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처음 오셔서 모르시나 본데

korman 2010. 5. 17. 16:50

 

 

 

 

처음 오셔서 모르시나 본데

 

청명한 수요일 오전시간, 삼각지역 근처에서의 점심을 곁들인 약속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시내에 들릴 곳이 또 한군데 있기는 하였지만 시간에 구애 받지 않으니 근처에 온 김에 불현 듯 전쟁기념관에서 하고 있다는 DMZ 특별사진전이 생각났다. 마음보다는 발걸음이 앞서는지 가 보자고 생각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몸은 어느덧 전쟁기념관의 정문을 통과하고 천안함 사건으로 안보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인지 평일인데도 여러 학교에서 단체관람을 온 학생들의 재잘거림이 청명한 5월의 하늘빛을 따라 기념관 분수연못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곳을 5번 이상은 오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매표소 앞에 서니 DMZ 사진전은 입장료 5천원을 받는데 비하여 상설 전시장은 공짜다. 5월과 6월이 가정과 안보에 관련된 달이고 또한 최근의 사건으로 안보의식이 중요하게 인식되었음인지 특별전을 제외한 상설 전시관 전체를 무료로 개방하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5천원 보다는 공짜 쪽에 무게가 기울어지며 또 생각하기 보다는 발걸음이 먼저 전쟁역사실 쪽으로 옮겨졌다. 여태까지 이곳에 올 때는 먼데서 온 외국인이나 친지들을 안내하고 왔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보조를 맞추느라 전시물에 대한 기록들을 잘 읽을 수가 없었는데 오늘은 나만의 시간이므로 그 기록들을 좀 잘 읽어봐야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6.25전쟁을 비롯하여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희생된 많은 영웅들의 흉상을 지나며 지난 잠시 동안의 세월에서 이들의 희생이 등한시되었던 관계로 최근 전 국민이 감당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부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슬픈 역사의 한 장을 또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전쟁역사실 둥근 회랑에 들어섰다. 그곳도 역시 우리나라 역사에서 잊혀서는 안 될 여러 장수들의 흉상이 가지런하게 놓여 관람객들에게 그들의 호국 정신을 심어주고 있었는데 을지문덕 장군을 비롯하여 많은 장수의 이름을 살펴보다 그 옆에 쓰여 있는 로마자표기(영문표기)를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곳에는 내가 알기로 이미 여러 해 전에 개정되어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한글의 로마자표기가 그대로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모음 위에 점도 찍고 줄도 긋고 한 그 이상한 글자들. 인터넷을 뒤져보니 그걸 McCune- Reischauer System(MR 표기법)이라 한다 하였다.

그러나 어쩌다 몇몇은 실수로 그냥 있는 것이겠지 생각하며 들어선 전쟁역사실에 놓여 있는 많은 유물 이름들의 로마자 표기가 그리 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그것들이 실수로 남겨진 것이 아니라 고쳐지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조선왕조”를 소개하는 곳에는 같은 전시실에 큰 설명문은 “Joseon Dynasty”로 유물을 소개하는 작은 푯말에는 거의 모두 그 이상한 점이 찍힌 “Choson”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이미 학생들의 교과서를 비롯하여 민관의 각종 관련 소개서에서도 이제는 모두 살아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그 글자들이 그곳에는 여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같은 전시실에서 하나는 “조선”으로 다른 것은 “초손”으로 마치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유물처럼.

 

기념관 사이트에 글을 올릴까 생각하다 마침 안내데스크에 나이 드신 분들이 계시기에 그냥 그곳에 이야기나 하고 가야겠다 생각하고 다가갔다. 머리가 희끗한 여자분이 상냥하게 맞으시며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묻는다.

“네 그 전쟁역사실의 로마자 표기가.....”

“아 네, 여기 과장님이 계시니 이분께 말씀하시면 됩니다.”

하고는 옆에 있는 뚱뚱한 중년남자 한분을 소개한다.

“전쟁역사실의 인물이나 유물들의 로마자표기가 예전 그대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알기로 바뀐 지가 10년 정도는 된 것 같은데...”

그러자 이 분 마지못해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의자에서 등을 떼더니만 첫마디가

“선생님께서는 오늘 처음 오셔서 모르시나 본데.....

그거 다 고쳐놨습니다. 어쩌다 눈에 안 뜨이는 곳에 혹 못 고친 것이 있는지는 몰라도 우리도 그런 거 다 고치고 있습니다.”

순간 말문이 막히며 “당신이 내가 여기 처음 왔는지 어찌 알며 처음 왔으면 그런 거 보지 말고 유물이나 제대로 보고 다니라는 거야?” 라는 말이 턱 밑에까지 오는 걸 참고

“안 보이는 곳이 아니라 한 전시실에 조선과 초손이 같이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유물 안내 푯말 대부분이 그리되어 있습니다. 이제 학생들 교과서도 모두 바뀌어 있을 텐데요”

순간 내 표정이 이상했음인지 그 분은 안내데스크위에 놓여있는 종이에 몇 자 긁적이더니 아주 내키지 않는 말투로 담당 부서에 전해 놓겠다고 했다.

 

그분 말씀대로 일 하는 쪽에서는 아무리 잘 고쳐도 당사자들은 발견하지 못하는 곳이 있다. 그래서 누구라도 그런 곳을 발견하면 관심을 가졌다가 더 좋은 환경을 위하여 제보하여주는 것이 좋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처음 오셔서 모르시나본데...” 대신에 “그런 데가 있었습니까? 어딘지 알려주십시오. 담당 부서에서 살펴보게 하겠습니다.” 뭐 적어도 이런 대답은 하여야 하지 않았을까?

 

그 날 그곳에서는 일본말도 들리고 영어도 들리고 중국말도 들리고 외국인들이 여럿 찾은 것 같았는데 그 외국인들이 “조선”과 “초손”이 어찌 다른가 물었다면 그 분 어떤 대답을 하였을까? 안내 데스크의 그 뚱뚱한 분 때문에 글 안 쓰려던 마음을 접었다. 입구의 커다란 “을지문덕” 표기부터가 그리되어 있는데 “안 보이는 곳에 혹...”이라니.

 

2010년 5월 열엿샛날

 

x-text/html; charset=iso-8859-1" width=141 src=https://t1.daumcdn.net/planet/fs11/29_21_29_13_6Ck6l_2557272_4_450.asx?original&filename=450.asx EnableContextMenu="" autostart="true" loop="1" volume="0" showstatusbar="">

 

 

'이야기 흐름속으로 > 내가 쓰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라하 여인의 민박 이야기  (0) 2010.06.14
어느 어린 해병의 귀환  (0) 2010.06.06
누가 이 여인을  (0) 2010.05.03
수치가 우선인가  (0) 2010.04.19
마음은 그곳으로 간다  (0) 2010.04.06