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17 화성 용주사 종
고려 범종 대표 수작으로 국보 가치 충분
통일신라 종 전형 양식 구비
정교한 문양 주조기술 ‘걸작’
제 나이 잃어버린 종 아쉬움
어느 절서 옮겨온 지 불분명
지금까지 살펴본 통일신라 후기로부터 고려 전기까지의 범종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양식의 정착이라는 과도기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기적 경향을 토대로 본 호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고려 전기 범종이 바로 화성 용주사(龍珠寺)에 소장된 국보 범종이다.
용주사 종이 원래 어느 절에서 옮겨온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 종이 광복 이후 국보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144cm를 지닌 비교적 큰 외형과 완전한 보존 상태 뿐 아니라 몸체에 큰 글자로 새겨진 통일신라에 해당되는 명문의 중요성 때문이기도 하였다. 기록된 명문을 살펴보면 ‘성황산갈양사 범종일구석반 야주성이만오 천근 금상십육년구 월일사문 염거(成皇山葛陽寺 梵鍾一口釋般 若鑄成二萬五 千斤 今上十六年九 月日沙門 廉居)’로, ‘성황산 갈양사 범종으로서 이만오천근을 들여 금상 16년 모월 모일에 사문 염거가 발원하였다’는 어쩌면 범종의 명문으로는 매우 간결한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금상 16년은 범종의 다른 쪽 몸체에 기록된 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 16년으로서 854년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일단 명문을 통해보면 이 종은 통일신라 854년에 염거 스님이 갈양사(葛陽寺)를 창건하고 그 때 이 종도 함께 주조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 명문은 종의 제작과 관계없는, 그것도 그리 오래 전이 아닌 20세기 초에 추각된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 종의 발원자로 기록된 염거화상의 입적 년대가 20세기 초에 들어와 밝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강원도 원주에 있었던 염거화상의 승탑(국보 140호)은 우리나라 승탑 가운데 가장 오랜 예로 평가받는데, 이를 입증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안에서 발견된 금동 탑지(金銅塔誌)였다. 이 탑지는 1914년 일본인들에 의해 승탑을 해체하면서 사라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발견되어 1919년 총독부 박물관에서 다시 구입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가로 17.2cm×세로 28.8cm의 방형 탑지에 기록된 명문의 내용 중에 ‘회창사연세차갑자계---염거화상탑거석가모니불, 입열반일천팔백사연의(會昌四秊歲次甲子季---廉巨和尙塔去釋迦牟尼佛, 入涅槃一千八百四秊矣)’라는 구절이 있어 염거화상이 844년에 입적한 것임을 분명히 밝혀주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가치를 뒤늦게나마 인정받아 2015년 보물 1871호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승탑 내에서 발견된 염거화상 탑지의 내용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용주사종의 명문은 염거화상이 죽은 지 10년이 지나서 종을 발원하여 만들었다는 웃지 못한 결과가 나온다. 그러나 양식적으로 가장 확실한 통일신라의 승탑과 그 안에서 발견된 탑지의 내용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분명 용주사 종의 명문이 왜곡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 어째서 이런 명문을 종 표면에 새기게 된 것일까?
그 의문은 용주사가 있던 자리가 원래 통일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갈양사(葛陽寺)의 옛 터로 알려져 있지만 남아있는 기록은 조선시대 1790년 정조(正祖)가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圓)의 능사(陵寺)로 건립하였다는 후대의 내용만 있을 뿐이었다. 당시 용주사는 정조의 능행, 김홍도의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의 자료를 통해 나름대로 꽤 큰 사세를 떨치기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갈양사에 관련된 초창의 역사를 제대로 찾을 수 없었던 용주사는 그 사격을 높이고자 의도적으로 무명의 범종에 ‘갈양사(葛陽寺)’란 사명을 새겨 넣게 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럼 이 종이 원래부터 명문이 없었다 치더라도 과연 용주사 종이 통일신라 종 양식을 구비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종은 오히려 통일신라 종의 전형 양식을 구비한 가장 전형적인 고려 전기 종으로서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될 수 있다.
용주사 종의 특징을 살펴보면 종신은 상원사종과 같은 통일신라 종에 비해 홀쭉해져 세장한 느낌이다. 용뉴는 목을 구부려 천판을 물고 있으나 입 안으로는 보주가 표현되었고 앞, 뒷발로 천판을 누른 통일신라 종과 달리 왼발을 위로 들었다. 용뉴 뒤에 붙은 굵은 음통 부분은 마디를 이루며 서로 맞닿은 앙, 복련문이 아니라 위로부터 원형문과 반원권문, 당초문을 차례로 시문한 점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특히 천판 위로는 용뉴 주위를 돌아가며 용뉴와 음통을 별도로 주조할 때 생긴 주물 접합선이 한단 높게 돌출되어 있음도 독특하다. 상대와 하대는 서로 다른 문양으로 장식되었는데, 반원권을 번갈아가며 배치한 상대와 달리 하대에는 유려한 줄기로 굴곡진 연당초문이 시문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종이 통일신라 종과 다른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바로 종신 상부 면에 불, 보살의 삼존상(三尊像)과 비천상을 번갈아 가면서 새긴 점과 4개로 늘어난 당좌에서 찾을 수 있다.
즉 통일신라 종의 비천상은 833년의 연지사(蓮池寺) 종까지 2구 1조의 주악상을, 다시 통일신라 말까지는 1구의 주악상을 앞, 뒤로 배치한 것이 특징적이다. 여기에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963년에 만들어진 조우렌지(照蓮寺) 종을 시작으로 주악상에서 몸을 옆으로 뉘어 나는 비행비천상(飛行飛天像)으로 바뀌게 되다가 청녕4년명(1058) 종에서부터 다시 불, 보살상으로 변화되는 양식적 변천을 보인다.
따라서 용주사종에 보이는 불, 보살의 삼존상과 비천상이 함께 나오는 것은 고려 전기의 과도기적 양상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당좌는 원형의 연화문 주위를 고사리형의 당초문으로 두른 약간은 도식화된 형태로서 통일신라 종에 비해 아래쪽으로 치우친 하대 바로 위에 배치되었다. 특히 1058년에 제작된 청녕4년명 종에서 처음 등장하고 있는 4개의 당좌를 구비하고 있는 점에서 용주사 종은 절대로 통일신라 종이 될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통일신라 종의 명문 기록은 성덕대왕 신종을 제외하고 종신 표면에 이처럼 보기 싫게 음각시킨 예는 결코 볼 수 없다. 물론 글씨의 형태도 유려한 통일신라 서체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종 가운데 이 정도의 크기를 지닌 종에 처음부터 명문을 새기지 않은 예가 그리 흔치 않지만 원래부터 명문이 없다는 것이 불행이 되었는지 용주사 종은 결과적으로 후대에 왜곡된 명문을 새길 수 있었던 빌미를 제공해 주고 말았다.
그러나 이 용주사 종은 원래의 명문이 없더라도 단정한 외형과 정교한 문양, 주조기술 면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걸작으로서 국보로 지정받아 전혀 손색이 없는 종이라고 평가된다. 그 제작 시기는 일단 청녕4년명(1058) 종보다 뒤늦으며 새로운 형식의 삼존상이 등장한 점으로 미루어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중반 쯤 제작된 범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여음(餘音)
용주사 종의 명문은 문화재 가치를 파악하는데 있어 남겨진 기록 뿐 아니라 같은 시기의 유물을 비교하여 형식과 양식의 분석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미술사 연구 방법론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좋은 사례이다. 비록 제 나이를 잃어버렸지만 이제라도 국보 용주사 종이 지닌 의미와 그 가치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기대된다.
[불교신문3335호/2017년10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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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 동종 (龍珠寺 銅鍾) 혹은 용주사 범종 (龍珠寺梵鐘)
(국보 제120호)
종 목 : 국보 제120호
명 칭 : 용주사 동종 (龍珠寺 銅鍾)
분 류 :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의식법구
수량/면적 : 1구
지정(등록)일 : 1964.03.30
소 재 지 : 경기 화성시 용주로 136, 용주사 (송산동)
시 대 : 고려시대
소유자(소유단체) : 용주사
관리자(관리단체) : 용주사
신라 종 양식을 보이는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대형의 범종으로, 높이1.44m, 입지름 0.87m, 무게 1.5톤이다.
종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 주는 용통이 있고,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힘차게 몸을 들어 올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윗 문양띠(上帶)에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있는데, 아래 위 서로 어긋나게 반원을 그리고 그 안에 꽃과 구슬무늬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다. 이 띠는 사각형 모양의 연곽과 한 면이 붙어 있다.
4곳의 연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모양의 연뢰가 있는데, 남아 있는 것은 1곳 뿐이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三尊像)을 두었고, 아래쪽으로 치우쳐 4곳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원형의 당좌를 두었다. 비천상과 삼존상은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으로 옷자락이 가볍게 날리고 있다. 종 입구 부분의 아래 띠(下帶)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윗띠(上帶)와는 다르게 덩굴무늬를 두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종 몸체에 통일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조성된 것이라는 후대에 새긴 글이 있으나, 종의 형태와 문양이 그 시대와 일치되지 않아 학계에서는 고려 전기의 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용통에 약간 금이 가고 연뢰가 부서진 것 외에는 보존 상태가 좋으며, 조각한 수법이 뛰어나 고려 종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 검색창 2017년 3월 18일 현재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1,012000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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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 범종
• 코드: cp0501b05201
• 명칭 : 용주사범종
• 지정 : 국보 제 120호
• 조성연대 : 고려 전기
• 제원 : 전체높이 144㎝, 종신 109.2㎝, 입지름 87㎝, 입두께 5.8㎝, 무게 1500kg
• 소재지 : 화성 용주사
• 관리자 : 화성 용주사
• 설명
신라 종 양식을 보이는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범종으로, 우리나라 범종의 양식을 충실하게 갖춘 종이다. 재질은 청동이다. 세부제원은 상대너비 11㎝, 하대너비 12㎝, 당좌 지름 17㎝이다.
종 맨 위에는 신라 종에서 보이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연주문(連珠紋)을 돌려 여섯 단으로 구분을 하고 당초문(唐草紋)과 연꽃잎으로 장식하였다.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힘차게 몸을 들어 올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상대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있는데, 아래 위 서로 어긋나게 통일신라시대 종의 특징인 반원을 그리고 그 안에 꽃과 구슬무늬를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다. 이 띠는 사각형 모양의 연곽과 한 면이 붙어 있다.
네 곳의 연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모양의 연뢰가 있는데, 완전한 형태를 갖춘 곳은 1곳뿐이고 대부분 훼손된 상태다. 종신 앞뒤에는 비천상(飛天像)을, 좌우에는 두광(頭光)을 갖추고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삼존불상(三尊佛像)을 모셔, 고려시대 다른 종과는 특이한 배치방법을 하고 있다. 비천상은 머리 뒤로 발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인데, 두텁고 무거워 보이는 천의자락을 오른손으로 쥐고 있으며 표정도 사나워 보일 뿐만 아니라 가슴 아래에 연꽃모양의 구름이 배치되어 있어 자연스럽지 않은 모습이다. 반면에 새로 도입된 삼존불상은 중앙에 조용히 정좌한 여래 좌우로 보살들이 꿇어앉아 합장하고 있는데 차분하면서도 가냘픈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보살들의 팔을 휘감고 하늘을 향해 좌우로 날리고 있는 천의자락들도 훨씬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네 곳의 당좌(撞座)는 8개의 연꽃잎을 중심으로 와문(渦紋)을 연속시켜 원형(圓形)을 이루었다. 외곽을 고사리무늬로 장식한 점이 특이하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두 개이던 당좌가 네 개로 늘어난 점 등이 고려시대의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하대(下帶)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상대와는 다르게 위아래 연주문 안에 보상당초문(寶相唐草紋)을 두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상대와 하대가 똑같은 무늬인 보통의 예에 비하여, 이 종은 하대를 당초무늬로 장식한 점이 주목된다.
종 몸체에 음각으로 통일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조성된 것이라는 후대에 새긴 글이 있으나, 종의 형태와 문양이 그 시대와 일치되지 않아 학계에서는 고려 전기의 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음통에 약간 금이 가고 연뢰가 부서진 것 외에는 보존상태가 좋으며, 조각한 수법이 뛰어나 고려 범종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자료참조 : 문화재청, 직지성보박물관, 사찰 홈페이지>
출처 : 문화콘텐츠진흥원 2017년 11월 28일 현재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7&cp_code=cp0501&index_id=cp05010063&content_id=cp050100630001&search_left_menu=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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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용주사 동종
신라 종 양식을 보이는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범종으로, 높이1.44m, 입지름 0.87m, 무게 1.5톤이다.
종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 주는 용통이 있고,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힘차게 몸을 들어 올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어깨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있는데, 아래 위 서로 어긋나게 반원을 그리고 그 안에 꽃과 구슬무늬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다. 이 띠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과 한 면이 붙어 있다.
4곳의 유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모양의 유두가 있는데, 남아 있는 것은 1곳 뿐이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三尊像)을 두었고, 4곳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두었다. 비천상과 삼존상은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으로 옷자락이 가볍게 날리고 있다. 종 입구 부분의 넓은 띠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어깨띠와는 다르게 덩굴무늬를 두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종 몸체에 통일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조성된 것이라는 후대에 새긴 글이 있으나, 종의 형태와 문양이 그 시대와 일치되지 않아 학계에서는 고려 전기의 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용통에 약간 금이 가고 유두가 부서진 것 외에는 보존 상태가 좋으며, 조각한 수법이 뛰어나 고려 종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출처 : 위키피디아 2017년 3월 18일 현재
https://ko.wikipedia.org/wiki/%ED%99%94%EC%84%B1_%EC%9A%A9%EC%A3%BC%EC%82%AC_%EB%8F%99%EC%A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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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용주사 범종((龍珠寺梵鐘) (국보 120호)
(용주사 동종)
2014년 2월 13일 발췌
범종은 사원건물에서 쓰는 종을 가리킵니다. 절에서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거나 모든 이에게 때를 알려주는 것이었다가 그 소리가 신묘하여 예불의식 등에 쓰이게 되었는데 범종의 소리는 중생의 마음속을 깊이 울려 어리석은 몸과 마음을 자비로운 부처님의 품으로 이끌게 합니다. 이처럼 종소리만 들어도 번뇌가 없어지고 지혜가 자라난다고 하여 종소리 자체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대웅보전의 계단을 올라 왼쪽을 향하면 정면에 법고각과 마주 보고 있는 범종각이 있습니다. 1911년 무렵에는 보신각(普信閣)이라고 하였으며, 이 전각안에 있는 범종은 국보 제12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범종을 살펴보면, 종의 정면 아래 부분에 연꽃을 아로새긴 당좌(唐座, 종을 치는 부분)와 종신의 양쪽 옆에 자리한 비천상을 대할 수 있습니다. 고려초기의 범종이라고 하지만 드물게 보는 큰 규모이며 신라시대의 범종 양식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종의 정상부에는 신라 종에서 볼 수 있는 용뉴와 용통이 있습니다.
용머리는 종 정상부의 보주(寶珠)를 물어서 두발로 종의 정상부인 천판(天板)을 잡고 종 전체를 들어 올리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용통은 연주문(連珠紋)을 돌렸습니다. 여섯 단으로 구분을 하고 당초문(唐草紋)과 연꽃잎으로 장식하였습니다.천판에는 아무 장식이 없고 상대와 하대의 무늬는 서로 다른 무늬를 하였습니다.
상대의 경우 신라 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원권(半圓圈) 아래위에 서로 교대로 배치하고, 그 사이 사이에 당초 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종밑에 돌린 하대에는 연속된 당초 무늬로 장식하였습니다. 또 하대의 무늬에 당초가 한번 돌아 갈 때마다 그 중앙에 8엽 내지는 9엽의 연꽃무늬를 독립하여 배치하고 유곽의 문양대는 안쪽과 바깥쪽의 작은 띠 주변에 연주무늬를 두르고 그 가운데에 서로 연결되는 당초무늬 띠를 둘렀습니다. 유두는 둥근 연꽃잎 위에 도드라져 각 유곽마다 아홉 개씩 있습니다. 종신 아래 둥그런 당좌의 가운데 부분은 8엽의 연꽃무늬를 새기고 그 밖으로 연주무늬띠를 도렸습니다. 그리고 연주무늬를 다시 두르고 가장 바깥의 띠에도 연주무늬를 돌려 새김으로써 마무리 하였습니다.
종신에는 비천을 두 곳에 새겼고 그 사이 사이에는 연화좌위에 결가부좌한 삼존불상을 조각하였으며 보살의 천의(天衣)자락이 하늘을 향하고 있어 마치 천상세계에서 내려오는 듯한 형상을 보여줍니다. 종신의 비천상과 삼존불상의 사이에 추각(追刻)한 명문에 의하면 854년에 주조된 것이라 하는데, 이는 종의 형태가 고려양식이라는 점에서 일치하지 않고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황산(成皇山) 갈양사 범종 한 구 석(釋) 반야(般若)가 2만 5천근을 들여 조성하였다.
금상(今上) 16년 9월 일 사문 염거(廉居) 연기(緣起)
성황산(成皇山) 후신 화산(花山)의 갈양사 후신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 5월에 창건하였고, 동시에 이 범종을 주조하였습니다. 불기 2950년 7월 주지 석(釋) 송굴(松屈) 대련(大蓮)종의 크기는 총높이 144㎝, 입지름 87㎝, 두께 5.8㎝ 상대너비 11㎝, 하대너비 12㎝, 당좌 지금 17㎝이며, 900여 년전의 이른 새벽, 막 동터오는 화산(花山)에 울려 퍼졌을 그 우렁차고 은은한 소리는 아마도 무명에 헤매이는 중생의 혼미한 잠을 일깨웠을 것입니다.
출처 : 용주사 사이트 2014년 2월 13일 현재
http://www.yongjoosa.or.kr/about/about0305.jsp?top_menu_idx=1&sub_menu_idx=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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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발췌일 2014년 1월 14일
용주사범종(龍珠寺梵鐘)
출처 : 용주사 사이트 2014년 1월 12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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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발췌일 2009년 9월 13일 현재
종 목 |
국보 제12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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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용주사범종(龍珠寺梵鐘) |
분 류 |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의식법구 |
수량/면적 |
1구 |
지 정 일 |
1964.03.30 |
소 재 지 |
경기 화성시 태안면 송산리 188 용주사 |
시 대 |
고려시대 |
소 유 자 |
용주사 |
관 리 자 |
성직스님 |
신라 종 양식을 보이는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범종으로, 높이1.44m, 입지름 0.87m, 무게 1.5톤이다.
종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 주는 용통이 있고,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힘차게 몸을 들어 올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어깨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있는데, 아래 위 서로 어긋나게 반원을 그리고 그 안에 꽃과 구슬무늬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다. 이 띠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과 한 면이 붙어 있다. 4곳의 유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모양의 유두가 있는데, 남아 있는 것은 1곳 뿐이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三尊像)을 두었고, 4곳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두었다. 비천상과 삼존상은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으로 옷자락이 가볍게 날리고 있다. 종 입구 부분의 넓은 띠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어깨띠와는 다르게 덩굴무늬를 두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종 몸체에 통일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조성된 것이라는 후대에 새긴 글이 있으나, 종의 형태와 문양이 그 시대와 일치되지 않아 학계에서는 고려 전기의 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용통에 약간 금이 가고 유두가 부서진 것 외에는 보존 상태가 좋으며, 조각한 수법이 뛰어나 고려 종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이 종은 고려시대(高麗時代) 초기(初期) 범종(梵鐘)으로서 우리나라 범종의 양식을 충실하게 갖춘 종(鐘)이다.
종의 정상(頂上) 는 신라종(新羅鐘)에서 보이는 음통(音筒)과 용뉴(龍유)를 갖추고, 종신(鐘身)에는 위아래의 문양대(紋樣帶)는 연주문(聯珠紋)과 여의두문(如意頭紋)으로 장식된 반원권(半圓圈)의 문양과 당초문(唐草紋)으로 조식(彫飾)되어 있고, 웃띠인 어깨띠에는 4개의 유곽내(乳廓內)에 각각 돌기된 9유(九乳)를 갖추고 있다. 종복(鐘腹)에는 네 군데에 연화문(蓮華紋)과 와문(渦文)으로 장식한 당좌(撞座)와 비천상(飛天像)을 배치하고 있는데, 비천상은 앞뒤에 배치하고, 좌우(左右)에는 두광(頭光)을 갖추고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삼존상(三尊像)을 배치 조식하고있어, 고려시대 다른 종과는 특이한 배치방법(配置方法)을 하고 있다. 특히 당좌(撞座)는 8개의 연꽃잎을 중심(中心)으로 와문(渦紋)을 연속시켜 원형(圓形)을 이루었다. 아래띠인 구연대(口緣帶)는 웃띠와 달리 위아래 연주문 안에 보상당초문(寶相唐草紋)이 장식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종신에 음각(陰刻)으로 새긴 명문은 주조 당시부터의 것이 아니고, 후대(後代)에 새겨넣은 것이다. 전체적인 종의 형식(形式)과 양식(樣式)으로 보아 고려초기(高麗初期)의 범종으로는 중요한 것 중의 하나다. 높이 144cm, 입지름 87cm. |
출처 : 문화제청 2009년 9월 13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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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발췌 2007년 1월 20일 현재
용주사 범종 (龍珠寺梵鐘)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송산리 용주사에 있는 고려 중기의 범종. 높이 144㎝, 입지름 87㎝. 국보 제120호. 고려 전기의 동종으로서는 드물게 보는 거종의 하나이며 신라 동종의 양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동종의 정상에는 용뉴(龍瞿)와 용통(甬筒)을 갖추었고, 특히 용통은 세잔한 연주문(聯珠文)으로 돌려서 6단으로 구분하고 당초문(唐草文)과 연판(蓮瓣)으로 장식하였는데, 연판은 원형·반원형·타원형 등 여러 형태이다. 종정(鐘頂)의 천판(天板)에는 문양이 없으며 상대(上臺)와 하대(下臺)의 문양은 서로 다른 형태의 문양대로 장식하였다.
다만 동일한 것은 상대·하대 유곽(乳廓)·당좌(撞座) 등의 내외 둘레만 세잔한 연주문대로 하였고 그 내부에 화려한 문양대로 장식한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상대의 문양은 반원권(半圓圈) 문양을 상하 엇갈려서 장식하고 그 사이사이에 당초문으로 장식하였으며, 하대의 문양은 상대와 달리 연속되는 당초문으로 장식한 것이 다르다.
특히, 하대의 당초문에 있어서 당초가 한번 선곡(旋曲)하는 중앙에 8판 내지 9판의 연화문을 독립시켜 배치한 것이 이색적이다. 유곽 역시 연주문대 내에 당초문으로 장식하였고, 유두(乳頭)는 원형의 연판좌 위에 돌기된 9개의 유두를 가지고 있다.
4개소의 유곽 밑으로 원형의 당좌를 배치하고 있는데, 연화를 주문양으로 하고 그 둘레에 연주문대를 돌리고 다시 당초문으로 돌린 다음 또다시 연주문대로 조식하였다. 종신(鐘身)에는 천의를 날리며 승천하는 비천상(飛天像)과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채 두광을 갖추고 합장하여 승천하는 3존상을 교대로 배치한 특수한 양식이다.
원래 이 동종은 무명종(無銘鐘)이었으나, 후각한 명문이 있어 이에 따라 854년(문성왕 16)에 주조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이는 동종의 형태와 일치되지 않는다. 종신의 1개소에는 32자의 명문이 각명(刻銘)되어 있고, 또 1개소에는 55자의 명문이 각명되어 있다. 또한, 이 동종은 신라동종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고려 전기의 종으로, 반원권 문양을 상대에 장식하고 있는 점은 주목된다.
≪참고문헌≫
文化財大觀 2-國寶 2-(韓國文化財保護協會, 大學堂, 1986).
<이호관>
사진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두산세계대백과엔싸이버
내용 출처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제목 : | 용주사범종 원본보기 |
설명 : | 경기 화성시 태안읍 송산리 용주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범종. 높이 144㎝, 입지름 87㎝. 국보 제120호. 고려 전기의 동종으로서는 드물게 보는 거종의 하나이며, 신라 동종의 양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
출처 : | Copyrigh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출처 : http://chang256.new21.net/koryoart3_n01.html 2007년 1월 20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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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뱔췌 2007년 3월 26일 현재
고려 전기, 청동, 전체높이 145.0cm, 종높이 109.2cm, 입지름 86.6cm, 경기도 수원 용주사, 국보 제120호
상대에 아직 통일신라시대 종의 특징인 반원권 무늬가 남아있으며 종의 앞뒤로 비천상이 있는 등 신라종 양식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비천상과 함께 종의 좌우에 삼존불상이 도입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2개이던 당좌가 4개로 늘어난 점 등이 고려시대의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하대와 상대가 똑같은 무늬인 보통의 예에 비하여, 이 종은 하대를 당초무늬로 장식한 점도 주목된다.
비천은 머리 뒤로 발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인데, 두텁고 무거워 보이는 천의자락을 오른손으로 쥐고 있으며 표정도 사나워 보일 뿐만 아니라 가슴 아래에 연꽃모양의 구름이 배치되어 있어 자연스럽지 않은 모습이다. 반면에 새로 도입된 삼존불상은 중앙에 조용히 정좌한 여래 좌우로 보살들이 꿇어앉아 합장하고 있는데 차분하면서도 가냘픈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보살들의 팔을 휘감고 하늘을 향해 좌우로 날리고 있는 천의자락들도 훨씬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당좌는 외곽을 고사리무늬로 장식하여 특이하다.
원본 : http://www.jikjimuseum.org/Gallery_200407/product/Goryeo/22.asp 2007년 3월 26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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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龍珠寺) 범종(梵鍾)
소재지(所在地) : 경기도(京畿道) 화성군(華城郡) 태안면(台安面) 송산리(松山里)
연 대(年 代) : 고려(高麗) 초기(初期)
지정번호(指定番號) : 국보(國寶) 第120號
실측치(實測値) : 총고(總高); 144cm 종신고(鍾身高); 116.5cm 상대폭(上帶幅); 11cm
유곽폭(乳廓幅); 4.5cm 유곽장(乳廓長); 29×29cm 당좌경(撞座徑); 17cm
하대폭(下帶幅); 12cm 종구경(鍾口徑); 68cm 종구후(鍾口厚); 27.5cm
1921年 일인(日人) 소전간치랑씨(小田幹治郞氏)가 처음으로 용주사(龍珠寺) 內에 소재(所
在)한 것을 확인(確認)한다고 한 종(鍾)으로24) 本 종(鍾)은 고려시대(高麗時代)의 범종(梵
鍾)으로서는 드물게 보는 거종(巨鍾)인 동시(同時) 신라종(新羅鍾)의 양식(樣式)을 가장 충
실(充實)히 나타내고 있는 종(鍾)이기도 하다. 종(鍾)의 정상(頂上)에는 신라종(新羅鍾)에서
보이는 용뉴(龍鈕)와 용통(甬筒)의 형태(形態)를 갖추고 있으며 용두(龍頭)는 천판상(天板
上)의 보주(寶珠)를 물어서 두발로 천판(天板)을 딛고 종(鍾) 전체(全體)를 들어올리는 형태
(形態)로 되어 있다.
용통(甬筒)은 세잔한 연주문(連珠紋)으로 돌려서 6段으로 구분(區分)하고 당초문(唐草紋)
과 연판(蓮瓣)으로 장식(裝飾)하였는데, 연판(蓮瓣)은 원형(圓形)이나 반원형(半圓形) 또는
타원형 등의 형태(形態)로 장식(裝飾)된 각종(各種)의 문양(紋樣)들이 있다. 종정(鍾頂)에
해당되는 천판(天板)에는 하등의 문양(紋樣)이 없는 소문(素紋)으로 처리하였으며 상대(上
帶)와 하대(下帶)의 문양(紋樣)은 동일(同一)하게 처리한 것이 아니고 서로 다른 형태(形態)
의 문양대(紋樣帶)로 처리하였다. 다만 동일(同一)한 것은 상대(上帶)․하대(下帶)․유곽(乳
廓)․당좌(撞座) 등의 내외주(內外珠)에는 세잔한 연주문대(連珠紋帶)로 처리하고 그 내부
(內部)에 화려한 문양대(紋樣帶)로 처리(處理)한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상대(上帶)의 문양
(紋樣)은 신라종(新羅鍾)에서 흔히 보이는 반원권(半圓圈) 문양(紋樣)을 서로 상하교호(上下
交互)로 배치하여 그 사이 사이에 당초문양(唐草紋樣)을 조식(彫飾)한 것으로 주문양대(主
紋樣帶)를 이루었고 하대(下帶)의 문양(紋樣)은 연속되는 당초문(唐草紋)으로 조식(彫飾)한
것이 상대문양(上帶紋樣)과 구분(區分)된다. 특히 하대문양(下帶紋樣)의 주문양(主紋樣)인
당초문(唐草紋)에 있어서 당초(唐草)가 한번 선곡(旋曲)하는 그 중앙(中央)에 8판(瓣) 내지
9판(瓣)의 연화문(蓮華紋)을 독립하여 배치한 것이 또한 특색(特色)이다.
유곽(乳廓)의 문양대(紋樣帶)는 내외주(內外周)에 세잔한 연주문대(連珠紋帶)로 하고 그
중앙(中央)에 하대(下帶)에서 보이는 서로 연속되는 당초문대(唐草紋帶)로 처리(處理)하였
으며 유두(乳頭)는 원형(圓形)의 연판좌(蓮瓣座) 위에 돌기(突起)된 9유(乳)를 갖고 있다. 4
개의 유곽(乳廓) 직하(直下)에 원형(圓形)의 당좌(撞座)를 배치하고 있는바, 당좌(撞座)의
중앙부(中央部)는 8판(瓣)의 연화(蓮華)를 주문양(主紋樣)으로 하고 그밖에 연주문대(連珠紋
帶)를 돌리고 다시 당초문(唐草紋)으로 돌려있고 가장 외주(外周)에는 또한 연주문대(連珠
紋帶)로 처리(處理)하고 있다. 종신(鍾身)의 유곽간(乳廓間)에는 천의(天衣)를 날리며 승천
한 각(各) 1구(軀)씩의 비천(飛天)을 2처(處)에 배치하고 또한 좌우(左右)에 고려종(高麗鍾)
에서 처음 보이는 천의(天衣)를 날리며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두광(頭光)을 갖추고 합장
(合掌)하여 승천하는 삼존상(三尊像)이 2개소(個所)에 비천(飛天)과 교호(交互)로 배치되어
있는 특수한 양식(樣式)을 갖춘 형태(形態)로 조식(彫飾)되어 있다.
특히 本 종(鍾)에서 주목(注目)되는 것은 원래는 무명종(無銘鍾)이었으나 이는 종(鍾)의
형태(形態)와 일치(一致)되지 않는 것으로 판명(判明)된다.
명문(銘文)을 살펴보면 2개소(個所)에 각명(刻銘)되어 있는바 그 내용(內容)을 보면 1개소
(個所)에 있는 명문(銘文)은
특히 本 종(鍾)에서 보이는 상대(上帶)의 주문양(主紋樣)이 반원권(半圓圈)으로 나타내
고 있는 점(點)과 이존(二尊)의 상(像)이 보이는 것은 고려(高麗) 범종(梵鍾)에 있어서의
새로운 양식(樣式)의 하나로 주목(注目)된다. 물론 반원권(半圓圈)의 문양(紋樣)을 사용
(使用)한 고려(高麗) 범종(梵鍾)의 예(例)를 보면 일본(日本) 광도(廣島)의 조연사소장
(照蓮寺所藏) 종(鍾), 도근현(島根縣)의 천륜사소장(天倫寺所藏) 종(鍾), 자하현(慈賀縣)
의 원성사소장(原城寺所藏) 종(鍾) 등 여러 개의 고려(高麗) 초기(初期) 종(鍾)들에서 이
미 보이고 있다.
출처 :
1996년. 12월.
국립문화재연구 소장(國立文化財硏究所長) 김동현金 東 鉉)간
한국의 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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