조선후기 종들은 대체로 3 · 4 · 5월에 많이 주성했는데, 그것은 모형재료(模型材料)인 밀납이 고온에서 잘 녹고 저온에서는 응고되는 특성이 있으므로 한여름과 한겨울을 피했기 때문이다.
6. 주종자
주종발원자(鑄鐘發願者)의 계층은 그 지방사람들인 일반신도와 해당 사찰의 비구로 구분되는데, 신도는 후원자로서 경제적인 면을 담당하고 비구들은 임시조직기구를 설정해 효율적인 주성을 관리하였으며, 그중 주종화원은 직접 제작에 임했다. 이렇듯 사찰 내의 승장(僧匠)들과 일반 주종장들이 철저한 분업 하에 종을 만들었는데, 이때의 주종장들은 자유롭게 장인집단을 이루면서 초빙에 의해 각지를 다니면서 종을 주조하였다.
이들은 승장계와 사장계(私匠系)의 큰 흐름 아래 소수의 유파(流派)로 파생되는데, 승장계는 전통형의 종을 만들었던 죽창(竹창) · 지준(智俊)파와 사인(思印)파가 있고, 사장계는 외래형식을 만들었던 김용암(金龍巖)-김애립(金愛立)파와 도식형 종을 제작한 김상립(金尙立)-성원(成元)부자, 전통형식의 윤씨파(尹氏派)가 있으며, 승장계를 이어 전통형식 종을 제작한 이씨파(李氏派)도 있다.
대체로 이들은 17세기에는 승장계와 사장계가 공존하면서, 사장계는 전라도 지역에서만 활동하였고, 경기 · 충청 · 경상 지역은 모두 승장계가 장악하였지만, 18세기 초부터는 승장계가 현격하게 소멸되어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정도였고, 대신 사장계가 주종계를 장악하는 현상을 보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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